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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공선옥 『춥고 더운 우리 집』, 한겨레출판 2021

나의 집은 어디인가

 

 

신미나 申美奈

시인 shinminar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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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이런 아파트 광고를 믿지 않는다. 부의 축적이 인생의 성공이나 사회적 신분과 직결되는 듯 부추기는 수작이 빤하기 때문이다. 살림이 푼푼한 사람들은 집을 여러채 사들여 적잖은 재미를 보기도 했겠지만, 서민들은 집 한채 사면 은행 빚을 갚느라 고단하게 산다. 집이 곧 돈이고, 돈이 곧 집이 되는 세상에서 집은 안식처라기보다 사고파는 상품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조차 새삼스럽다.

아파트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요즘, ‘똘똘한 집 한채’는 코로나 팬데믹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자구책이 되었다. 서민들은 집만 사지 않는다. 미래의 기대와 불안도 앞당겨 산다. 집 한채 갖고 싶은 욕망이 희망이 되는 시대에 집이란 무엇일까. 무엇이길래 누군가에게는 시세 차익으로 부를 안겨주지만, 누군가에게는 일할 의욕을 꺾고 박탈감을 주는 것인가. 값이 오르면 금세 다른 곳으로 옮겨 가기 위한 임시 거처일 뿐인가.

얼마나 좋은 위치에 부동산을 가졌는가를 성공의 척도로 보는 세상에서 공선옥의 산문집 『춥고 더운 우리 집』은 집의 본위를 곡진하게 되묻는다. 이는 곧 ‘어디서’ 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에 대한 질문과 통한다.

작가는 1963년에 태어나 ‘새마을 시대’를 통과하면서 조국 근대화라는 명목으로 개발되던 시대를 거쳤다. 첫 집은 곡성 산골마을의 초가집이다. 서향이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북서풍이 몰아치며, 대들보를 타고 온 구렁이가 시렁 위 달걀을 삼키고 스르르 사라지는 집이다. 겉만 시멘트 벽돌로 쌓아 신식 집을 흉내 낸 ‘부로꾸집’(블록집)은 비가 오면 아궁이에 물이 괴었고, 고등학교에 다니기 위해 언니와 살았던 집은 식당에 딸린 셋방이었다.

청소년기를 지나 청년이 되어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지낸 집도 하나같이 눅눅하다. 여공이었을 때 살던 정릉의 봉제공장 기숙사, 옆 동네 사람들이 ‘영구’라고 부르는 아홉평짜리 영구 임대아파트와 독일의 집 등.

“적어도 집이란 게 그 정도는 돼야 하는 거 아닌가. 집값 오르는 거 봐서 후딱 팔아치우고 떠나기 좋을 만큼의 짐만 가지고 사는 ‘임시 숙소’로서의 집이 아닌, 벽에 가만히 등을 기대고 앉으면 두툼한 시간의 더께가 내 등을 든든히 받쳐주는 집. 그것이 집 아닌가.”(116면)

작가가 고향을 떠나 일자리를 찾아서 도회지를 떠돈 것처럼 도시에 사는 세입자들도 주거 난민과 같다. 나도 서울에서만 일곱번 주거지를 옮겼고 내가 살았던 집도 작가가 거쳐온 집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월세가 비싸서, 전세 보증금을 올려달라고 해서 평균 삼년에 한번꼴로 짐을 쌌다 풀었다. 웃풍이 세서 누우면 코가 시렸던 미아삼거리 옥탑방부터 혜화동 반지하 빌라까지, ‘벽이 곧 담이 되는’ 다세대 주택에서 삼십대를 보냈다. 부동산중개인은 매물을 소개할 때 ‘지하철역에서 십분 거리’나 ‘일층 같은 반지하’라는 말을 덧붙이곤 했다.

작가도 “가난하고 외로운 나날들의 노동이 너무 힘겨워서”(227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갓 서른살 신출내기 작가로서 어미로서, 일이 힘들어 그만두면 자신과 아이들이 굶게 될까봐 긴장하며 글을 썼다. 그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입에 달린 사랑해, 힘내가 아닌, 한 생애들이 녹아 있는, 오랫동안 아궁이 불에 덥혀진 조약돌 같은 온기가 그득한 말, 그 말들이, 그 온기들이 실은 나를,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 이 세상에 내보냈음”(207면)을 고백한다.

아이들을 데리고 이리저리 떠돌다 작가는 마침내 고향 곡성 근처 담양에 있는 수북에 터를 잡는다. ‘수북’이라는 지명에 혹해서 버스를 타고 갔다가, 그 일을 계기로 얼떨결에 땅을 사고 한참 뒤에야 마음이 동해서 집을 짓는다.

황무지를 다지고 나무 기둥을 세우고 인부들에게 점심을 해 먹이고 상한 속도 달래가면서 ‘수북집’은 뚜닥뚜닥 구색을 갖춰나간다. 완성된 집이 아니기에 무엇 하나 허투루 여길 게 없고, 두루두루 손볼 곳도 많다. 그렇게 자연스러운 시간의 손때가 밴다.

집 짓는 과정이 애틋하게 여겨지는 것은 여성으로서 글을 써서 돈을 벌고, 잦은 이사를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지나온 작가의 오십여년이 ‘평생 동안 살 집 한채’를 찾는 여정과 같기 때문이리라.

2015년 10월 1일, 새집에 들어간 첫날, 작가는 툽툽한 손으로 바닥을 닦고 또 닦는다. “세상에 없던 건물이 서너달 만에 떡하니 서 있는 것이”(117면) 어색해서다. 새집과 인사하는 첫 의식이 ‘걸레질’인 셈인데 그 장면이 참 아름답다. 먼지를 훔치고, 머리카락을 줍고, 얼룩을 지우면서 작가는 집과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여기서 평생, 죽을 때까지 같이 살자고.

작가가 꼽은 좋은 집의 조건 중 하나는 “내 집뿐 아니라 이웃집이 안녕한 것을 보고 안심이 되는”(129면) 집이다. 수북은 이웃과 김치를 담가 먹고 일요일이면 골목 가득 뛰노는 아이들이 있는 동네다. 집에 아무도 없어도 구순이 넘은 할아버지가 찐 옥수수를 이 집 저 집에 놓고 가고, 그것을 보고 자라는 아이들도 그렇게 자랐으면 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요새는 앞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니 어떤 이는 이런 풍경을 지난 시대의 낭만이라 치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웃이 없는 삶의 내용은 얼마나 앙상할 것인가. 어느새 우리는 이웃을 뺀 삶에 익숙해져서, 정서적 빈곤 상태를 개인의 삶이라 착각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공선옥의 산문은 검박하고 슬프다. 슬픔을 말한다고 해서 절망만을 말하지 않듯이 이 책도 지난날의 애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우리 앞에 놓인 삶이 신산할지라도 거듭 추스르며 살아가겠다는 자세를 정직하고 다부지게 그려낸다.

책장을 넘기다보면 누구나 한번쯤 자신이 살았던 집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나 역시 기억 속에서 홀대했던 고향집이 먼저 떠올랐다. 옹색하고 궁상맞아서 부끄럽게 여겼는데, 돌아보니 그 모양이 영 밉상은 아니다. 코도 풀고 세수도 해서 말갛게 씻긴 고향집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진다. 눈물 나는 일도 있었으나, 좋은 일도 많았다. 일상의 재미가 콩떡 속의 콩처럼 콕콕 박혀 있던 옛집이 그리워진다.

작가의 바람대로 “집이 돈이 아니라, 집이 그냥 집”(112면)이 되는 세상이 올 수 있을까. “어디로 떠나도 언제고 돌아올 수 있는 집, 나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내 물건들이 편히 자리 잡고 있는 공간, 그곳이 내 집”(79면)이라는 문장을 읽고, 집 안을 휘 둘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