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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동범 趙東釩
1970년 경기도 안양 출생. 2002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이 있음. stopaids@hanmail.net
에어포트
활주로의 저편으로부터 비는 내린다. 당신은 문득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떠나온 고향의 한그루 베고니아를 반추한다. 시들어가는 베고니아를 떠올리며 당신은, 망명지의 정처 없는 특별기를 기다리고 있다. 비가 내리고, 어느덧 눈은 내린다. 환승터미널의 밤과 낮은 매뉴얼에 따라 안전하고, 시차에 익숙지 않은 환승객은 홀연히 사라져버린다. 망명지로부터 회신은 도래하지 않는다. 당신은 환승터미널의 벤치에 앉아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입국할 수 없는 미래를 중얼거린다. 오래된 도시와 멸망한 부족의 폐허는 화물칸에 방치된 채 하역되지 않는다. 당신은 장전되지 않은 권총을 꺼내 방아쇠를 당기기로 한다. 비행을 마친 국적기들은 아름다운 남태평양과 적도 인근의 적란운을 떠올리며 평화롭다. 떠날 수 없다면 사라져야 한다고, 당신은 중얼거린다. 오래전에 배달된 신문을 펼치면, 사라진 신화와 전설에 대한 이야기가 끝없이 폐기되고 있었다. 안데스의 산맥들이 들려주는 기원전의 신화가 들리는 듯도 했지만, 환승터미널의 밤은 그저 외롭고 여전히 쓸쓸했다. 무수히 많은 좌표로부터 당신의 절망은 전송된다. 하지만 특별기는 도착하지 않으므로, 떠날 수 없다면 사라져야 한다고 당신은 중얼거린다. 당신은 문득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와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한다.* 국가와 민족을 향해 구름은 흘러갈 것이다. 일기예보는 적중하지 않고, 국경선 너머에서 반정부군의 시신은 타오른다. 살아남은 당신은 문득 매트릭스의 전화기를 떠올린다. 활주로 너머로 밤은 찾아오고, 당신의 환승터미널은 끝도 없이 폐쇄된다. 당신은 연어샐러드가 제공되는 기내식을 주문하고 싶어진다. 그리하여 당신은, 장전되지 않은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기로 한다. 착륙에 실패한 국적기는 이윽고 밤의 폐허가 되고, 망명지로부터 특별기는 날아오지 않는다. 모든 것은 끝이 났는가. 창밖에는 비가 내리고, 시베리아로 날아가지 못한 철새는 피뢰침에 매달려 번개를 기다리고 있다. 지상에는 여전히 착륙에 실패한 여객기가 참혹하고, 망명지를 떠난 특별기의 폭파 소식은 그러나, 당신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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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균의 「추일서정」을 변주.
ppm
우리는 키스를 나누며 오래된 추억을 회고합니다. 당신의 혀와 나의 혀가 맞닿으며 파도는 밀려오고, 우리의 파국은 쉽게 감지되지 않습니다. 석양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고, 헤어진 연인들처럼 우리는 눈물을 흘립니다. 해변으로부터, 불온한 피를 뚝뚝 흘리는 시신들이 걸어 나오면, 바다의 농도는 이해할 수 없는 피의 문양으로 가득 차오릅니다. 당신과 나의 발목에는 피의 문양이 음각되고, 물러설 수 없는 사랑의 파국을 떠올리며 우리의 혀는 감지할 수 없는 어느 지점을 탐닉합니다. 불길함에 발을 담근, 당신의 얼굴은 오래전에 인화된 흑백사진처럼 천천히 사라지지만 나는 곧 당신이고, 당신의 황폐한 내력을 여전히 나는 서성입니다. 해변의 석양을 배경으로 나누던 키스는 오래지 않아 소멸에 이르지만, 최선을 다해 우리의 키스는 사랑을 속삭입니다. 나의 혀가 당신의 혀로 전이될 때, 당신의 절정이 나의 절정으로 환원될 때, 당신은 오래전에 헤어진 애인을 떠올리며 파멸에 이른 오르가슴을 소환합니다. 사랑은 충만하고, 우리의 키스는 입안 가득 말라가며 희미해지는 순간을 더듬습니다. 당신과 키스를 나누며 나는 숨조차 쉬지 못하고, 몸 안의 산소가 희박해지며 새로운 세계는 펼쳐집니다. 당신의 숨과 나의 숨이 맞닿으며, 우리는 기억나지 않는 전생을 영원토록 잊지 못합니다. 전생을 생각하면 언제나 눈물이 난다고, 당신은 속삭입니다. 당신의 혀가 나의 혀를 휘감고, 오래도록 우기(雨期)는 끝나지 않습니다. 수평선을 위무(慰撫)하며 적란운은 피어오릅니다. 해변에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간, 맑고 투명한 시신들이 명징하게 떠오릅니다. 바다는 이해할 수 없는 피의 문양으로 가득 불길하고, 우리는 키스를 나누며 그 해변을 오래도록, 첨벙첨벙 서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