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평
올해 창비신인시인상 공모에는 총 1138명이 귀한 작품을 보내주셨다. 많은 편수와 비례하여 미덕을 갖춘 작품이 많았기에 벅찬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팬데믹을 맞아 서로 마주하지 못하는 시간이 길었는데, 그사이 많은 분들의 언어의 밭에선 시가 이토록 풍성하게 가꿔지고 있었다는 사실이 심사위원들뿐 아니라 시를 읽고 쓰는 모든 분들에게 힘이 되는 것 같았다. 심사위원들은 충분한 시간을 두고 응모작들을 검토한 뒤 4인의 작품을 최종 검토작으로 삼아 논의를 진행했다.
「변신의 귀재」 외 9편의 작품은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기 위한 노력이 돋보였다. 언뜻 시적 연결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 산발적이고 파편화된 진술이 아닌가 염려되었지만 개성적인 감각을 보여주는 표현들이 많았다. 작품 간의 편차가 있었는데 「조련」 등이 빼어난 작품으로 꼽히는가 하면 「트럭」 등은 아쉬움이 남는 작품으로 언급되었다. 시라는 장르가 무조건 하나의 정념을 보여주며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가 지니는 울퉁불퉁한 가독성의 영역이 있다면 이 응모자가 앞으로 보여줄 세계는 무궁무진할 것이다.
「내 앞의 동경 씨 내 뒤의」 외 5편은 시를 전개해가는 방식의 능란함이 눈길을 끌었다. 한행씩 떨어뜨려 놓으면 일견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행과 행이 만나서 연을 이루고 한편의 시를 이루는 과정에서 긴장감이 만들어지고 인상적인 이미지가 펼쳐졌다. 그것은 편안한 방식으로 시를 이끌어가면서도 자유롭고 거침없는 시행의 운용을 통해 자기의 목소리를 분명한 언어로 드러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 까닭에 세련된 방식과 그 안에 담긴 목소리의 결합이 온전히 본인의 것으로 체화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얼마쯤 의구심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응모작 전반에 드리워진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도 미더움을 주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아쉽지만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빛의 정원」 외 4편이었다. 투고된 시들의 편차가 적고 이미 완성도 있는 시세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 심사위원 모두가 동의했다. 또한 고유의 시적 서사와 정서가 풍부하게 해석될 여지가 있으며, 코로나 이후의 시대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힌다는 점에도 주목하였다. 다만 시들이 기대고 있는 이미지나 세계가 다소 좁고, ‘빛’이나 ‘미래’ 등 시적인 이미지들을 가져오는 방식이 상투적이라는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더욱 넓은 방향으로 시세계를 확장해나간다면 분명 단단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계속해서 써달라는 응원의 말을 보탠다.
「호수공원」 외 4편은 언뜻 수월하게 읽히는 말을 맵시있게 엮어가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았다. 현실에 닿은 채 출발한 시의 시선은 지금 이곳에 정박해 있기보단 멀리까지 나아갈 줄 알았고, 그를 다 경유하면서도 처음 자리에 버젓이 놓여 있던 어긋남을 응시할 줄 알았다. 매 작품마다 마지막 구절이 특히 인상적으로 다가왔는데, 생활에 깃드는 외딴 마음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침착하게 궁리하는 이의 면모가 근사하게 드러났다. 시가 다가왔다가 물러날 때마다 남기는 감정의 파동이 천천히 길게 이어진 탓에 논의를 시작하면서부터 마칠 때까지 모든 심사위원들이 손에서 좀처럼 놓지 못한 작품이다. 시에도 독자가 다시 돌아보도록 만드는 장력과 그를 유지하는 지구력이 있어야 한다면, 이 시편들은 그 힘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있다는 믿음을 주었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호수공원」 외 4편을 제21회 창비신인시인상 수상작으로 정한다. 당선자께서는 자신만의 화법으로 구축한 세계를 의심하지 말고 시로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을 더욱 자유로이 해주셨으면 한다. 낙선을 하게 된 분들에게도 위로의 말씀을 전한다. 보내주신 작품을 통해 머지않아 다시 만날 날이 오리라는 것을 감히 예감하게 해주셨다. 다른 무엇이 아닌 ‘시’를 마주하는 태도가 이토록 치열한 이들이 함께 쓰고, 읽고 있으니 우리는 외롭지만은 않을 것이다. 옥고를 보내주신 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양경언 유병록 이근화 주민현
수상소감
남현지
1977년 출생, 동국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내가 왜 시에서 돈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매일 돈을 쓰고 벌고 생각하면서도 그 단어를 말하지 않는 이유. 돈은 이제 너무 명확한 가치이거나 개인의 사정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시가 경제와 분리된 영역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어쩌면 점점 경제가 되어가는 삶과 자신을 싫어하는 마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몇번 쓰고 나서야 아, 지겨워서?! 하고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했지만
그 궁금증에 이렇게 오래 매여 있을 줄은 몰랐다. 시에 대한 믿음을 계속해서 추궁하는 일이 될지도 몰랐다. 헤매는 게 적성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포기가 안 되는 것과 해보고 싶은 것이 나타나면 ‘나’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건 나도 안 돼, 못 물러서. 그때부터 시가 재밌어졌다. 믿음 대신 자신의 한계와 가능이라는 말을 썼을 때부터
나는 마음이 좋았다. 시끄러워서 좋았다.
마음이 일어나서 다른 마음들을 깨우고 서로 싸우고 침투하고 나란하다가 사라지는 시끄러움이
말이 지칠 때까지 마음에 시달리는 것이 좋았다.
말도 결국 마음과 협상을 해야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 분명할 때에도 말은 얇고 투명해 보였다.
마음에게 돈에 대해 묻는다는 건 돈도 마음에 좀 시달려보라는 것이기도 했다. 내게 시는 그렇게 온갖 말들과 시끄럽게 지내는 것이어서 앞으로도 잘 부탁하고 싶다. 마음에게, 말에게. 아무도 쉽게 지지 말고, 힘내라.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꺼이 귀를 기울여주신 김춘식 선생님과 시를 계속 써야 한다고 용기를 주신 유계영 선생님 덕분이라고 꼭 말씀드리고 싶었다. 동국대 선생님들 한분 한분의 수업이 내겐 새로운 질문이었고 그 질문으로 드러나는 세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행복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빛나는 감각으로 자극을 준 학우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같이 공부하고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시간의 힘은 아주 큰 것이었다. 그리고 시를 놓지 않게 해준 사람들, 나보다도 더 나를 믿어주었던 성헌과 민영, 세계 곳곳의 좋은 시인들을 소개해주었던 은경언니, 시가 무엇보다 성실히 쓰는 것임을 일깨워준 연희언니, 문학의 아직 빈 곳을 삶으로 보여주는 호연에게 묵은 고마움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뒤늦은 공부를 응원해주신 부모님과 동생 가족에게 이제야 걱정 대신 좋은 소식 하나를 전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함께 웃는 하루를 가능하게 해준 봉우에게, 그 다정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