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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서울대 형제복지원연구팀 엮음 『절멸과 갱생 사이』, 서울대출판문화원 2021

근대화 과정 속 도시하층민에 대한 사회적 배제와 통치

 

 

이정은 李定垠

창원대 사회학과 교수 jeonglee@changwo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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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권단체에서 자원활동을 하며 배우고 공부하던 어느 날, 단체의 소장이 ‘양지마을 사건’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당시 내가 온몸에 상처를 입고 폭력을 피해 도망친 피해자를 혜화동 2층 사무실 앞에서 실제로 마주쳤는지, 아니면 그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맨발의 그를 현실처럼 기억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90년대 말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그런 폐쇄된 폭력의 공간이 존재한다는 경악스러움과 그래도 피해자가 도움을 요청할 도피처가 있다는 안도감, 인권단체의 헌신에 대한 경외감이 혼재했던 기억만은 또렷이 남아 있다. 그후 ‘양지마을 사건’은 어떻게 해결되었는지, 가해자는 어떤 처벌을 받았고 피해자는 어떻게 구제되었는지 사실 확인도 못한 채 수많은 ‘수용시설 사건’을 만났고, 개별 사건들의 진행 상황을 언론을 통해 간간이 확인하며 분노했다.

우리는 선감학원, 삼청교육대, 양지마을, 에바다, 형제복지원과 같은 일명 ‘수용시설’ 관련 사건을 접할 때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지 분노한다. 박래군은 이와 같은 “폭력의 일상화”의 원인을 『살아남은 아이』(전규찬 외, 개정판 이리 2014)에서 “침묵의 카르텔과 은폐의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한다. 어쩌면 우리 사회는 ‘어쩔 수 없다’는 묵인과 외면, 그리고 외면하는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마저도 인간에 대한 낙인과 서열이라는 반인권적인 풍조에 쉽게 희석시켜버리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절멸과 갱생 사이: 형제복지원의 사회학』은 ‘형제복지원 사건’을 통해 한국사회에서 수용시설 사건이 되풀이될 수밖에 없었던 권력구조와 제도의 작동원리를 고발한다. 하나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것의 발생과 은폐, 폭력의 존속과 묵인, 그리고 사건이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졌다가 피해생존자들의 대책위원회 활동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전과정을 이 책은 치밀하게 파헤친다. 폭력에 무감했던 한국사회가 고도성장 과정에서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고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일면 ‘활용’했던 부끄러운 과거를 정면에서 응시하도록 한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풍부한 국가기록문서와 구술자료, 보고서를 참조하여 다차원적으로 분석한 이 주제 최초의 사회과학연구서라는 데에 의미가 크다. 역사사회학적 관점에서 부랑인 수용소의 기원과 제도의 변화를 추적하는 것은 물론, 형제복지원을 둘러싼 권력의 작동, 그러니까 수용시설 사업자와 관리자인 공무원·경찰이 맺고 있는 관계, 시설 내 구성원의 목소리와 부랑인 수용소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시선까지 다각적으로 접근한다.

또한 국가권력 중심의 거시적 시각에서 더 나아가 지금까지 국가폭력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파괴해왔는지 묻고 그런 폭력이 자행되고 용인되었던 시대의 제도와 미시권력의 작동 과정을 공식·비공식 자료를 중심으로 충실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도 커다란 장점이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세가지 층위를 총체적으로 다룬다. 1부에서는 형제복지원을 둘러싼 구조, 2부에서는 형제복지원이 운영될 수 있었던 미시권력과 제도의 작동, 3부에서는 형제복지원 피해자이면서 수용자인 주체에 초점을 두고 있다. 1부가 식민지 시기 ‘부랑 나환자’를 통한 사회적 배제의 형성(김재형)과 발전국가 시기에 그것이 지속되고 변형되는 과정(박해남), 그리고 사회적 배제를 위한 다양한 국가기관들의 통치 기술들(추지현)을 다룬다면, 2부는 형제복지원 재단이 하나의 돈벌이가 되었던 역사(김일환)와 ‘자활’이라는 이름으로 시설과 국가와 지역사회가 공모한 과정(소준철), 형제복지원 내 규율과 폭력의 현실(곽귀병)을 보여주고 있다. 3부 ‘형제복지원의 사람들’에서는 사회적 지지망이 없었던 피해당사자들의 삶을 ‘또 하나의 근대적 라이프코스’로 분석(이상직)하며 이들이 관계망을 복원하고 운동의 주체로 활동하게 되는 과정(최종숙)을 분석한다.

이 책의 또 하나의 미덕은 여덟명의 필자가 권력구조와 통치제도, 그 속의 사람들을 독립적인 논문으로 다루면서도 단편적인 나열에 그치지 않고 완결성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다. 이는 호흡이 짧은 프로젝트 시스템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 소장파 연구자들의 자발적인 열정과 4년이라는 꾸준한 시간을 통한 공동연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학술적 의미뿐만 아니라 실천적 의미 또한 크다. 피해자들이 우여곡절을 겪으며 진상규명을 위한 모임을 만들고, 대책위원회가 구성되면서 관련 자료를 수집하며 충실하게 증언에 참여한 과정 자체가 곧 진실규명 과정이자 책의 출판을 가능하게 한 힘이었다. 피해생존자들의 운동이 제도화를 이끌어내고 대책위원회와 지지자들의 협력으로 진상규명을 시작하게 된 것은 각 주체들의 장기적인 노력이 빚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은 전규찬 교수가 중심이 되어 발간한 『살아남은 아이』와 인권운동활동가들이 기록한 『숫자가 된 사람들』(오월의봄 2015), 선감학원 피해생존자 구술집인 『아무도 내게 꿈을 묻지 않았다』(오월의봄 2019)와 시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시설사회』(와온 2020)와 함께 읽어보기를 권한다.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전혀 다른 공간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믿기지 않는 구술기록을 통해 가해자에 분노하면서도, 그런 구조 속에서는 누구나 시설수용자가 될 수 있었다는 섬뜩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출범은 부랑인 수용시설 피해자들의 인권회복을 위한 시작이자, 사회적 약자를 배제하는 한국사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지역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가졌던 지역 유지와 민간복지사업, 경찰과 검찰, 언론의 공모관계는 형제복지원과 같이 사라졌을까? 가해-피해 구도의 복잡한 구조 속에서 그 책임을 어떻게 논의해야 할까?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것은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가뿐 아니라, 무엇이 어떻게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어냈는지이며, 나아가 그런 갈등의 전선을 생산하며 ‘공분하기’에만 안주하도록 하는 것에 대한 통찰이다.(116면)

『절멸과 갱생 사이』는 앞으로 연구하고 고민해야 할 많은 질문들을 던진다. 시설 내의 장애인과 여성에 대한 또다른 폭력과 착취, 젠더 문제, 사회적인 지지와 연결망이 없다면 가두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낙인, 규율이라는 이름의 일상화된 폭력 등 매우 폭넓다. 87년 민주화운동 이후에 인권이나 차별, 일상적 폭력에 무관심했던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진단은 각 분야에서 연구와 운동을 진행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