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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문학, 정치, 민주주의

 

성장하는 여성, 달라지는 여성서사

영화 「도희야」와 「소리도 없이」를 중심으로

 

 

이나라

동의대 영화·트랜스미디어 연구소 전임연구원. 최근 논문으로 「인류학적 이미지와 형상적 섬광」 「아녜스 바르다 영화의 목소리 연구」가 있음.

 

 

페미니즘 리부트와 한국영화의 장

 

2010년대 후반 한국사회에서 가장 큰 목소리로 이견을 표했던 주체는 틀림없이 일단의 여성 주체, ‘우리, 여성’1이라고 함께 말하는 이들이었을 것이다. 여성들의 목소리는 탑다운(top-down) 방식의 조직화를 거치지 않고도 온라인을 중심으로 유례없이 폭발적인 속도로 증폭되었다. 여성 주체는 온라인 공론장과 거리에서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드러났으며, 끈덕지게 상호의존적인 집단을 형성했다. 2015년 이후 우리는 끊임없이 그러한 ‘우리, 여성’의 목소리를 듣는다. 가령 고용시장의 불평등을 지적하는 목소리, 온라인과 오프라인,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에서 경험하는 여성혐오와 성폭력의 행사에 분노하며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폭발력을 가진 것은 몸에 대한 목소리였다. 여성들은 여성의 신체에 가해지는 성폭력과 임신중단시술 불법화 등 국가권력의 통제를 규탄하고 거부했다. 같은 시기 한국영화계에도 이러한 흐름이 분명해졌으며 무엇보다 성폭력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강남역 살인사건이 있었던 2016년 하반기 이후 SNS를 중심으로 문화예술계 성폭력 고발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나는 가운데 영화계 인사에 대한 고발도 이어졌던 것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의 몸은 은유적인 의미에서나 실제적인 의미에서 진정 전쟁터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늘 몸이 ‘출현’하는 특권적 장소였다. 영화적 신체는 늘 젠더적 응시의 대상이었고, 영화는 젠더의 전쟁터였다.2 페미니즘 리부트와 함께 각성하고 주로 온라인 광장에 집결한 여성 관객들은 장르영화 일반이 여성을 재현하는 상투적인 방식을 여성혐오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보이콧하는 동시에 여성영화, 여성서사영화에 대한 지지를 더욱 적극적으로 표명했다. 여성혐오적인 표현과 작품을 지목하고 가르는 온라인의 여론은 때로 지나치게 신속하고 거칠어 보였다. 그런 여론의 추이를 좇다보면 작품에 대한 고유한 해석의 가능성 내지는 해석의 시간이 더이상 충분히 허용되지 않으리라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페미니즘 리부트와 맞물려 여성영화와 여성서사영화를 함께 요청하는 관객들의 움직임 자체는 수행적인 정치적 행위임에 틀림없다.

여성 관객의 호응을 받은 영화들은 평균 제작비를 기준으로 분류할 때 대부분 10억 미만의 제작비를 사용한 ‘다양성 영화’ 내지 ‘독립영화’의 범주에 포함된다.3 남성지배사회의 억압적 질서에 대한 여성의 자각과 투쟁을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기록했던 이들은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들일 것이다. 2015년 이후 개봉한 장편 다큐멘터리 중 페미니즘 운동 및 시선과 결합한 대표작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우리는 매일매일」(강유가람 2019)이 페미니즘 운동과 관계된 사적 주체들의 삶을 추적하고 역사화한다면 「너에게 가는 길」(변규리 2021)은 성소수자의 싸움을 기록하며, 「피의 연대기」(김보람 2017)는 페미니즘 운동의 주요 의제인 여성의 몸을 영화의 주제로 삼았다. 「잡식가족의 딜레마」(황윤 2014), 「기억의 전쟁」(이길보라 2018) 등은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환경, 전쟁 피해자 등 여타 사회운동의 의제를 다룬 장편 다큐멘터리다.

비교적 잘 알려진 사회학자의 도시개발 기록지인 「사당동 더하기 22」(조은·박경태 2009)나 「사당동 더하기 33」(조은 2020) 외에도, ‘8년 연속 평화적 무파업 타결’이라는 신문의 한줄 뉴스를 넘어 싸움을 준비하는 노동조합원들의 매일을 가까이에서 기록한 「깃발, 창공, 파티」(장윤미 2019) 및 영주댐 공사로 이주하게 된 노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프실」(문창현 2018) 등도 특기할 만하다. 이들 작품은 페미니즘 주제를 내세우거나 페미니스트의 관점을 표명하는 다큐멘터리는 아니지만 갈등을 기록하고 있는 자—여성 또는 사회적 약자의 역사를 수집하고 기록하는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의 시선과 신체에 대한 주목을 요청하는 작품들이다. 극영화 「휴가」(이란희 2020) 역시 노조운동과 해고라는 소재를 다루는데, 해고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는 한 중년 노동자가 동료 노동자나 고용주와 겪는 갈등보다 청소년기의 딸과 겪는 갈등에 초점을 맞추는 새로운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여자아이의 성장과 고통의 관조

 

2015년 이후 개봉작 중 여성 관객의 가장 큰 주목과 지지를 받은 영화는 「우리들」(윤가은 2015), 「벌새」(김보라 2018), 「메기」(이옥섭 2018), 「보희와 녹양」(안주영 2018), 「최선의 삶」(이우정 2020), 「태어나길 잘했어」(최진영 2020) 등 여성의 성장서사를 다룬 여성감독의 작품들이다. 이들 영화는 세계 속에서 길을 잃는 아이나 청소년, 청년의 미숙함에서 세계에 대한 대안적인 시선을 기대하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학교폭력을 그린 독립영화 「파수꾼」(윤성현 2010)의 성공 이후 적지 않은 영화들이 한국사회의 폭력성을 그대로 반복하는 청소년 집단을 소재로 삼았다면, 앞서 거론한 여성 성장영화들은 그 대척점에서 여성 청소년의 세계를 가능성의 세계로 묘사한다. 이러한 성장영화 속 여성 청소년들은 남성 가부장의 세계,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모든 것을 내어준 어른의 세계에서 고통받으면서도 바깥을 꿈꾸기를 그치지 않는다. 카메라는 여자아이들의 시선을 따라 유년의 오래된 풍경을 관조하고 불가능해 보이던 희망을 되새기기 시작했다.4

그런데 관조적인 여성 성장영화에서 주로 앞세워지는 것은 여성의 피해 상황과 무력함인 경우가 많다. 혹시 이들 영화가 전시하는 이미지는 이미 한국영화가 ‘순수하고 상처받은 존재’로 표상해왔던 여자아이 이미지의 반복이 아닐까? 이때 아이는 순수하기 때문에 세계의 질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세계의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순수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는 아이는 상처받은 존재이기에 순수하고, 순수하기에 상처받는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밀양 집단성폭력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성폭력 피해자인 소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한공주」(이수진 2013)와 IMF 직전 한국경제 성장기 속에 사춘기를 지나는 소녀를 중심으로 한국사회와 가족의 평범한 일상에 내재한 폭력적 성격을 반추하게 했던 「벌새」는 모두 여자아이의 얼굴을 영화와 포스터 전면에 내세운다. 「한공주」에서 공주는 자신을 향하는 수군거림에 맞서 침묵한다. 「벌새」에서 은희는 차별과 폭력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바르뜨(R. Barthes)식 표현을 빌리면 이들의 얼굴 이미지는 우리를 찌르는 ‘푼크툼’(punctum)을 자아낸다. 현상학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이들의 얼굴은 순수한 현전성이며, 기호학자는 여기서 얼굴의 의미작용을 읽어낼 것이다.5 그런데 순수한 현전성이건, 해독해야 할 기호건, 관객은 얼굴이 호소하는 고통을 듣는다. 얼굴이 고통의 징후가 될 때 얼굴은 침묵한다. 아니, 얼굴이 침묵하므로 얼굴은 고통의 징후가 된다. 그렇게 아이는 관객의 시선 안에서 상처 입은 자, 피해자로 남는다.

그렇다면 폭력을 경험하고, 폭로하고, 고백하는 인간을 피해자로 환원하지 않고 인간으로 출현할 수 있게 하는 이미지와 픽션의 전략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랑씨에르(J. Rancière)는 ‘스투디움’(studium)과 ‘푼크툼’을 구별하는 바르뜨의 이미지론을 비판하며 19세기 이후의 예술이 속한 “미적 체계”에서 이미지란 눈에 보이는 것을 일컫는 말이 아니라고 말한다. 랑씨에르는 대상이 스스로 말하듯 묘사되거나 대상이 침묵하듯 묘사되는 방식을 이미지로 칭한다. 또한 ‘픽션’ 또는 ‘우화’를 허구의 이야기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대신 텍스트와 이미지를 연결하거나 파열시키는 방식의 의미로 지칭한다. 이로부터 ‘픽션적 진실’의 중요성이 출현한다.6 이후 쏟아지게 될 여성영화를 미리 선취하고 있는 「도희야」(정주리 2014)와 코미디영화의 문법을 따르고 있는 「소리도 없이」(홍의정 2020)는 아이의 얼굴과 아이의 말을 연결하고 끊어내면서 ‘픽션적 진실’이라는 이 까다로운 질문에 대해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한다.

 

 

순수와 교활의 경계 위에서: 「도희야」

 

「도희야」는 현실세계에서 주변인으로 존재하는 두 종류의 사람을 중심인물로 내세운 영화다. 가정폭력에 노출된 도서벽지의 중학생 여자아이 도희(김새론 분)와 경찰대 출신의 엘리트지만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추문으로 받아들이는 조직에 의해 벽지로 좌천된 여성 경찰 김영남(배두나 분)이 그들이다. 이들을 주변으로 밀어내는 영화의 구체적 장소는 ‘친밀한 폭력’이 묵인되는 배타적 분위기의 도서마을이다. 그리고 김영남은 관습적 시선이 가하는 시련과 위협을 이겨내고, 구조적인 폭력의 희생자인 도희를 구하는 영웅적인 인물이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도희야」의 설정은 전혀 새롭지 않다. 먼저 배경이 그렇다. 산간·도서 벽지는 그간 한국 대중문화에서 퇴행적 유토피아이거나 디스토피아적 공간이었다. 공포, 기이함, 위험의 장소건, 휴식, 평화, 과거의 유토피아건 이들 공간은 전적인 타자성의 공간으로 묘사되었다. 아이, 외국인, 여성, 외지인을 차별하고 위협을 가하는 「도희야」의 공간적 배경은 디스토피아적 타자성의 공간 상상을 답습한다. 도희라는 아이를 내세우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놈 목소리」(박진표 2007) 등 2000년대 후반 범죄 장르물은 아이, 특히 여자아이의 희생을 서사의 상투적 요소로 삼아왔는데, 이 역시 정치적 갈등을 은폐하는 영화적 퇴행의 사례다. 아동 유괴, 아동 살해라는 사건을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스릴러 장르물의 관습 아래서 사회적인 공포를 상상적으로 해소하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절대적 악으로서의 가해자, 가해를 응징하지 않는 사회적 부정의, 순수한 희생자와 희생자 가족의 절규는 관객에게서 거의 신체적인 연민을 이끌어낸다. 이는 곧 사적 복수에 대한 감정적 지지를 이끌어내고 관객을 서사적 긴장 속에 몰입시키며, 관객은 이후 긴장의 허구적 해소에 의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7

앞서 말한 것처럼 도희는 의붓아버지와 할머니, 학교 급우들이 휘두르는 반복적인 폭력의 피해자일 뿐 아니라 이를 묵인하는 구조적 폭력의 피해자다. 도희의 어머니는 도희를 두고 집을 나간 것으로 암시되며, 도희는 정서적 지지와 조력을 받을 조건에 놓이지 못한 취약한 존재로 그려진다. 이때 영남은 도희를 사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에서 지켜줄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영남은 성인이며 제도적인 권력, 합법적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있는 경찰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에서 관객들이 흔히 기대하게 되는 것은 영남이 공적인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 혹은 피해자 도희에게 정서적 조력을 다하는 인물로서 그려지는 것일 테다. 또는 장르영화가 관습적으로 재현해온 사적 복수를 여성 영웅서사로 한단계 더 발전시키기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희의 다면성, 그리고 정상성의 규준에 포함되지 못하는 영남의 정체성 탓에 이 관계의 전형성은 깨진다. 영화의 첫 시퀀스에서 이제 막 도서지역에 부임한 영남이 차를 타고 마을로 진입할 때 도희는 길가에 앉아 있다. 하지만 영남의 눈앞에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도희가 아니라 산길 아래에 펼쳐진, 막다른 땅에 자리한 마을과 바다다. 바로 다음 근접 숏으로 우리가 보는 것은 아스팔트 물구덩이에서 아이의 손에 잡혀 있는 청개구리다. 다음 장면에서도 영화는 아이의 팔 끝만을 ‘떼어내’ 보여준다. 손가락에는 손톱보다 작은 무당벌레가 앉아 있다. 아이는 개구리에게 무당벌레를 먹이려 하지만 개구리는 아이 손을 벗어난다. 이 아이가 바로 도희이며, 영남의 시선을 따라 영화 속 세계에 도착하는 관객은 이렇게 도희의 ‘일부’와 처음 만난다. 즉 성인의 시선을 상정한 카메라가 우선 화면에 담은 것은 아이의 ‘일부’인 것이다. 도로에 쭈그리고 앉아 마을로 진입하는 영남의 차를 바라보는 아이를 풀숏으로 보여주는 다음 장면에서도 우리는 아이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다. 도로변에 앉아 있던 아이 옆을 지나던 영남은 차를 멈추고 아이에게 다가가게 되는데, 영남의 차가 달리며 튀긴 도로 위의 물이 아이에게 쏟아졌기 때문이다. 영남은 구정물을 쏟는 사람이지만, 구정물을 뒤집어쓴 아이에게 처음 시선을 던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영남은 폭력과 학대에 가담할 수 있는 성인이고, 학대를 학대로 인지할 수 있는 성인이며 학대를 사과할 도덕적 능력을 갖춘 인물이다. 반면 아이는 마을의 경계, 도로의 경계에 내몰린 존재이고, 쉽게 오염당하고 위협당하는 존재이며, 얼굴과 목소리를 갖지 않은 존재다. 또한 얼굴 없는 피해자이자 자신의 처지와 다르지 않은 생물(개구리)을 포획하고 놀이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영남은 감추어져 있던 도희의 얼굴을 발견하며, 이후 도희의 옷 아래 감춰져 있던 매 맞은 흔적 역시 확인한다. 그러나 영남은 도희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지 못한다. 정주리 감독은 영남에게 피해자 도희를 구할 영웅의 배역을 주는 대신 피해자 도희에게 복수(複數)의 역할을 부여한다. 도희는 영남의 연민을 이끌어내고, 영남을 위협에 빠뜨리며, 영남을 구한다. 여러 얼굴을 지닌 채 도희는 영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영남의 취약함을 드러낸다. 도희는 영남의 응시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다. 도희의 얼굴은 희생자의 얼굴로 남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권력의 위계는 일찌감치 흔들렸다. 이는 도희가 영남을 뒤쫓았기 때문이다. 도희는 퇴근하는 영남의 뒤를 쫓아 말 그대로 물리적 거리를 ‘돌파’하여 영남에게 다가간다. 이때부터 도희를 폭행하는 아버지를 입건했던 영남이 도희에게 표상하던 성인이자 경찰로서의 권력에는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영남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먼발치에서만 도희를 보려 한다. 가령 두차례에 걸쳐 등장하는 방파제 장면은 둘 사이의 거리의 문제를 잘 드러낸다. 영남은 멀찍이서 방파제 위에 있는 한 아이, 자신이 구한 ‘폭행 피해아동’을 본다. 영남은 아이가 바다로 뛰어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아이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후에 아이는 영남에게 자신은 방파제에서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답한다. 반면 영남의 집 안에서도 도희는 영남의 지척까지 다가간다. 영남의 집에, 방에, 욕조 안에 들어가는가 하면 영남의 알코올중독까지 알아챈다. 이렇게 영남의 영역이 침해당할수록 영남과 도희 사이의 위계는 흔들린다. 도희는 영남의 제복 모자를 써보기도 하는데, 이는 일차적으로 영남의 제복에 대한 선망의 표시이지만 제복이 표상하는 영남의 권위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한편 도희는 춤과 연기에 재능을 가졌는데, 이는 아이의 재능이면서 동시에 아이답지 않은 재능이다. 특히 도희가 피해를 ‘연기’할 때 그 연기는 아이답지 않은 재능으로 간주된다.

영화의 결말부, 영남이 방파제를 가로지르기 전까지 영남과 도희의 관계는 시종일관 원근의 관계이고 의혹의 관계다. 이 ‘의혹’이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도희야」가 휴먼 드라마의 문법에 따라 아이의 순수함으로 성인 여성을 감화시키는 대신에 구분 불가능한 순수함과 교활함, 진실과 거짓, 취약함과 용기를 지닌 두 주체의 관계를 그려내기 때문이다. 「도희야」의 말미, 대부분의 마을 사람과 달리 성실하고 순진한 성인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동료 경찰은 영남에게 도희에 대해 “속을 잘 모르겠고, 애 같지도 않고, 어린 괴물 같다”고 말한다. 많은 영화에서 ‘괴물 같은’ 아이는 말 그대로 ‘괴물’로 그려지곤 한다. 즉 애초에 인간성을 결여한 존재로 태어나거나, 반복적 폭력과 같은 반인간적 조작의 결과로 인간적 특성을 잃어버린 존재가 된다. 그러나 동료 경찰의 언급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 도희는 괴물의 이미지에 가두어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도희는 경계의 존재로 남는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도희야」는 관객을 불편하게 한다. 괴물, 악마, 비인간인 아이보다 관객을 더 불편하게 하는 존재는 경계에 선 아이다. 아니, 경계에 선 아이야말로 우리의 실제 삶에서 비인간으로 간주되곤 하는 현실적인 존재다. 결말부에서 영남은 다시 한번 먼발치에서 도희를 보고 이번에는 방파제를 가로질러 도희에게 직접 걸어간다. 영남이 도희를 데려가기 위해 방파제를 가로지르는 순간, 영남이 껴안는 것은 바로 경계의 존재인 도희다. 카메라는 처음으로 근접한 거리에서 도희와 영남의 얼굴을 숏과 리버스 숏으로 담는다. 마치 이제야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다는 듯이.

 

 

감추어진 얼굴의 위장: 「소리도 없이」

 

「소리도 없이」에도 속내를 짐작하기 어렵고 선악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피해자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열살 남짓의 초희(문승아 분)는 몸값을 노린 일당들에게 유괴당한다. 블랙 코미디의 외양을 띤 이 작품에서 유괴된 아이 초희는 계란장수이자 조직폭력배의 시체처리반인 두 남성에게 맡겨진다. 하층계급의 두 남성—한 사람은 다리를 저는 창복(유재명 분), 다른 한 사람은 농인인 태인(유아인 분)이다—은 반인륜적 범죄의 장물인 동시에 증거인 아이를 처리 혹은 보관하는 ‘고위험 외주노동’을 수행해야 한다. 반면 유괴사건의 피해자 초희는 생존에 유용한 지식과 사회성을 이미 습득하고 있는 상층계급의 자제다. 도시 근교 농촌의 비닐하우스에서 어린 동생과 기거하는 태인의 집에 감금된 초희는 이 지식과 사회성을 자원으로 삼아 생존을 도모한다.

「도희야」에서 도희의 얼굴이 처음부터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처럼 이 영화에서 초희 역시 가면을 쓰고 등장한다. 납치범의 명령을 받은 태인과 창복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초희는 토끼 가면을 쓰고 있다. 감독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별주부전」을 읽으며 보이던 반응을 생소하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별주부전」에서 토끼는 병에 걸린 용왕에게 장기를 제공할 용도로 용궁으로 납치되는 존재이니, 토끼 가면을 쓰고 유괴된 초희를 보고 감독의 기억 속에 각인된 「별주부전」의 설정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조직범죄를 다루는 스릴러 영화에서 가면을 뒤집어쓴 범인은 매우 상투적인 연출에 가깝다. 이 경우 가면은 영화의 설정상 정체를 감추는 수단인 동시에 때로 확정할 수 없는 정체성의 차원을 환기하는 시각적 기호로 사용되기도 한다. 오늘날 감독의 자아를 연기하는 배우를 지칭하는 용어인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지칭하는 말이지 않았던가. 푸꼬(M. Foucault)는 「유토피아적인 몸」에서 ‘가면이 문신이나 화장처럼 인간의 몸 위에 어떤 언어를 통째로 쌓아놓는다’고 한 바 있다. 가면을 쓰는 행위는 몸을 몸 고유의 공간에서 떼어내어 다른 공간으로 던져 넣는 일종의 조작활동이라는 것이다.8 「소리도 없이」에서 납치범은 민낯으로 나타나고 유괴된 초희가 토끼 가면을 쓰고 있는 설정은 이런 점에서 의미의 안정성을 교란하는 장치가 된다.

초희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유괴범 조력자의 집에 도착한 후 하는 행동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유괴 아동의 행동이 아니다. 가면을 벗었지만 오히려 가면을 쓴 배우가 연기하듯 모종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이다. 초희는 가해자의 집을 치우고 가해자의 어린 동생을 돌보며 친밀한 관계를 형성한다. 관습적으로 해석하자면 초희의 행동은 적의 신뢰를 획득하기 위한 영민함의 결과일 수도 있고, 어떤 상황에서도 바르게 행동하도록 훈육된 존재의 기계적 행동일 수도 있으며, 가해자의 처지에 감정을 이입한 피해자의 행동일 수도 있다. 자기보다 어린 가해자의 동생과 어울릴 수 있는 아이다운 천진난만함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도희야」에서 도희가 영남의 영역을 침범하고 영남의 비밀을 간파했던 것처럼 「소리도 없이」의 초희는 납치되어 도착한 태인의 영역을 침범한다. 태인의 거처는 문자 그대로 ‘짐승 우리’와도 같은데, 그 때문에 판타지 모험영화에서 아이들이 도착하는 외딴 섬의 정글이나 지하세계의 축소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초희는 모험을 떠난 아이들처럼 그 낯선 장소를 탐험하는 대신 그곳에 자기의 질서를 부여한다. 태인의 동생을 보살피고, 훈계하고, 조종하는 것이다. 그래서 초희가 아이를 돌보는 일은 여자아이에게 사회가 부과한 임무의 수행에만 그치지 않는다. 초희는 적의 장소를 자기의 장소로 ‘전유’하는 인물이며, 이는 가해자에게 동조하는 피해자의 행동과는 분명 다르다. 초희는 감금당했으나, 초희는 정복자다. 영화는 비장애인, 아이, 여성, 피해자 초희와 장애인, 어른, 남성, 가해자인 태인 두 사람이 맺는 보호와 피보호, 통치성의 관계를 끊임없이 문제 삼는다. 친밀함이 상상되고, 친밀함의 불가능성이 암시된다.

「소리도 없이」는 이 곤란한 관계를 통해 남성지배사회의 통치성에 대해 묻는다. 돈을 받아낸 후 초희를 어서 돌려보내려던 계획이 번번이 실패하면서 영화 속 위기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문명인’ 초희는 이 무법의 세계에서 정복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태인은 무법세계 내 상위 포식자의 명령에 따라 장기매매업자에게 초희를 넘기지만, 이내 마음을 바꿔 초희를 찾으러 간다. 이때 영화에서 가장 수수께끼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대체로 속옷이나 늘어진 티셔츠 차림이던 태인이 초희를 찾으러 갈 때는 조직폭력배가 입었던 양복을 차려입기 때문이다. 태인의 양복은 어떤 기호인가? 곤란하게도 양복은 초희에 대한 모방이자, 폭력배에 대한 모방이다. 태인은 질서와 규칙이 존재하는 초희의 세계에서 배제된 존재이고, 무력이 지배하는 폭력배의 세계에서도 불가촉천민으로 취급당하는 존재다. 태인은 각고의 노력 끝에 초희를 돌려보내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는 결국 초희의 지목에 의해 범인, 가해자, 흉악범, 야만인이 되어 도덕적이고 현실적인 정상인의 세계에서 쫓겨난다. 이때 태인은 양복을 벗어 던지고 도망간다. 양복은 초희의 질서이건, 폭력배의 무력이건,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는 세계에 상징적으로 진입하기 위해 걸치는 ‘의례적’ 복장이다. 따라서 양복은 가면과 대구를 이룬다. 두 사물 모두 몸 안에 묶여 있는 ‘다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열망, 푸꼬의 용어를 빌리자면 ‘유토피아’적인 것을 피어나게 하는 것이다.9

 

 

수수께끼의 진실

 

장르영화가 여성에 대한 남성적 응시를 거두지 않을 때 여성은 대체로 가학적 욕망의 대상으로 전시되곤 한다. 같은 이유로 여성은 관객의 감정이입을 위한 평면적인 희생자 캐릭터로 축소된다. 남성지배사회와 남성적 응시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단의 여성영화에서도 여성을 일의적인 희생자의 자리에 머무르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도희야」와 「소리도 없이」의 미덕은 무엇보다 진실과 거짓, 해석 가능성과 해석 불가능성 사이를 진동하며 피해자, 여성, 아이, 희생자를 다층적으로 묘사한 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두 영화는 흉내와 연기에 능통한 여자아이들, 도희와 초희의 본심과 정체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낸다. 동시에 두 영화 모두 천진한 얼굴 아래 진짜 얼굴을 확인하거나 폭로하려 하지 않는다는 공통된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가해의 복잡한 동기를 묻는 대신 피해자의 복잡한 심리에 관심을 갖는다. 피해자의 복잡한 심리에 관심을 갖고 피해자를 다층적으로 묘사하는 일은 피해를 제대로 말하는 일이다. 피해자의 상처를 말하면서도 피해자를 피해에 가두지 않는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 「소리도 없이」는 감독이 어린 시절 읽었던 「별주부전」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감독은 친구들이 「별주부전」에서 피해자인 토끼를 교활하다고 비난한 것에 화가 났었다고 한다. 토끼는 살아남기 위해 꾀를 부린 것인데도 말이다. 수많은 영화는 이상적인 희생자를 묘사하기 위해 여자아이를 등장시켜왔다. 픽션과 위장의 재능을 통해 시련에 맞서는 도희와 초희를 그리는 일은 우선 아이를 새로 그리는 일이고, 아이를 통해 무해한 여성을 상상하는 남성적 욕망을 해체하는 일이며, 순수한 수동성의 이미지로 환원되곤 하는 피해자를 새로 그리는 일이다. 도희와 초희는 다른 사람의 얼굴을 흉내내고, 겹겹의 얼굴을 ‘만든다’. 아이의 가면 아래에는 또다른 얼굴의 가면이 있을 뿐이다. 도희를 구하려던 영남이나 초희의 납치에 가담했던 태인 모두 아이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다. 하지만 영남은 마침내 수수께끼를 만드는 도희의 손을 잡고, 태인은 마지막 순간 초희가 가면을 벗었다고 생각하며 도망친다. 아마도 영남은 아이의 가면과 거짓말 속에 아이의 ‘픽션적 진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비로소 영남은 아이에게 돌아가 아이의 손을 잡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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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버틀러(J. Butler)의 표현을 빌리자면 “어떤 집단이 함께 우리라고 말하게 되면 그 순간 이들은 스스로를 ‘인민’으로 구성하려는 것이다.” 즉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우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는 사회적 다수를 탄생시키려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 「우리, 인민: 집회의 자유에 관한 생각들」, 알랭 바디우 외 『인민이란 무엇인가』, 서용순 외 옮김, 현실문화 2014.
  2. 영화학자 로라 멀비(Laura Mulvey)가 할리우드의 서사영화에서 작동하는 남성적 응시의 작동방식을 이론화한 1975년의 논문 「시각적 쾌락과 서사 영화」(Visual Pleasure and Narrative Cinema)는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축소하는 남성지배사회의 시각문화에 대한 비판의 초석이 되면서 영화학 논문 이상의 파급력을 가지게 되었다.
  3. 상대적으로 적은 편수이지만 상업 장르영화의 문법과 제작 방식으로 연출한 여성감독의 작품도 있다. 영화 「비밀은 없다」(이경미 2016), 「돈」(박누리 2018)과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이경미 2020) 등을 꼽을 수 있다.
  4. 이는 다양한 차원으로 변주되기도 했다. 「남매의 여름밤」(윤단비 2019)은 여성의 성장서사라기보다 중학생 자녀를 포함한 한 가족의 이야기에 가깝지만, 고요한 여름 낮과 밤의 이층집 주택 안팎을 관조하며 빛과 공기, 가족의 소리를 담아낸다. 이 영화의 미덕은 「벌새」 등 관조적인 여성 성장영화가 보여준 ‘기록하는 카메라’와 ‘응시하는 시선’의 미덕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한편 여성 성장서사는 실패의 시간을 견딘 여성의 이야기로 변주되기도 한다. 성폭력 트라우마를 이겨내는 장년 여성의 이야기 「69세」(임선애 2019), 성공하지 못한 만년 청년의 희비극적 일상과 꿈의 서사인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19), 「가장 환하고 따뜻한」(최진영 2020) 등이 그 사례다.
  5. 영화 속 얼굴에 관한 이론에 대해서는 토마스 앨새서·말테 하게너 『영화 이론』, 윤종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2012, 102~52면 참조.
  6. 자크 랑시에르 『이미지의 운명』, 김상운 옮김, 현실문화 2014, 27~38면; 자크 랑시에르 『영화 우화』, 유재홍 옮김, 인간사랑 2012 참조.
  7. 「친절한 금자씨」(박찬욱 2005) 같은 영화는 양식화된 영화적 폭력으로 사적 복수서사의 카타르시스 작동 원리를 일정 부분 지연시킴으로써 차별화되었던 사례다. 때로는 법적 다툼을 통한 정의의 구현으로 스토리라인이 변형되기도 했는데, 이 변형이 일본군‘위안부’ 문제를 다룬 「허스토리」(민규동 2017), 「아이 캔 스피크」(김현석 2017) 등 여성의 사회적 분쟁을 다룬 영화에서 기미를 드러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법정 다툼이 주요 목표가 되거나 서사적 절정의 시공간을 제공하는 이러한 변화는 권위주의적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사회로 변화했다는 것을 징후적으로 드러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8. 미셸 푸코 『헤테로토피아』,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14, 34면.
  9. 같은 책 3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