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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지금 ‘우리’의 이름으로 구축되는 공간

 

 

소유정 蘇柔玎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토록 열렬한 마음: 여성 서사의 아이돌/팬픽-읽기를 통한 나/주체-다시 쓰기」 등이 있음.

 

 

1. ‘있음’의 자리

 

노르웨이의 헤드마르크 박물관(현 아노 박물관) 내의 어느 창가에는 포도주병 하나가 놓여 있다. 농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옅은 녹색 병이지만 특별하게 박물관의 전시품이 된 셈이다. 이에 대해 한 건축가는 이렇게 말한다. “이 병은 창가의 돌, 벽돌, 포도주병, 창문, 빛, 마당, 돌담, 이어진 다른 건물, 하늘, 나무 등 물질의 세계, 곧 풍경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이렇게 병은 자신을 드러내고, 창가에 드러나며, 바깥 풍경에 대해서도 열려 있게 된다. (…) 때문에 이 병은 창가에만 따로 놓여 있는 게 아니다. 이 병을 나라고 생각하면 이때 창가는 ‘나’의 방이다. (…) 빈 병을 나로 바꾸어도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1 서두에서부터 짧지 않은 분량의 글을 인용한 까닭은 이것이 앞으로 이야기할 시에서 존재의 거주 공간인 ‘시적 공간’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와도 연결되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이 사유하는 공간 안에 ‘있음’으로 놓여 있으며 동시에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존재다. 공간의 안과 밖을 이루는 모든 것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주체, 그것이 바로 ‘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 시의 화자 또는 주체를 대입하여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는 차이도 있다. 시적 공간이란 언어로 발화되어 환기되는 공간으로, 즉 발화를 통해 장소성이 부여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때의 발화는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혹은 있었다는 것, 그러리라는 것—을 인지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사유에 의해 ‘나’의 자리가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있음’의 자리, 시적 공간에 대한 이해는 곧 시적 사유에 대한 이해와 연결되며, 나아가 시 전체에 대한 논의로도 확대할 수 있다.

시적 공간에 대한 독해는 특정한 공간 안에서 화자와 연결되는 존재들을 살피는 식의 미시적인 관점을 요구하지만, 발화의 주체가 자리하는 공간 자체로 상징성을 띠며 의미화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안희연의 「상상 밖의 모자들로 가득한」은 “우리는 서로의 손을 잡고/조금씩 기울어지는 시간을 겪고 있다”2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사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우리’의 위치가 “물속”이며 “가만히 잠들라는 명령”을 수행 중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 시가 환기하는 것이 세월호참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설혹 누군가에게는 상흔과 같은 기억뿐일지라도 상실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아서 “물속”을 제시하는 이 시를 통해 우리는 또 한번 그날의 바다를 경유하게 된다. 이렇듯 시적 공간을 제시함으로써 읽는 이에게도 적용 가능한 공통감각을 불러내는 방식은 세월호참사를 비롯하여 전사회적인 사건이 여러번 발생했던 2010년대 중후반 시에서 눈에 띄는 특징이다. 망각할 수 없는 현실을 공유하는 장소를 부르고, 동시에 환기되는 정동에 주목하게 되는 시들이 있다. 이때의 장소는 많은 경우 ‘광장’이다. 가령 강성은의 시3에서는 “좁은 골목들과 창문들을 지나 작은 다리를 건너자 다시 광장이 나타났다” “매일 밤 모든 길은 광장으로 이어졌다 벗어나려 할수록 더 그랬다”고 말하며, 화자가 길을 잃고 헤매는 시의 전개에 따라 광장이 공간적 배경으로서 반복 등장한다. 이에 당시 사회적·정치적 현실에 대한 저항으로 응집했던 광장과 그때 울려 퍼졌던 혁명의 노래를 떠올리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김현의 시4에서도 역시 촛불이 켜지고 꺼지는 장면 사이로 “하야하십시오.” 또는 “썩은 물이 하나둘 퇴진하는 소리”와 같은 음성이 개입할 때, 우리는 단번에 촛불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체험을 복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속, 바다, 광장과 같은 시적 공간은 화자와 독자의 경계를 넘어 서로의 경험을 공유하며 우리가 우리로서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실감하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범위를 좁혀 최근의 시들로 시선을 옮겨볼 차례다. 우선 광장에서의 부름이 아직도 유효한가를 묻는다면 어떨까. 광장에서의 일은 “혁명으로 이미 전환이 완료”된 “성취의 결과가 아니”며 “지금 우리가 혁명의 과정에 있고 이것을 더 진전시키는 것”5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태도라는 최근의 논의가 있듯, 현실의 ‘촛불혁명’은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시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뜨거운 열기가 있던 그때와는 또다른 온도로 광장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들이 종종 눈에 띈다.6 그러나 광장의 일이 지속되는 과거-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 외에는 우리가 함께 그려보고 불러봄직한 시적 공간이 공유되고 있지는 않은 듯하다. 질병 대유행의 시대에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른다. 생활에서 바깥이라는 물리적 공간의 영역이 축소된 만큼 시적 공간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최근의 시들에서 다소 고립적으로 보이는 화자가 발견되는 것과 그가 거주하는 시적 공간이 협소하게 그려지는 상황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문제인 것이다.7 “가장 축소된 내밀한 공간에서의 응집”에 대해 바슐라르(G. Bachelard)는 릴케(R. M. Rilke)의 말을 경유하여 확장된 논의를 남겼다. “좁은 공간 속에서 스스로가 평정하게 있다는 것을 안다는 데에는 위안이 있”으며, 내면을 실현하는 ‘안의 공간’에서 “일체가 내밀한 존재에 맞도록 되어 있”8다는 것이다. 조금 더 내밀한 방식으로 공간을 확장해나가는 셈이다. 이 관점을 최근의 시인들이 구축하는 시적 공간에 적용해보면 어떨까. ‘안의 공간’을 실현한다는 점에서 자신에게 매몰되는 자아의 모습에 우려를 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한번 바슐라르의 말을 빌려본다면 이들의 시에서 “안과 밖은 서로의 기하학적인 대립 상태에 버려져 있지 않다.”9 안과 밖을 각각 이미지적 공간과 물리적 공간으로 치환할 수 있다면, 이미지적 공간에 대한 내밀한 탐구는 물리적 공간에 대한 확장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서두의 논의대로 지금 여기에 ‘있음’으로 존재하는 이가 바깥을 향해 ‘열려 있는’ 것처럼 말이다.

 

 

2. 미래를 위한 공간 건축: 김연덕의 시

 

김연덕은 ‘안의 공간’을 열어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건축’하는 일에 뛰어나다. 그런 의미에서 ‘짓다’라는 동사는 여러 의미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는데, 가령 그에게 한자루의 연필이 주어진다면 우선 그것은 시어와 시어, 문장과 문장을 느슨하게 연결하여 시를 짓는 것에 쓰일 테지만, 지어진 시 안에서 또다른 ‘짓기’를 위한 것으로 이내 쓰임을 달리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두번째 ‘짓기’가 앞서 말한 자신만의 공간을 구축하는 일이며, 이는 시집 『재와 사랑의 미래』(민음사 2021)에도 잘 드러나 있다. 화자가 “내 안의 실내 건축가”(「나의 건설학교」)라고 스스로를 호명하듯 무언가를 ‘짓는’ 행위 앞에서 시인과 건축가(혹은 건설업자)는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시편 곳곳에 널브러진 금속 컴퍼스나 가위 같은 도구들과 철근, 벽돌, 콘크리트 같은 자재들 역시 시와 건축 모두를 위한 재료로써 기능한다. 이와 같은 모습에 자연스레 의문이 남는다. 왜 그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손으로 시적 공간을 구축하려 하는가? 부름으로써 환기하지 않고 애써 깎고 쌓음으로 짓기를 거듭하는가? 어쩌면 당연한 답일지 모르지만, 그가 바라는 공간이 지금-여기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간의 현존을 논하자면 시간을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인데, 김연덕의 시에서 연작으로 이어지며 제목으로 가장 많이 쓰인 단어에서 조금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바로 ‘미래’다. 바라고 있는 ‘사랑의 미래’라면 좋겠지만, ‘재의 미래’라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느 쪽도 피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재와 사랑의 미래’가 되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도래할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서라면, 그 안에 있을지 모를 사랑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스스로 공간을 내어야만 한다. 이때의 공간은 바깥에 있지 않다. 미래를 말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은 내면의 공간을 비워내고 새로이 가꾸는 것과 관계한다. 「포프리」라는 시에서 “문밖에 너무 많은 삶이 있어/문을 닫았지/안쪽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나는/내 나라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라고 말하듯 그가 온전히 ‘나’의 것으로 여겨지는 세계를 열어 보이는 까닭은 그곳이 ‘너’라는 사랑의 대상에 대해 말하기에 가장 ‘안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너에 대해 말하려면 안전한 공간이 필요하다. 나무와 비닐, 벽돌과 대리석, 견고한 콘크리트와

유리와 빛. 부수거나 쌓을수록 다른 크기 다른 모양이 되는

 

어떠한 재료로 지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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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은 창보다 조금 늦게 오고

 

설계하는 사람은 모든 공간을 천천히

기울게 한 채

 

비운다.

밝은 방 어두운 방을

잇거나 나눈 질서는 이곳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용돌이와 얼마큼 닮아 있을까.

 

사방이 뚫렸다는 사실에 겁내는 거실이 있다.

 

단정한 가구

참는 식물

피투성이 어둠이

 

거기 쭈그려 앉아 얼음산을 깎는 네가 있다.

 

(…)

 

적막을 뚫고 부푼

온기

 

얼음 조각들

 

우리는 그것의 소리나 형체만 주워

 

유심히 바라보고

듣고 살피지.

 

표면에 맺힌 상이 제각각

다르게 반사되면

 

시간 차를 두고

하나씩

무너지는 산맥

 

기분을 보호하려고 천장이 높아지는 동안

 

따뜻한 숨이

 

그릇에 고인 물이 흘러넘친다.

—「재와 사랑의 미래」 부분(77~84면)

 

‘너’를 말하기 위해 ‘나’는 자신이 아는 가장 안전하고도 내밀한 세계를 열어 보이고, 그 안의 것을 모두 비운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사랑의 몸짓이지만, 동시에 벌어지는 중요한 사건은 ‘나’의 세계가 한쪽으로 기울어진다는 것이다. 화자에게 이는 불가항력에 가까운데, 그의 세계가 결코 평평할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마음의 일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중심을 잡으면 잡을수록 한쪽으로 기우는 마음”(「유리 장미」)처럼 안의 공간마저도 사랑의 대상이 있는 쪽으로 한껏 기울 수밖에 없다. 그 안에 들어앉은 ‘너’는 어떤가. ‘너’는 고요하게 “얼음산을 깎는” 모습이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얼음이지만 단단하게 얼어붙은 그것을 홀로 깎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의 사랑이 아직 양방향적인 것은 아니라 짐작된다. 다만 ‘너’는 얼음과 같은 마음을 조금씩 녹여보고자 또 원하는 모양으로 조각해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의 곁에 나란히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시로 담아내는 이 역시 얼음을 깎는 것과 유사하게, 특히 유리를 깎거나 다듬는 등의 세공작업을 시집 곳곳에서 행하고 있다. 투명한 존재를 오랜 시간 매만지고 다듬는다는 점, 그것이 마음의 일과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너’의 얼음 조각과 ‘나’의 유리공예는 닮은 구석이 있다. “나나 너와 상관없는 세상 모든 일 듣지도 보지도 못한 많은 좋은 일들을 함께 살다 함께 깎는 것 같아”(「재와 사랑의 미래」 104면)라고 중얼거리며 또 한번 삶을 긍정해보는 이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완성한 하나의 결정체는 유리의 유약한 속성에 대한 걱정을 지울 만큼 아주 단단하다. 지나온 시간과 수갈래의 빛, 그리고 쉽게 깨지지 않을 마음으로 이루어진 유리는 모난 데 없이 매끈하다. 그래서인지 유리는 김연덕의 시에서 유독 여러번 쓰이는 재료이기도 한데,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축물이 있다. ‘나’의 것이나 화자의 손으로는 지은 적 없는 ‘산속의 유리집’(「예외적인 빛」)이 그렇다.

시집 전체에서 「예외적인 빛」은 시간에 대해 그야말로 ‘예외적’ 경향을 보인다. 기본적으로 현재를 비추며 미래를 향해 추동하는 것이 김연덕 시에서 빛의 역할이라면, 이 시에서는 마지막 문장처럼 “가끔 내게 없는 삶을 기억해 내는 것”으로 역할한다. 시의 전개를 따라가면 이 기억은 ‘나’라는 개인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을 때 관계하는 타인인 “할머니”에 대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나’는 “대가족” 안에 속해 있지만 “처음부터 연고지나 이야기, 성격이 복잡한 조상이라곤 없이 살아온 기분이 든다”는 서술에서 가족에 대한 특별한 유대감은 갖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할머니가 살았고 화자와 쌍둥이 동생의 유년기 기억이 묻어 있는 산속 유리집 안에 있을 때면 간혹 특별한 기억이 찾아오곤 했다. 바로 “할머니가 꿈꾸었던 단순하고 괴로운 무대”에 대한 것이다. 무대를 밝히기 직전 극장의 암전처럼 “뒷산과 나무와 유리문의 윤곽선 겹쳐지고” 빛이 잠시 사라지는 그 순간에 할머니의 이야기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이는 혈연 아닌 다른 방식의 계보로 할머니의 삶과 ‘나’와 쌍둥이 동생의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쌍둥이의 탄생과 함께 생장하는 “모과나무”가 그들과 관계하는 방식과도 유사하다. 나무의 “가지들의 무수한 역사를” 전부 가늠할 수는 없지만, 모종의 방식으로 “무엇과/무엇을 끊어내”고, “무엇을//깊이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와 유사한 할머니와의 연결은 시에서 ‘나’와 동생에게 각각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일로 연관된다. “현실 세계에 충실”한 동생이 토오꾜오로 갔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떠올리는 이유는 할머니의 조국이 일본이며, 할머니가 일본을 떠나 한국에 왔을 때처럼 두 사람이 “기쁨으로 들뜬 폐”를 공유하고 있어서다. 반면 ‘나’는 “기쁨으로 들뜬 폐 없이 시를 쓰고 산속 거실을 자주/등장시키며 일본 시인들이 좋다”고 말하는 것으로 “가상 세계”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진정 ‘나’와 할머니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는 건 바로 ‘미래’를 사유하는 순간에 있다. 할머니가 “거울 앞에서 늙어 버린 나를 상상할 수 있었을 때 (…) 다카라즈카 단원이 되고 싶었”듯이 김연덕의 화자 역시 미래를 상상하고 그것을 맞이할 꿈을 꾼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을 확장하는 방식으로 적극적으로 공간을 구축하는 모양새다. 지금의 ‘나’는 할머니와는 다른, 명백하게 구분되는 타인이지만 가족사 내에서는 지속되는 과거로서 할머니가 이루지 못한 “가상 세계”의 일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여전히 “피” 또는 “이야기” 같은 건 ‘나’와 관계되어 있음을 실감하기 어렵지만, 빛이 머물렀던 자리를 확인하는 순간에는 아주 오래전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가 이어져왔음을 감각하게 된다. 마치 그 빛이 오래전에 출발하여 지금 ‘나’에게 도착했다는 걸 새삼스레 눈치챈 것처럼.

전에 없던 ‘사랑의 미래’를 맞이한 순간에도 김연덕의 화자는 끝나지 않는 미래를 잘 알고 있다는 듯 수없이 미래를 되뇐다. 화자에게 “따뜻한 숨”과 “물”로 “흘러넘”(「재와 사랑의 미래」 84면)치고 있는 지금의 찰랑이는 사랑이 불완전한 미래를 안전한 시간으로 바꾸어줄 것이라는 환상은 없다. 다만 이곳이 자신이 쌓아 올린 공간이기에 가능한 믿음이 있다. 적어도 ‘우리’에게만은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공간 안에서라면 거듭되는 미래마저도 기꺼이 맞이할 수 있다는 의연함과 용기가 그것이다.

 

 

3. 공동(共同/空洞)의 공간으로의 확장: 강지이의 시

 

김연덕의 시가 화자의 내밀한 세계 안에서 구축되는 시적 공간을 보여주었다면, 강지이의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창비 2021)에 수록된 시편들에서는 무엇으로도 가로막혀 있지 않은 더 큰 공간으로의 확장을 도모하는 움직임이 포착된다.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찾으려는 시도는 같지만, 강지이의 경우 안팎으로 확장되는 공간에 대한 과감한 사유와 함께 텅 비어 있는, 공동의 공간(VOID)을 시에 삽입함으로써 더욱 적극적으로 욕망을 표출하고 있다.

강지이의 시에서 시적 공간에 대한 탐구가 돋보이기 시작한 건 등단작 「수술」에서부터다. “사람이 모여 있는 곳을 조금만 벗어나면 매우 조용한 공간이 나타난다”는 첫 행에서부터 자신만의 공간을 찾는 화자의 모습이 발견되는데, “알코올 냄새”나 “침대”와 같은 단어로 미루어볼 때 그 공간은 수술실 앞 침대임을 짐작할 수 있다. 매우 협소한 자리이지만 “침대에 누워/누군가를 기다리는 과정”만큼은 공간과 대비되어 아주 느릿하게 흘러간다고 느낄 정도로 무한한 시간으로 다가온다. 이와 같은 시공간의 대비적인 감각 외에도 「수술」의 화자가 그 공간을 찾았던 건 그곳이 “어떤 단어든 소리 내어 말해도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곳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병원 특유의 “알코올 냄새”처럼 말조차도 금세 사라지는 공간에서 ‘나’는 언어의 휘발로 인한 일말의 자유로움을 느꼈을 듯하다. “알코올 냄새와 같이/누워 있다”로 끝나는 마지막 행에서 말뿐만 아니라 ‘나’ 자신조차도 사라져 어느새 공간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 같지만, 휘발된 언어의 묵직한 존재감이나 화자가 느끼는 가벼운 해방감만큼은 시적 공간 안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첫번째 시집에서 강지이의 시적 공간은 주로 좁은 장소를 탈피하듯 벗어나 더 넓은 공간으로 나아감으로써 확장된다. 가령 「한눈팔기」에서 “작아지고 작아진 채로 끊임없이 수풀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니 나오는 동그랗고 텅 빈 공간”을 발견하는 것이나 「통로」에서 “눈구멍”에 “손을 집어넣고/몸통과 다리도 접어 안으로 더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내 손에 잡히는 것은 “나무”였다는 서술, 그리고 「야간비행」에서 ‘나’의 방 창문에서 시작된 “투명한 실”이 “달까지 이어져 있었다”는 것 등에서 그러한 움직임이 포착된다. 화자의 모습은 대개 거침이 없고 미지의 공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험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러한 시편에서 도달한 곳 역시 강지이의 시가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장소는 아니다. 아직까지 그곳은 “혹시라도 길이 끊어져서 오도 가도 못한 채 하늘에 내내 떠 있기만 하면 어떡하지 싶은 마음”(「야간비행」)을 안정시킬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의 목표지는 어디인가? 점점 더 확장되는 공간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에는 ‘VOID’라는 제목의 독특한 연작시 세편이 있다. 시집 중간중간 수록된 이 시편들은 건축에서 ‘보이드’의 역할이 그러하듯 의도적으로 삽입되는 빈 공간과 같다. 수록된 순서에 따라 숫자를 붙여 이야기해보면 「VOID」 1과 2는 텅 비어 있지는 않지만 마지막 「VOID」 3처럼 완전한 빈 공간을 갖기 위해 끊임없이 자리를 옮기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안에서 ‘너’(「VOID」 3에서는 ‘언니’로 지칭되는 인물)를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주목할 만하다. 화자가 더 큰 공간을 향해 끊임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까닭 또한 정확하게 ‘너’와 관련이 있으니 말이다.

 

그 산책의 시작은 놀이터였다.

 

우리는 작고 푸른 오리 모양의 흔들의자에 몸을 넣은 채, 아이의 그네를 밀며 노래를 불러주는 여자가 노래를 끝마친 뒤 아이를 그네에서 내려주고 손을 잡고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까지 그곳에 앉아 있었고 너는 일어나서 곧바로 여자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네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잘 들리지 않아 어디 바람도 불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걸었고

 

첫번째와 두번째 골목

한낮인데도 가로등이 깜빡거리고 누군가가 버린 담배꽁초와 깡통들이 심각한 대화를 무기력하게 나누고 있었기에 우리는 땅바닥을 되도록 보지 않으려 노력했고 하늘을 보며 걸었다 구름과 바다란 단어를 수시로 헷갈리는 네가 커다란 바다가 하늘에서 흘러가고 있다는 말만 내뱉고 이곳에서 노래를 부르기엔 다들 너무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나는 좀더 걸어도 괜찮으니 더 넓고 트인 곳으로 걸어보자,고 손을 잡고 골목에서 빠져나왔고

 

버드나무가 요란하게 흔들리고 잔풀만 발에 밟히는 곳

이곳에선 노래를 부를 수 있겠다,며 네가 노래를 부르자 버드나무가 그 노래에 맞춰 머리를 흔들기 시작했고 저 나무는 왜 저렇게 눈치가 없을까 말도 걸지 않았는데 왜 혼자 흥에 겨워 춤을 추고 있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걷다가

 

폐쇄된 박물관

아주 옛날에 죽은 왕들의 보물을 전시하던 곳은 문도 닫혀 있지 않았다 먼지 쌓인 전시관을 둘러보다 우리의 발소리는 왜 이렇게 시끄러울까 생각하며 발밑을 내려다보니 전시 물품을 감싸던 유리를 밟으며 걸어왔다는 것을 깨닫고 유리가 없는 트인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다시 걷고 또 걷다보니 커다란 기둥 옆엔 아무것도 두지 않은 넓고 트인 곳 바람이 모여서 잡담을 나누고 있었고 그들은 우리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입을 다물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주었다 그래서 너는 노래를 부르고 나는 너의 짧은 머리 이제 여긴 바람도 불지 않는데 네 목덜미에 있는 잔털들이 조용하게 흔들리는 걸 보고 이것이 내가 너를 계속,

—「VOID」 전문(13~14면)

 

“놀이터”에서 시작된 우리의 “산책”이 좀처럼 끝나지 않고 “더 넓고 트인 곳”을 향해 계속해서 이어지는 이유는 “네가 흥얼거리는 소리가 아무래도 잘 들리지 않아”서다. ‘너’의 목소리를 좀더 잘 듣고 싶어서 ‘나’는 끊임없이 걸음을 옮겨 “커다란 기둥 옆” “아무것도 두지 않은 넓고 트인 곳”을 찾는다. 이곳에서라면 “바람”도 “대화”도 “버드나무가 요란하게 흔들리”는 소리도 없으니 ‘너’의 노래에 귀 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수술」에서 화자가 “어떤 단어든 소리 내어 말해도 바람 소리에 묻혀 사라지는” 공간을 찾았던 것에 비해, ‘너’를 만난 이 시의 화자는 그의 목소리가 다른 것에 묻히거나 흩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놀이터”를 지나 “첫번째와 두번째 골목”을 거쳐 “폐쇄된 박물관”으로까지 공간을 확장해나간다. 이는 「VOID」 2에서 “네가 준 편지 안”으로, 「VOID」 3에 이르러서는 두면에 걸친 빈 공간으로 점점 범위를 넓힌다. 시집의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시이기도 한 「VOID」 3은 지면상으로는 오른쪽 면 하단 말미 두행의 시구(“언니, 큰 공간은 우리의/것이에요.”)가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를 제대로 독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앞에 수록되어 있는 「겨울」을 먼저 읽어야만 한다. 「겨울」에는 “눈이 많이 쌓인 운동장에서 타원형으로/달리는 언니”를 보는 화자가 있다. ‘언니’는 “저길 보라고, 내 발자국만 있다고” 말하며 창문 너머를 가리키고, ‘언니’의 손끝이 머무는 자리를 바라보는 화자는 “걸음이 빠른 언니의 발자국이/눈 때문인지 유독 선명하게/보인다”고 답한다. 그리고 책장을 넘겼을 때 마주하게 되는 마지막 「VOID」의 ‘보이드’ 공간은 백지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언니’의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이 무수히 많이 찍힌 눈 덮인 운동장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앞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때문에 운동장 한구석에 쓰인 “언니, 큰 공간은 우리의/것이에요.”라는 마지막 말은 그가 마침내 시적 공간을 타인에게 선사하고 싶은 공간으로까지 확장했다는 성취를 알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시집의 제목이 ‘수평으로 함께 잠겨보려고’이듯, 강지이의 시가 부단히 유지하고자 하는 수평의 감각에 초점을 둔다면 이를 다른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수평으로 함께’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운동장이며, ‘나’의 곁에 있는 이가 ‘너’에서 이제는 구체적으로 ‘언니’로 지칭되고 있다는 사실 역시 눈여겨볼 만하다. 양경언이 “최근의 시에서 ‘언니’는 사전적 의미의 성별 구분, 생물학적 위계를 떠나 먼저 경험을 한 자로서 뒤따르는 이가 편하게 지혜를 구할 수 있으면서도, 서로의 성장을 도모하는 존재로 나타”나며 “경험을 공유하고 관계의 재조정을 촉발하면서 ‘나’의 목소리가 들리도록 이끄는 역할”10을 한다고 말했듯, 이 시에서의 ‘언니’ 역시 ‘나’에게 그런 역할을 하는 존재라면 함께 있는 ‘우리’는 또 하나의 ‘레즈비언 연속체’11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운동장은 구조적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젠더 불평등에 대한 촉구의 목소리가 반영된 공간이다. 그렇기에 이 공간은 더이상 시적 사유로 환기된 이미지적 공간만으로 남지 않는다. 최대로 확장된 내면의 공간을 돌파하여 바깥으로 연결되는 강지이의 시는 ‘기울어진 운동장’을 수평의 감각으로 되돌려보려는 시도로서 지금 우리 현실의 목소리와 다정하게 연대한다.

 

 

4. 폭로와 증언의 전시: 이소호의 시

 

앞서 이야기한 강지이의 시 「VOID」 3을 아직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시와 닮은 시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소호의 두번째 시집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현대문학 2021)의 가장 앞에 수록된 시가 그렇다. 「하양 위의 하양」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강지이의 시와 같이 두면에 걸친 빈 공간과 말미의 몇 문장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말미에 덧붙여진 메모의 일부는 이렇다. “시적 대상과 묘사로서의 순수한 해방을 꿈꾸는 이 시는 흰 종이 위의 흰 글씨로 쓰였다.” 유사한 듯 보이는 두 시의 백색 기록은 그러나 각(刻)으로 차이를 갖는다. 강지이의 시에서 흰 눈이 쌓인 운동장에 찍힌 ‘언니’의 발자국이 음각으로 새겨진 언어라면, 이소호의 시는 “해방을 꿈꾸는” “흰 글씨”로 돋을새김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의 눈으로는 읽어낼 수 없고 반드시 “시인을 만나 들어야만” 하는 시를 필두로 이소호 전시회의 문이 열린다.

‘전시회’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 시집은 ‘뉴 뮤지엄’(NEW MUSEUM)이라는 미술관의 형식으로 기획되어 있다. 따라서 시집을 펼쳤을 때 책을 읽는다기보다 미술품의 전시를 ‘보는’ 듯한 효과가 발생한다. 텍스트를 이미지화하여 시각적인 쾌감을 주는 시가 더러 수록되어 있기도 하며, 「하양 위의 하양」처럼 읽을 수 없이 그저 ‘보는’ 것에 그치는 시도 있다. 다소 혼란스러울 수 있는 독자(또는 관람자)에게 도움을 주는 건 “들어야만 한다”라는 목소리처럼 각주로 붙어 있는 도슨트의 말이다. 전시라는 기획에 도슨트의 존재는 어색하지 않지만, 그 해석의 대상이 ‘시’가 되는 까닭에 의문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읽는(또는 보는) 이가 시를 향유하는 단계에서부터 해석의 목소리가 개입하게 되면 더 다양한 해석의 길이 마련되지 못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12 하지만 이 미술관의 도슨트는 그러한 적극적인 개입보다 친절한 길라잡이 역할에 더 충실한 듯하다. 그는 이 공간에 처음 들어선 관람자들을 맞이하고, ‘읽을’ 수 있는 시 앞에서는 잠시 모습을 감춘다. 관람자가 ‘보는’ 시 앞에 설 때에만 살며시 다가와 말을 건네는 식이다. 작품에 대한 힌트를 종종 제시하기도 하지만, 사유를 돕는 물음을 남기고 떠나기도 한다. 이는 예술작품은 체험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던 수전 손택(Susan Sontag)의 주장과도 일치하는 행위인데, 손택에 따르면 오늘날의 도슨트(해석자)가 몰두하는 것은 “예술작품이라는 올가미에 걸려든 ‘현실’”일 뿐, 작품 그 자체가 사람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느냐에 있지 않다. 따라서 해석의 의미보다 작품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언가를 투명하게 바라보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하다. 감상자가 “사물의 반짝임을 그 자체 안에서 경험하”고,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슨트의 역할이자 필요인 것이다.13 이러한 관점으로 이소호의 시편을 따라가다보면 도슨트의 존재로 인해 분명해지는 것은 작품의 개별적인 의미 해석이나 이해보다 이야기로서의 작품(fictional story)과 현실의 이야기(real story)14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사실이다.

 

나는 한 다발의 낯을 묻어두고 묻는다. 윤오야, 너 말이야 정말 나를 사랑하기는 하니? 뭘 물어? 넌 나의 영원한 뮤즈지. 잠깐만 근데 지금 그 질문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이제 곧 아침이 밝아온단 말이야.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봐. 아까 니 표정 기억나? 그 표정으로 여기 렌즈를 봐봐. 지금처럼 팔다리 가만히 그렇게 도도하게 천천히. 걸어. 그래. 인형처럼. 아무 말도, 표정도 없이. 응 다시 내가 움직이라고 할 때까지 절대로 움직이지 마. 그대로 멈춰 있어봐. 어 지금. 그래. 우리 지금 이대로가 딱 좋아.

—「그때,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던 어떤 것들이 드러나고 말았다」 부분

 

연인을 피사체로 삼아 사진을 찍는 한 장면이 담긴 이 시를 사랑의 순간에 대한 기록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말하지 말아봐.” “절대로 움직이지 마.” “근데 지금 그 질문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와 같은 강압적인 태도와 가스라이팅이 ‘나’를 지배하고 있는 까닭이다. 때문에 이 시의 진정한 화자에 대해서도 물음이 남는 것이 사실이다. ‘나’라는 주어를 쓰고 있다고 해서 이 시의 화자를 정말 ‘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수시로 침범하는 목소리 사이에서 ‘나’의 음성은 하나의 주체로서 유효한가? 결국 ‘윤오’의 목소리는 ‘나’를 넘어 시마저도 지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만약 여기서 끝났더라면 이 시의 의의는 사랑이라는 이름이 덧대어진 폭력의 현장을 서사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이때 여전히 우리를 잡아 세우는 건 각주에 달린 도슨트이자 진정한 화자 ‘나’의 목소리다.

 

그의 사진 속의 나는 점점 빛나는 피사체에서 내가 알고 있던 나로 수렴되었다. 환상이 벗겨진 이후의 ‘나’는 그냥 하나의 정물에 불과했다. 정물은 이상하다. 생물과는 다르게, 현재는 아무런 힘이 없다. 과거로 가야, 정물은 말할 기회가 생긴다. 그러므로 이제야 나는 말한다.

—「그때, 감추어져 있어야만 했던 어떤 것들이 드러나고 말았다」 각주 부분

 

그때의 ‘나’는 “빛나는 피사체”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정물”이었음을 지금의 ‘나’는 안다. 정물에게 “현재는 아무런 힘이 없”었으므로, ‘나’는 작품의 시간인 과거로 거슬러온 후에야 “말할 기회”를 획득한다. 그리고 비로소 “가장 수동적이며, 폭력적인 상태에 놓인 나”를 기록할 수 있었음을 토로한다. 이처럼 작품이 하나의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할 때, 작품 너머에서 생생한 고통의 목소리가 파고들 때,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무화된다. 어느 쪽이 진실이냐를 따지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어느 쪽에서도 이는 진실의 영역에 있다.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수없이 현존하는 폭력의 현장들이므로. 때문에 미술관 안과 밖의 구분 또한 무의미해진다. 가령 「누구나의 어제 그리고 오늘 혹은 내일」은 시를 이루는 어구마다 모두 각주가 붙어 있다. 총 39개의 각주로 이루어진 이 시는 주석의 내용을 확인하기 전에도 작품을 감상할 수는 있지만 각주를 통해 혐오범죄에 대한 실제 기사의 목록을 확인한 후에는 작품 바깥의 현실과 분리할 수 없어진다. 피의자가 “심신 미약” “우발” “음주” 등을 이유로 반토막으로 “감형”(「판의 공식」)받는 것 역시 시에만 발생하는 사건이 아니다. 이처럼 이소호의 시는 허구와 진실의 경계를 허물고, 작품 안과 밖의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복제의 복제로 거듭되는 범죄의 현장을 기록한다.15 이소호의 시는 ‘NEW MUSEUM’에만 전시되지 않는다. 여전히 혐오와 폭력이 만연한 자리에서 일종의 고발장으로, 존재에 대한 증언으로 기능하며 현실의 부조리를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5. 우리와 ‘우리’의 자리

 

최근의 시들에서 상당 부분 축소된 것처럼 여겨졌던 공간 감각이 단지 발화 주체의 내면으로 침잠한 것이 아니었음을 김연덕, 강지이, 이소호의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의 시에서 시적 공간은 화자의 내면에 마련되는 것에서 시작해 점점 확장됨으로써 마침내 밖의 공간과의 긴밀한 연결을 증명해 보이는 데에 성공한다. 이 연결의 자리가 그저 이미지적인 시적 공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목소리는 현실과 문학의 역동적인 연속성에 따라 우리가 이미 경험한 적 있는 장소로 한데 모인다. 한 개인의 내밀한 역사를 들여다보고, 문학과 문학 바깥의 구분이 무색한 지금의 현실을 낱낱이 폭로하며, 수평의 감각으로 차별과 혐오 없는 사회를 꿈꾸는 자리, 이곳이 곧 ‘광장’이다. 목소리가 모인 자리는 광장이라 부르지 않아도 이미 광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광장이 공동체의 공간이듯 세 시인의 시에서 발견되는 시적 공간 역시 ‘나’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로 자리하는 장소라는 점 또한 알 수 있었다. 그곳에 홀로 있지 않고 ‘우리’로서 함께 같은 뜻을 외칠 때 광장의 역사가 새로이 쓰인다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그렇기에 “거기 우리를 지켜보는 우리가 있었다”(「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그림을 떠난다」)는 이소호 시집의 마지막 문장은 우리의 초상이기도 하다. 어느 자리에 우리를, 또 문학의 ‘우리’를 대입해보아도 설립하는 명제를 통해 우리는 문학과 삶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다시금 감각할 수 있다.

우리의 걸음을 살피는 일 또한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세 시인의 시 속 ‘우리’를 경유한 뒤 우리가 선 이 자리는 어디인가? 여성혐오에 대한 대항의 시초였던 메갈리아 개설로부터 6년, 일상을 정치적으로 사유하고 실천했던 촛불혁명으로부터 5년, 성범죄에 대한 폭로의 물결을 이루었던 미투운동으로부터 3년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축적되었지만, 여전히 말해야 하는 것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아직 광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지난한 현실에 안일해진 마음은 존재의 자리부터 소거한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조금씩 세상은 변하고 있다는 생각으로 여기에 ‘있음’을 외면할 때 외부 그리고 타인과의 연결은 자연스럽게 지워진다. 이때 우리를 일으키는 목소리가 있다. 우리가 여전히 말해야 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이곳은 ‘우리의 것’이며 함께가 아니고서는 쟁취할 수 없는 공동(共同)의 공간임을 환기하는 유대의 목소리로 인해 우리는 말할 수 있는 힘을 또 한번 획득한다. 겹쳐지는 안과 밖의 공간 안에서 우리와 ‘우리’는 이렇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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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광현 『거주하는 장소』, 안그라픽스 2018, 98면.
  2. 안희연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 2015.
  3. 「밤의 광장」, 『Lo-fi』, 문학과지성사 2018.
  4. 「지혜의 혀」, 『호시절』, 창비 2020.
  5. 박정은·이남주·이정철·황규관 대화 「촛불혁명의 현재와 촛불정부 2기의 과제」, 『창작과비평』 2021년 가을호 21면, 이남주의 말.
  6. 최근의 시로는 『창작과비평』 2021년 가을호에 발표된 최지인의 시 「세상이 끝날 때까지」를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2021년 2월 쿠데타를 일으킨 미얀마 군부에 대한 시민들의 항쟁과 ‘나’의 삶을 각각 “무너진 세상”과 “견고해 보이던 일상”과 같이 대비적으로 담아낸다. “무너진 세상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을 떠올리면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을 거듭하는 화자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배경으로 삼는 미얀마 시민불복종항쟁(CDM)은 과거 우리의 6월항쟁과 겹쳐지며, 동시에 촛불혁명을 환기하는 부분이 있다.
  7. 이에 대한 생각은 짧은 지면으로나마 밝힌 적 있다. 졸고 「시적 공간과 주체성의 영토」, 『백조』 2021년 봄호 참조. 졸고의 논의는 지금의 시적 화자들이 머무르는 공간은 다소 축소되어 있으나, 온전한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주체적으로 개척하여 자기 자신을 마주 보려 했다는 데 의미가 있음을 밝혔다.
  8. 가스통 바슐라르 『공간의 시학』, 곽광수 옮김, 동문선 2003, 379면. 인용된 릴케의 말은 ‘여기에는 거의 공간이 없다. 그리고 너는, 너무 큰 어떤 것이 이 좁은 곳에 들어와 있을 수 있기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거의 평정을 얻는다’(『말테의 수기』).
  9. 같은 책 380면.
  10. 양경언 「우리,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36면.
  11. ‘레즈비언 연속체’는 미국의 시인이자 비평가 에이드리언 리치(Adrienne Rich)의 개념으로 “남성 독재에 대항하는 유대나, 실천적이고 정치적인 지지를 주고받는 등 여성들 사이에 맺는 다양한 형태의” 관계를 일컫는다. 에이드리언 리치 『우리 죽은 자들이 깨어날 때』, 이주혜 옮김, 바다출판사 2020, 262면; 양경언, 같은 글 36면에서 재인용.
  12. 시집 내 ‘관람 시 유의사항’에는 “『불온하고 불완전한 편지』의 작품을 대하실 때는 오직 작품 자체에만 집중하여 읽으시길 간곡히 당부”하며, “물론 각주 따위 무시하고 읽으셔도 무방하”다는 안내가 나와 있음을 밝힌다.
  13.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이민아 옮김, 이후 2002, 33~47면.
  14. 전시회처럼 기획된 이 시집의 첫머리 ‘작가의 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여기, 아주 사적인 그림이 있다. 이야기라면 좋았을 이야기와 함께.’ ‘Here’s a very private painting. With a real story that would have been nice if it were a fictional story.’”
  15. 이때 이소호는 이미지적인 시적 공간을 실제 물리적 공간으로 탈바꿈하며 ‘나’의 영역을 확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공존 화장실」에서 ‘공존 화장실’은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적 공간이지만, 실제 지하철역 내 여자화장실 벽면을 촬영한 사진을 제시하고 그곳에 뚫리고 메워진 수많은 구멍들에 집중하게 한다. 이 시는 “애초에 ‘공존’할 수 있는 시선 따위는 존재하지 않”지만, 끝없이 증식하는 구멍으로 인해 형성되는 ‘공존 화장실’에 대한 아이러니를 가시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