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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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하림 朱夏林

2009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이 있음. wngkfla@hanmail.net

 

 

 

쇼스타코비치의 숲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네 그 묻고 싶은 것에 끝이 있다면 그 묻고 싶은 것이 끝내야 하는 것에 있다면 나는 밤마다 오열하고 싶었다 갈라진 마룻바닥에 귀를 대고 폭격과 총성— 정신이상자들과의 선량한 화해 정부에 총알받이를 하던 시절, 총애하던 몇몇 화가와 작가 연주가들 기고가들과의 저녁만찬

 

궁핍은 신에게도 어렵겠죠 모인 사람들은 시답지 않은 비유에도 큰소리로 웃었다 그러나 담배 냄새, 음식 냄새로 가득한 실내에서 모두 힘차게 돌아갈 생각이라도 해야 했다

 

밤의 오열을 만져주는 둘째 날의 저녁

어떤 뻬쩨르부르그의 아이가 그림자로 돌아다녔다 아무도 죽지 않으려는 게 이상했어 만찬의 밤이 끝나가던 복도 층계 끝, 연주가 흘러나오던 방

 피 묻은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던 피아니스트와 그 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뻬쩨르부르그의 아이

피아노를 빌려줘요

칠월의 어느 멋진 날에 울면서 키스를 한다네

신도 가끔 유리창에 코를 박고 자빠지지

그녀의 다듬어진 우아함에 반해서

피아노를 빌려줘요

뻬쩨르부르그의 아이가 피아노 위에 놓인 담뱃갑을 거칠게 쥔다

당신은 왜 식당에 내려오질 않죠?

내가 보기에 그녀는 너무 많은 왈츠를 췄다거나 작별했다는 거야

나는 여기서도 숱한 사람들을 만나 너무 꽉 끼는 조끼를 입은 사내, 일생동안 쓰고도 넘치는 유산을 받은 소년, 정부의 바람기를 불안해하는 늙은 여자나 사기를 치고 달아나려는 자, 그리고 나처럼 자기 연주를 듣고도 더는 슬퍼하지 않는 자

아저씨, 악상이 떠오르나요?

나는 이제 혼자 하는 게임에도 운이 없단다*

이성이 사라지고 방탕의 흔적으로 가득한

모든 버려진 악상들이 몰려오는 피난의 도시

뻬쩨르부르그의 아이야, 네 연주를 듣는 편이 빠르겠구나

그러나 한번쯤 이 방을 이 숲을 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싶진 않았을까

 

칠월은 언제나 비가 내렸고 정부의 총알받이들은 테이블에서 포커를 치고 그녀를 위하여 나는 느리고 아름다운 춤곡을 연주하였는데

 

 

--

*영화 「울부짖는 초원」 중에서.

 

 

 

밝은 방

 

 

흰 장갑

코를 푸는데 모두가 나를 시끄럽다고 말해요

화장실에서 크게 풀고 오라고

나는 몹쓸 병에 걸려 얼굴이 거무튀튀해졌는데

극장 여배우 짓을 관두고도 수년째 입방아에 오르고 있는데

지방 출신들이 전부 야망 때문에 도시로 기어오는 건 아니죠

인간의 방에는 희고 커다란 구슬 일곱 개가 매달려 있는데

온갖 불행과 좌절을 다 겪는 동안

마침내 그것은 하나씩 하나씩 깨져버리게 되죠

깨진 조각을 치우는 동안 그것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반짝거려요

도시 출신도 여학교 출신도 아닌 여자들이

다 고분고분 운명의 존재를 따를 거라고 생각하나요

마주칠 때마다 내게 무얼 요구하는 당신 영감도

무대 뒤 며칠째 감지 않은 거인의 머리칼 같은 장대걸레도

그저 인간의 방에 고독이 생기면 모욕도 슬픔을 위해 쓰이죠

공연히 내 신경 탓을 하려고 그 따위 질문을 던지는군요

 

거래

젊은 수상은 당국과 관련된 일은 시간을 넉넉히 줄 수 없다고 했다

물잔에 쌓인 얼음이 녹는 소리

몇 장의 어음에 서명을 했다

사시나무가 늘어선 길을 떠올렸다

당신 영감이라는 작자는 늘 여자의 곤경을 노리는군요

녹은 얼음을 마셨고 어떤 증오도 일지 않았던 건

젊은 수상 역시 내가 아끼는 사람들 중 하나였기 때문에

교활한 눈빛을 하고 호의를 베풀고 선량한 미소를 지어주는

사랑, 처음에는 재미삼아 인생을— 그 말의 모든 것을

그러나 구슬이 깨져버린 피투성이 방

나는 은퇴한 여배우의 고독으로 숨어들어 그것을 다 밟아야 했는데

 

마지막 연기

그는 울음을 그친 나를 밝은 방으로 데리고 갔다

역시 제가 갈게요 울고 나니 기운이 나요

그가 실크 손수건으로 감쌌던 은빛 권총을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