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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반문화 센티멘털리즘의 딜레마

리산 시집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정한아 鄭漢娥

시인. 문학평론가. 시집으로 『어른스런 입맞춤』이 있음. crookcrony@hotmail.com

 
 

161-문학초점-정한이_fmt리산의 첫 시집은 여러 측면에서 박정대(朴正大)의 시들을 떠올린다. 이국적인 고유명사(특히 아웃사이더를 자처했던 문인, 음악가, 혁명가 등의 이름과 반문화 옹호자들이 선호할 법한 ‘주변화된’ 지역의 지명이나 작품의 제목이나 그 변형)들을 통해 아직 덜 발굴된 먼 곳에 대한 향수와 꿈을 촉발하기, 그 연장으로서 혁명(의 이미지)에 대해 감성적으로 옹호하기, 이 감성을 증폭시키는 조리며 노래하는 듯한 어조,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인의 필명인 ‘리산’이 박정대 시집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뿔 2007)의 자서에 서명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박정대의 시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시집을 읽는 동안 의도적으로 두 사람을 분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선 안된다.

만일 이것이 의도된 것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시인이 다른 시인이 서명한 이름을 필명으로 선택하고 그가 물려받은 이름의 주인이 ‘무가당 담배 클럽’ 소속이라 밝혔듯, 그 역시 ‘센티멘털 노동자 동맹 회원’이라 (아마도 가상의 비밀결사의 정체를) 밝혔을 때, 후자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전자의 작품들과의 유사성은 다분히 의도적인 측면들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영향 관계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후배 시인의 시편들은 앞선 시인과의 동질화에 대한 욕망이라고, 혹은 일종의 오마주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어떤 반문화적이고 센티멘털한 특정 감성의 연대가 특정 어휘들을 중심으로 생성되었다고, 그러니 이것은 일종의 지극한 동지애에 가깝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만일 후자에 가깝다면, 그러한 ‘반문화적이고 센티멘털한 특정 감성의 연대’가 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음은 「인디 시인에게 무상급식을」이라는 ‘혁명적인’ 제목 아래 쓰인 시의 후반부다.

 

나는 무슨 센티멘털의 마이스터가 되어/불멸의 좌파에게 맥주를 부어주던 밤들이 자꾸 생각나/테이블에 올라가 장미꽃 마술을 부리던/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던/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아무것도 아닌 고독이//비무정 비슬픔 비애인 셀라비

 

그는 ‘감상의 거장’ 대신 ‘센티멘털의 마이스터’라는 어휘를 선택하고, 현실 좌파와는 무관한 ‘불멸의 좌파’에게 동지애를 표하던 어떤 가상의 과거에 대해 향수를 느끼며(한국의 현실 좌파가 소주나 막걸리 대신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 시점은 뒤샹이 ‘수염 난 모나리자’를 내놓았을 때와는 시공간적으로 교차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었을 테니까), 의미와 깊이를 강요하는 예술계를 조롱하고 체스를 즐기던 프랑스 예술가의 유희성과 이들 모두의 고독을 추억하고는 “비무정 비슬픔 비애인 셀라비”라는, 얼핏 읽으면 말이 될 것 같지만 뜻을 새겨보면 모순투성이인 결구를 새긴다.

이 당당한 센티멘털리즘의 공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70년대 한국에 청바지나 통기타, 미니스커트, 맥주 같은 거의 무해한 형태로 순화되어 유입된 반문화의 향수를 더욱 ‘센티멘털하게’ 심화하는 이러한 정서는, 90년대 초반 한국 문화운동의 시작 시점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60년대 중반 태생인 리산과 박정대의 세대적 정서를 고려하면 아주 무연한 추측일 것 같지는 않다.)

시인이 ‘최상의 소비재가 되어버린 지위재화로서의 혁명 이미지’에 관해 몰랐을 리 없을 듯하다. 과도한 센티멘털리즘을 감수하고서라도 도저한 미학화를 통해 돌파해야만 했던 어떤 절박한 공통 현실이 배후에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가령, “일람표와 통계로 가득 찬 서랍에 못질을 하고” “얼굴을 가리고 황금빛 사막으로나 가고 싶다”(「검정은 색깔이다」 중)는 시구는, 불가능한 방랑에 대한 열망의 배후에 지리멸렬한 현실의 세목이 있음을 슬쩍 보여준다. 센티멘털리즘에 대한 덜 부정적인 견해는, 그것이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세계를 견딜 만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다만, 이런 ‘반문화적 센티멘털리즘’은 세심하게 피해가야 할 자기기만의 위험을 내포한다. 그것은 마치 스펙터클이 되지 않기 위해 자기 책의 표지를 사포로 제작했던 ‘혁명적인’ 상황주의자의 책이 ‘레어 아이템’이라는 가장 ‘쿨한’ 스펙터클로 등록된 비극을 뻔히 알면서도, 그의 실패한 혁명적 시도를 향수어린 시선으로 기념하고 파산 직전의 일상을 잊으려는 서점 주인의 딜레마와도 같다. 현실과 유희가 결국 무관하지 않은 까닭이다. ‘혁명’의 이미지에 관해서는 혁명적으로 사고하기 거부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도 이와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