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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변화하는 세계, 새로운 주체

 

‘한류’와 협동적 창조의 가능성

「오징어 게임」과 「지옥」을 통해 본 ‘K-콘텐츠’의 문명 비판

 

 

한영인 韓永仁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 임현론」 「세계의 불안을 견디는 두가지 방식」 등이 있음.

jwhyi@naver.com

 

 

1.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

 

2019년 6월 1일, BTS는 한국 가수 최초로 ‘팝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에 입성했다. 당시의 풍경을 전한 기사에 따르면 런던은 공연 시작 전부터 뜨거운 몸살을 앓았다고 한다. 영국뿐 아니라 스페인, 아일랜드,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 인근 유럽 국가의 팬들이 BTS가 출연한 광고를 보기 위해 피커딜리서커스 광장에 몰려들어 일대가 마비되었다는 것이다. 불과 십년 전까지만 해도 변방의 낯선 음악에 불과했던 ‘케이팝’(K-POP)은 어떻게 전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이콘이 될 수 있었을까? BTS의 성공이 반복되기 쉽지 않은 사례라는 걸 인정하더라도 그 성공의 밑바탕에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이 자리 잡고 있음은 분명하다. 아시아에서 시작된 한류는 오늘날 유럽과 북미는 물론 남미 대륙과 중동에까지 확산됨으로써 전지구적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인자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에서 한류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떨친 ‘국위선양’의 사례로 숭앙하는 반면, 국가의 정책적 지원과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의 기획력이 결합해 만들어낸 일시적 유행으로 치부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립하는 듯 보이지만 둘 다 ‘수출 주도 산업화’의 관점에서 한류를 바라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쪽에서는 자동차와 반도체를 넘어 문화 콘텐츠까지 수출하게 되었으니 금상첨화라는 것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수출 금자탑’이 내뿜는 화려한 광채가 한국사회의 모순을 은폐하진 않을까 우려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류를 산업적 차원에서 파악하는 ‘경제주의적 편향’은 대중문화 콘텐츠를 향유하는 경험이 자동차나 휴대폰 같은 공산품의 소비경험과 동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다.

한류 콘텐츠를 “여러 지역의 문명적 힘들이 서로 교차하고 경쟁하며 만들어진 산물”1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는 정호재의 논의는 ‘경제주의적 편향’을 넘어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을 더욱 적극적으로 사유할 계기를 마련해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한류 열풍의 핵심 의미는 한국이 서구 문물의 수동적인 수용자에서 벗어나 세계를 향해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발신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데 있다.2 ‘문화산업의 논리에 매몰된 기획상품에 가당찮은 기대를 건다’는 식의 냉소와 한국이 세계적 차원의 비전을 발신하는 장면을 감히 꿈도 꾸지 못하는 주변부적 자기비하는 물론, 한류의 인기를 자족적으로 탐하는 데 급급한 ‘국뽕’ 모두와 거리를 두고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을 차분하게 검토하는 작업이 요구되는 이유다.

문명이라는 말이 조금 거창해 보이지만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영감을 줄 수 있는 대안적인 사유의 발신 여부가 관건이다. 백낙청은 일찍이 “오늘의 자본주의 문명이 자본주의로서 자기완성 문명으로서의 자기부정에까지 가기 전에 아직 남아 있는 문명적 유산들을 총동원하여 새로운 지구문명을 건설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현존하는 다양한 문명적 유산들이 “자신을 낳은 과거 문명들과 현존자본주의 문명의 온갖 부당한 차별을 철폐할 새로운 전지구적 질서에 맞도록 갱신되어야” 함을 역설한 바 있다. 당시에는 ‘한류’라는 용어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기존 문명에 대한 창조적 갱신을 강조하는 데 그치고 있지만 “문명유산 및 문화적 연속성의 유지는 그 창조적 활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그 창조적 보존이 바로 우리 자신의 일이라는 ‘세계화된’ 시각”3을 갖출 필요가 있다는 주문은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을 타진하는 관점을 선취하는 면이 있다.

한류는 “과거 미국과 유럽이 한번쯤 거쳐 갔지만 감히 풀어내지 못했던” “‘인간성의 회복’과 ‘해방’에 대한 숙제”4를 풀어낼 문명적 잠재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 이를 측정하는 기준은 다양하겠지만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이 드러내고 있는 말기적 증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영감을 얼마나 풍부하게 제공할 수 있는지 여부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2021년 넷플릭스(Netflix)에 공개된 이후 전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이끌어낸 드라마 「오징어 게임」과 「지옥」을 통해 오늘날 한류 콘텐츠가 드러내고 있는 자본주의 문명 비판의 양상을 검토해보고자 한다.5

 

 

2. ‘부채 자본주의’의 죽음 정치와 ‘참(懺)의 수치심’: 「오징어 게임」

 

「오징어 게임」이 잔혹한 생존 경쟁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분석은 흥행 직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하지만 이 작품이 그 비판의 초점을 ‘부채’에 맞추고 있다는 사실은 비교적 덜 조명되었다. 「오징어 게임」은 대리운전을 해서 벌어다준 돈이 있지 않냐면서 용돈을 더 달라고 떼를 쓰는 기훈에게 엄마가 “그깟 놈의 돈, 너 대출받은 한달 이자도 안 된다”라고 쏘아붙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주인공 기훈은 자동차회사에서 구조조정 당한 뒤 분식집과 치킨집을 열었지만 모두 실패하고 현재 수억원에 달하는 빚을 지고 있는 ‘부채인간’이다.

어디 기훈뿐일까. ‘오징어 게임’의 참가자들이 의식을 잃은 채 끌려온 것에 항의하자 진행요원은 모니터에 영상을 띄워 사람들이 지고 있는 채무의 액수를 공개함으로써 소요를 잠재운다. 참가자 모두가 막대한 빚을 지고 있는 ‘부채인간’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은 채권자가 빚을 갚지 못한 채무자를 응징하기 위해 설계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참가자들은 첫번째 게임이 끝난 뒤 어떻게 해서든 빚을 꼭 갚겠다고 사정하거나 “우리가 빚을 졌지 죽을죄를 진 건 아니잖아요!”라며 울부짖는다. 이때 진행요원은 당황한 목소리로 자신들은 돈을 받아내려는 게 아니라 단지 기회를 제공하려는 것이라고 해명한다. 진행요원이 내비치는 당혹감은 이 게임을 설계한 오일남이 참가자들의 직접적인 채권자가 아니라는 사실에서 비롯하지만, 이들이 갚을 수 없는 막대한 부채에 짓눌리지 않았더라면 게임에도 참여할 이유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 당혹감은 기만에 불과하다. 진실은 차라리 “우리가 빚을 졌지 죽을죄를 진 건 아니잖아요!”라는 항변에 담겨 있는데, 여기에서 오늘날 자본주의는 모든 인간을 “자본 앞에서는 죄인이자 책임이 있는 자, 즉 ‘채무자’”6로 만든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7

이 작품은 기훈과 상우, 덕수와 새벽의 경우를 제외하면 참가자들이 거액의 빚을 지게 된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분량의 제약 때문이겠지만 결과적으로 저마다의 기구한 사연이 지니는 불행의 개별성에 매몰되지 않음으로써 ‘부채’의 구조적 성격을 드러낸다. 부채의 내력을 개별적으로 파헤치다보면 고객의 돈을 무단으로 빼돌려 주식과 파생상품에 투자한 상우의 경우처럼 그릇된 욕심과 잘못된 판단, 혹은 성격의 결함을 원인으로 지목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소급된 결함은 부채의 원인을 개인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부채가 인간의 품행을 통제하기 위해 신자유주의가 고안한 전략적 장치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쉽다. 부채를 개별적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 해명하려는 시도에 맞서 라자라또(M. Lazzarato)는 “부채의 생산, 즉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힘 관계를 구성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전략적 핵심”이며 채권자-채무자 관계는 “현대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하고도 보편적인 권력관계”8임을 강조한다.

이 권력관계 안에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하나의 도덕성, 의식, 기억을 갖춘”9 주체가 탄생한다. 성실하게 빚을 갚는 모범적인 사람은 도덕적인 이웃으로 여겨지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손가락질받는 타락한 주체로 간주된다. ‘오징어 게임’에 끌려온 참가자들은 그 ‘타락한’(혹은 ‘탈락한’) 주체의 형상을 대표한다. 그들은 왜 말도 안 되는 잔혹한 게임 속 ‘말’로 끌려오게 되는가? 그건 “채권자는 채무자의 육체에 온갖 종류의 능욕과 고문을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10 그런데 살아서 빚을 갚지 못한 ‘타락한’ 주체는 죽음을 통해서도 부채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다. 채권자는 채무자의 “사지 하나하나와 신체의 각 부분을 정확하게, 부분적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세세하게, 합법적으로 가격을 산정”11하기에 그들은 자신의 사체 조각들을 통해 남은 빚을 갚아야 한다. 부채는 오늘날 인간의 삶뿐 아니라 죽음마저 포획하는 ‘죽음 정치’의 첨병이다.

부채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죽음의 정치학’은 개별적인 주체를 넘어 국민국가 차원에서도 가동된다. 그리스와 뽀르뚜갈, 페루, 칠레, 아르헨띠나 등 많은 국가가 자본주의 순환 위기의 희생양이 되어 IMF와 유럽중앙은행을 비롯한 국제 금융자본이 실시하는 가혹한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실행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유발된 막대한 실업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동안에도 그 모든 조치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마땅한 응징으로 선전되었다. 한국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오징어 게임」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VIP들의 대화—“내 생각엔 이번 한국 대회가 이제까지 중에 베스트야”—에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다. 비슷한 게임이 다른 나라에서도 진행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거니와 그 잔혹한 게임은 마치 IMF를 비롯한 국제 금융자본이 주도했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대한 은유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IMF 모범생’이라는 칭찬을 들을 정도로 신자유주의적 개편 요구를 착실하게 수용한 나라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한 고통은 기훈과 같은 노동자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었다.12

「오징어 게임」이 전세계 사람들에게 커다란 공감을 불러일으킨 이유의 일단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부채의 협박”을 “피할 수 없는 운명”13으로 맞닥뜨리고 있다는 현실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와 같은 ‘동일시’의 측면을 염두에 둔다면 이 작품을 시청하며 때론 그 잔혹함에 눈을 감고 때론 감동을 받아 눈물을 흘렸다는 해외 시청자들의 반응에서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가 ‘하위모방’ 양식의 비극을 고찰하며 언급했던 “선정적인 눈물의 반응”을 떠올리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 작품에 등장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연민과 공포의 감정”에 빠지지만 이 감정은 끝내 “정화되지도, 또한 쾌락으로 동화되지도”14 않는다. 데스매치 서바이벌 게임이 선사하는 말초적이고 선정적인 흥분을 맛볼 때조차 사람들은 그 쾌락에 온전히 동화되지 않으며 잔혹한 죽음이 야기하는 연민과 공포 역시 기훈의 승리로 인해 승화되지 않고 끝내 마음에 진한 얼룩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이 흥행하자 외신에서는 이 작품이 사회안전망 부재로 인해 낙오의 공포가 깊이 드리워진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지만 이는 한국적 특수성이라기보다 전세계가 공통적으로 맞닥뜨린 자본주의 문명의 위기를 반영하는 것에 가깝다. 더군다나 말기적 증후를 보이고 있는 현 자본주의는 낙오의 공포를 더욱 짙게 채색하는 동시에 죄의식이나 수치심 같은 인간성의 단초들을 노골적으로 제거하려는 특징을 띤다. 「오징어 게임」의 시청자들이 ‘스너프 필름’을 관람하며 즐거워하는 VIP의 시선에 동화되지 않고 슬픔, 연민, 분노, 우정, 믿음 그리고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 같은 보다 인간적인 감정에 기꺼이 사로잡힌다는 사실은 거듭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 죄의식은 “자유경쟁과 등가교환의 원리가 제2의 자연이 되어 있는 근대성의 내부자”15인 우리들이 날로 상실해가고 있는, 장정일의 시를 빌려 말하자면 ‘참(懺)의 수치심’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16

물론 작품을 향한 비판도 적지 않다.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평면적이고 선악의 구도가 이분법적이어서 플롯이 단순하다는 지적과, 여성 및 외국인 노동자 등 소수자에 대한 재현이 시대에 뒤처져 있거나 비윤리적이라는 비판이 대표적이다. 이런 타당한 비판과 더불어 「오징어 게임」이 인간을 “고작 자본주의의 부속품에 불과”한 존재로 그려냄으로써 현존하는 자본주의의 전체화하는 억압을 넘어설 수 없다는 무력감을 고착시키며 결과적으로 “구조적 모순의 실체를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것”17을 가로막는다는 비판도 제기된 바 있다.

「오징어 게임」은 확실히 오늘날 자본주의 문명의 말기적 증상을 극복할 대안적인 주체의 형상을 정교하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모색하는 작품은 아니다.18 그럼에도 이 작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응시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평가에는 모종의 유보가 필요해 보인다. 이제까지 살펴보았듯 「오징어 게임」은 부채 자본주의의 동학을 데스매치라는 가학적 스펙터클을 통해 생생하게 재현하면서도 인간적인 죄의식과 수치심을 끝내 환기해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시청자들이 맞닥뜨리는 다양한 정동은 대안적인 사유 및 실천과 구분되는 사소한 감각처럼 보이지만 정동의 측면을 통합하지 않고서는 대안적인 실천과 사유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새로운 사유와 실천의 출발점일 수 있다.19

 

 

3. ‘신화적 폭력’과 무정치적 자연상태: 「지옥」

 

「지옥」은 ‘신화적 폭력’이 도래한 현실을 배경으로 법과 폭력, 속죄와 정의의 관계 같은 일견 신학적이고 한편으론 법철학적인 쟁점을 제기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느닷없이 지옥의 사자들이 나타나 죽음을 고지받은 사람을 불태워 살해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작품에서는 이를 지옥의 ‘시연(試演)’이라고 부른다). 납득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 앞에서 기존의 세속적 법률과 지식 체계는 급격히 흔들리게 되고, 지옥의 시연이 정의롭지 않은 인간을 심판하려는 신의 의도라고 주장하는 정진수 의장의 ‘새진리회’가 급격히 세력을 확장해간다. 새진리회는 외견상 기독교 신흥종교와 유사해 보임에도 그들이 말하는 신은 성경 속 야훼보다는 여러 신화에 등장하는 신에 더 가까워 보인다. 벤야민(W. Benjamin)은 일상적 삶에서 순수하게 발현하는 폭력을 설명하면서 ‘신화적 폭력’을 이렇게 정의한 바 있다. “신화적 폭력은 그것이 갖는 원초적 이미지의 형태를 두고 볼 때 신들의 단순한 발현이다. 그것은 신들의 목적을 위한 수단도 아니고 신들의 의지의 발현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우선 신들의 존재의 발현이다.”20

「지옥」에 등장하는 시연은 벤야민이 신의 존재 발현이라고 일컬었던 ‘신화적 폭력’의 대표적인 예이다. 어떠한 목적도 제시하지 않고 어떤 의도도 표출하지 않으며 그저 누군가를 지목해 태워 죽임으로써 순수한 힘의 발현만을 내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같은 ‘신화적 폭력’은 그 목적과 의지를 불안한 공백으로 남겨둠으로써 그 공백을 주관적 해석으로 메우고자 하는 인간적 충동을 자극한다. 정진수는 지옥의 시연이 “수치심, 죄의식, 참회, 속죄를 잃어버린” 인간을 심판하기 위한 신의 형벌이라고 주장한다. 초자연적인 폭력 앞에서 그것이 인간의 죄에 대한 신의 징벌이며 따라서 더 정의로워져야 한다고 주문하는 것 자체는, 지진이나 해일이 타락한 인간에 대한 신의 응징이라고 설교하는 종교인들을 심심찮게 마주하는 우리 현실에서 그다지 새롭지 않다. 이 작품의 새로움은 그런 헛소리를 진지하게 여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도입하고 실제로 일어날 법한 사회적 혼란을 현재적인 상상력으로 포착하려는 데 있다.

「오징어 게임」과 마찬가지로 「지옥」에서도 ‘부채/죄’(schuld)라는 개념이 서사의 핵심에 가로놓여 있다. 「오징어 게임」에서 ‘부채’가 부채 자본주의의 ‘죽음 정치’를 가동하는 연료라면 「지옥」에서 ‘죄’는 끊임없이 죄책감을 발명하여 자신의 내면을 감시하고 고발하게 함으로써 주체를 길들이는 통치의 기제로 나타난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공정이 기만적인 것처럼 정진수가 설파하는 정의 역시 공허하다. 니체가 간파했듯 “형벌이란 대체로 공포를 증가시키고 현명함을 높이며 욕망을 제어하게” 해주지만 “인간을 ‘더 나은’ 존재로 만들지는”21 못하기 때문이다. 그 형벌을 집행하는 주체가 신이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정진수는 시연당한 사람들이 폭행, 사기, 강간, 살인 같은 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벌받았다고 주장하지만 태어난 지 며칠 되지 않은 신생아가 지옥 시연의 고지를 받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죄는 신의 징벌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아니다. 정진수는 이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응징에 대한 공포만이 세상에 정의를 가져올 수 있기에 자신은 ‘선한 거짓말’을 했을 뿐이라고 강변한다.

공포에 짓눌려 자신의 죄를 끊임없이 고백하는 행위가 정의로운 세계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사실은 정진수에 이어 새진리회 2대 교주가 된 김정칠에 이르러 명확히 드러난다. 정진수와 다르게 김정칠은 고백을 매개로 한 지배와 통치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김정칠은 새진리회 홍보영상에서 두려움과 수치심을 떨치고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할 것을 강권한 뒤 어린 소녀가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죄를 고백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아버지의 죄를 고발하는 소녀의 행동에서 ‘더 나은 인간’의 모습을 읽어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소녀의 아버지가 티끌만 한 죄도 없는 무결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대타자를 향해 자신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는 행위는 신을 향한 신실성의 증거일 순 있으나 새로운 윤리를 창안하는 일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공포는 인간의 품행을 통제하는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지만 공포에 짓눌린 주체에게 윤리적 행위를 기대할 수는 없다.

강요된 속죄에 짓눌린 주체는 더 나은 인간이 되기보다 오히려 분노의 원한감정에 휩싸인 존재로 ‘흑화’하기 쉽다. 자신은 언제나 신 앞에 모든 죄를 고백하며 벌벌 떠는데 옆 사람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아무런 죄도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아마 그 사람은 상대방의 ‘도덕적 해이’에 억울함을 넘어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낄 것이다. 새진리회의 교리를 따르는 급진주의적 분파 ‘화살촉’처럼 말이다. 화살촉은 교수, 작가, 법률가를 비롯한 지식인을 신의 의도를 무시하는 적으로 지목하고 강력한 원한감정을 드러낸다. 지식인들이 신과 인간 사이에 사회라는 세속적 매개를 설정함으로써 신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부정하고, 빚을 갚을 생각이 없는 게으른 채무자처럼 신을 향한 참회의 부담을 내던진다는 것이 그 이유다. 이들을 향한 화살촉의 테러는 최근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반지성주의적 포퓰리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한다. 엘리트주의에 반대하는 반지성주의는 강력한 대중동원력을 바탕으로 한때 낡고 보수적인 정치지형을 해체하는 역동성을 발휘하기도 했지만, 오늘날에는 우파적 포퓰리즘과 결합함으로써 공론장의 합리적인 작동을 저해하고 탈진실 시대를 떠받치는 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옥」에 깔려 있는 강력한 원한감정은 근대 문명이 발전시켜온 인권 가치에 대한 불만에서도 싹튼다. 가령 고지받은 사람의 죄를 즉각 공개하고 이를 가로막는 사람은 직접행동을 통해 응징해야 한다는 화살촉의 테러리즘과 심신미약 판정을 받고 조기출소한 엄마의 살인범을 불태워 죽이는 희정의 복수는 동일한 ‘문명 속의 불만’을 공유한다. 그 불만은 근대 문명이 발전시켜온 인권의 가치가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 대신 범죄자와 같은 악인을 보호해주는 것으로 변질되었다는 분노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게 하고 심지어 그 죄인을 직접 태워 죽임으로써 응징하는 신의 정의와 비교한다면 인간의 법체계와 법 집행은 너무 느리고 빈틈 또한 커 보일 수밖에 없다.

죄인을 신속하게 응징하지 않고 법체계를 통해 처리하는 ‘문명화’ 과정이 평범한 사람들을 원한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든다는 사실을 지적한 사람 또한 니체였다. 니체는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사회 전체가 “직접 피해를 입은 사람의 분노로부터 범죄자를 용의주도하게 지켜주”며 “범죄자와 그가 저지른 행위를 따로 떼어서 보려는 의지가 점점 더 확연하게” 드러난다고 말한다.22 니체는 공동체의 힘이 크고 단단할수록 형법은 완화되며, 반대로 공동체의 힘과 자신감이 결여하면 형법이 가혹해진다고 덧붙인다. 니체의 통찰은 「지옥」에서 시연 과정이 왜 그토록 잔학하게 묘사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해주는 단서다. 시연 과정에서 나타난 잔학한 폭력은 현대 사회가 정의를 수립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대중들이 집합적으로 맞닥뜨린 내적 무력감의 반영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공정의 가치가 무너졌으며 세계는 더이상 정의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너진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어떻게 다시 세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진경준의 동료 경찰 홍은표는 범죄자를 기껏 잡아봤자 증거불충분, 심신미약 등으로 다 빼주지 않느냐면서 차라리 새진리회의 주장이 사실이었으면 좋겠다고 한탄하듯 말하는데, 이 장면은 그가 왜 화살촉에 빠지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정의의 수립이 거듭 좌절된 현실에 대한 냉소가 극단적인 행동주의에 대한 매혹으로 귀착된 셈이다.

그런데 「지옥」을 보다보면 하나의 의문에 사로잡히게 된다. 신의 사자라는 정체불명의 괴생명체가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현실을 맞닥뜨린 뒤 평범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하는 궁금증이 바로 그것이다. 새진리회 홍보영상을 두고 벌어지는 방송국 내에서의 갈등과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유추해보건대 이들은 여전히 정해진 시간에 출근을 하고 텔레비전도 보며 예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품 초반 사람들이 혼비백산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불과 4년 만에 말끔하게 일상을 회복했다는 점은 조금은 납득하기 힘들다. 물론 이런 판단도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 작품에서는 평범한 이들의 삶과 생각이 거의 재현되지 않기에 사람들이 어느정도로 일상을 회복하고 살아가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생활의 영역을 사회라고 한다면 이 작품에는 아노미적 사태를 수습하고 집합적인 의미화 작업을 수행하는 사회라는 바탕이 소거된 듯 보인다.

「지옥」은 그 사회적인 것의 빈자리를 새진리회와 ‘소도’ 사이에 펼쳐지는 활극으로 채운다. 흥미로운 것은 이때 사회뿐만 아니라 정치의 자리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 작품에는 새진리회와 화살촉을 제외한 다른 사회적 결사체는 물론 어떤 정치인도 등장하지 않으며 혼돈의 상황을 수습해야 할 정부와 내각 역시 존재감이 전무하다. ‘신화적 폭력’에 내몰려 사회도 정치도 사라져버린 자연상태. 그것이 「지옥」의 알레고리가 재현하는 현실의 모습이다.23 「지옥」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나가는 인간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정답처럼 제시하면서도 정작 가장 인간다운 실천의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정치를 서사의 전면에서 제거해버린 점은 역설적이다. 물론 이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가야 할 사회가 새진리회와 같은 비이성적이고 반지성주의적인 집단에 의해 점령당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소도를 잡기 위해 경찰력이 아닌 화살촉을 은밀하게 동원하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새진리회는 일원적인 신정(神政) 정치를 구가할 만큼 힘을 가진 조직은 아니다. 즉 분명 잔존하고 있을 정치와 사회의 영역은 「지옥」의 서사의 표면으로 올라오는 것을 억압당하고 있으며, 그같은 억압은 작품의 결말에 이르러 납작한 휴머니즘적 교설로 귀환하게 된다.

「지옥」은 시연에서 살아남은 아기와 함께 택시를 타고 도망치는 민혜진에게 택시기사가 자신은 신에 전혀 관심이 없으며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고 인간들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말을 건네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의 자율성과 실천성에 대한 신뢰를 보여주려는 장면이지만 작품이 끌고 온 현실을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범속하다. 만약 시연이 부인할 수 없는 신의 현현이라면 그 앞에서 인본주의 및 세속화의 이념은 당연히 흔들릴 수밖에 없고, 반대로 그것이 신의 현현이 아니라 단지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에 불과하다면 거기에 신의 의도를 덧씌움으로써 세계를 ‘지옥’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기 때문이다. 「지옥」은 결말의 전언을 통해 이곳이 인간의 세상임을 천명했지만 우리가 진정 물어야 할 것은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든 ‘그런 인간’과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른 인간’인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희망의 근거가 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가?’같은 물음일 것이다. 「지옥」은 이 질문을 던지기 직전에 멈췄지만 우리는 그곳에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4. 협동적 창조물로서의 ‘한류’

 

이제까지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한류를 이끈 것은 「대장금」(2003)이나 「주몽」(2006)처럼 한국 고유의 내셔널리티를 강하게 드러내는 역사물이나 「겨울연가」(2002), 「도깨비」(2016), 「사랑의 불시착」(2019)처럼 특유의 서정에 기반을 둔 로맨스물이었다. 「오징어 게임」과 「지옥」의 전세계적 흥행은 오리엔탈리즘적 이국성에 대한 흥미와 로맨스를 넘어 세계 자본주의의 무참한 폭력은 물론이고 죄와 형벌, 정의의 관계를 둘러싼 형이상학적인 물음까지 흥미롭게 연출해낼 수 있을 만큼 한국 드라마가 주제와 기법의 차원에서 다양하고 깊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물론 이 글의 분석을 통해 새로운 문명으로서 한류가 지닌 가능성의 면모가 온전하게 입증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건 비판마저 새로움이라는 유행의 형식을 통해 양분으로 취하는 근대 자본주의체제에 문화상품으로서의 한류가 언제든 흡수될 위험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전지구적 위기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발신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한국사회를 살아나가는 우리 모두의 응전이 요구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호재는 한류의 세가지 분기점을 각각 1987년 6월 항쟁과 1997년 외환위기, 그리고 2016년 말의 ‘촛불과 탄핵심판’에서 찾은 바 있다.24 정치사회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위한 투쟁이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 시야를 열어줌으로써 문화적 혁신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문명으로서 한류의 가능성 또한 어떤 특정한 콘텐츠의 성취를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한국사회가 집합적으로 이룩하는 협동적 창조의 양상에 그 실현 여부가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앞서 「지옥」에 대한 분석을 마무리하면서 요청했던,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인간’이어야 하는지를 묻는 일 역시 그같은 협동적 창조의 일부다. “기존의 낡은 관계와 관행, 가치관에 맞춤하게 체질화된 자신은 바꾸지 않은 채 주어진 세상을 확 바꾸겠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25다면 우리 자신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에 대한 실천적인 고민 없이 좀처럼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는 일의 무망함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한기욱은 정동과 사유의 관계를 따져 물으며 “자산·소득 불평등과 더불어 극단적으로 치닫는 자본의 수탈방식이 대다수 시민들을 정동적으로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26이라고 말한 바 있는데 「지옥」은 거기에 더해 정의의 실현이 좌절됨으로써 발생하는 냉소와 무력감, 원한의 정동이 타인에 대한 혐오와 결합하여 정치적 퇴행을 야기한 주요 원인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를 에워싼 냉소와 냉담, 원한의 정동에서 벗어나 다른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까. 그 존재가 갖추어야 할 덕목은 무엇이며 그런 존재로 이행할 방도는 무엇일까. 이 간단치 않은 물음을 일거에 해결해줄 정답은 존재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지옥」에서 펼쳐진 세상이 정의와 올바름에 대한 희구가 부족해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이 작품은 새진리회의 폭정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것을 단죄하고자 하는 정의가 아니라, 올바르지 않은 것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절망과 냉소로 빠지지 않는 견결성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올바름을 향한 윤리적 열정이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는 데 필요한 덕목임은 분명하지만 “어떤 올바름 혹은 어떤 공감도 우리를 정말 사는 듯이 살아 있게 하는가라는 물음을 대체하지”27 못한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사는 것처럼 사는 삶’의 실감과 ‘사는 것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을 궁리하는 일의 중요성을 거듭 깨닫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회의 야만적인 현실이 「오징어 게임」을 탄생시킨 배경이라고 말해왔지만 이런 해석은 ‘사는 것 같지 않은 세상’쪽으로 자꾸만 가라앉고 있는 한국사회를 다시 ‘사는 것처럼 사는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가 창작자의 눈을 새롭게 벼린 측면을 포착하지 못한다. 언뜻 ‘한류’와 무관해 보이는 이런 물음이 중요한 이유도, 촛불의 경험이 보여주듯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한 집합적 창조의 실천이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안목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콘텐츠에 각인시키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류’의 문명적 가능성 또한 우리가 함께 만들어갈 이야기에 달려 있는 셈이다.

 

 

  1. 정호재 『다시, K를 보다』, 메디치미디어 2021, 10면.
  2. 같은 책 256면 참조.
  3. 백낙청 「새로운 전지구적 문명을 향하여: 한국 민중운동의 역할」, 『창작과비평』 1996년 여름호 11~13면.
  4. 정호재, 앞의 책 279면.
  5. 두 작품이 얻은 세계적인 인기는 넷플릭스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넷플릭스는 맑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예측했던 세계문학의 형성 가능성을 영상 콘텐츠 분야에서 실현하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을 둘러싼 수익 배분 논란에서 엿볼 수 있듯 새로운 플랫폼 경제 특유의 착취적 성격은 새로운 논쟁거리다. 넷플릭스를 비롯한 플랫폼 경제가 “대량실업, 생산과 노동의 외주화, 전 지구적 착취라는 기존 경향에 기대어 성장”했다는 비판에 관해서는 닉 서르닉 『플랫폼 자본주의』, 킹콩북 2020 참조.
  6.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부채인간』,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2, 26면. 라자라또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자본은 ‘거대한 채권자’이자 ‘포괄적 채권자’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한다.
  7. 이 작품에서 오일남은 바로 라자라또가 말한 ‘포괄적 채권자’(앞의 각주 참조)의 의인화된 형상이다. 니체는 죄책감이 부채에서 비롯되었음을 논증하면서 “채권자의 공동체”는 “전체에 맞서 계약을 어기고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무자를 “법의 보호 밖에 놓인 야만적인 상태”로 몰아낸다고 말한 바 있는데 「오징어 게임」의 세트장은 정확히 니체가 말했던 ‘야만적 치외법권’ 지대라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홍성광 옮김, 연암서가 2011, 84~93면 참조.
  8. 라자라토, 앞의 책 50~57면
  9. 라자라토, 앞의 책 78면.
  10. 라자라토, 앞의 책 73면. 채권자가 채무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형벌 속에는 잔인한 광경을 보면서 함께 즐기는 축제의 요소가 포함되고 있다는 니체의 지적을 염두에 둔다면(니체, 앞의 책 85면 참조) 채무자를 잔혹하게 죽이는 ‘오징어 게임’이 어째서 유희적 스펙터클로 상연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은 부채상환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부도덕한’ 채무자들에게 자본이라는 채권자가 가하는 형벌의 축제인 것이다.
  11. 라자라토, 같은 곳.
  12. 라자라또는 가따리(F. Guattari)의 말을 인용하며 『부채인간』의 결론을 맺는다. “그리스는 유럽의 열등생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리스의 장점이다. 다행히도, 복합성을 갖고 있는 그리스와 같은 열등생들이 존재한다. 이 열등생들은 독일과 프랑스의 이른바 ‘정상화’ 계획을 거부한다. 그리스가 계속해서 불량 학생으로 남아 있기를, 그리고 우리가 좋은 친구들로 남아 있기를…”(225면). 부채상환 능력 및 이행 정도에 따라 개인의 모방성·도덕성을 가르는 부채 자본주의의 양상은 국가 차원에서도 동일한 구획 짓기로 반복된다.
  13. 라자라토, 앞의 책 224면.
  14. 노스럽 프라이 『비평의 해부』, 임철규 옮김, 한길사 2000, 97~107면.
  15. 서영채 『죄의식과 부끄러움』, 나무나무 2017, 36면.
  16. 장정일의 「참(懺)」은 동료를 죽이고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오징어 게임」과 통하는 면이 있다. 시베리아에서 조난자를 구해주는 동물 ‘참’에 대한 전설을 전하는 이 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마무리된다. “시베리아에서 길을 잃고 사경을 헤매다가 구조된 조난자들은 거개가 참의 희생으로 목숨을 부지했다는데, 참이 이렇듯 잘 알려지지 않고 이 변변치 않은 사람의 글에 의해서 널리 알려지는 까닭은, 인간에게 수치심이 있기 때문이다. 목숨을 부지한 조난자는 차마 동료를 죽이고 그 덕분에 살게 되었다는 것을 밝히기를 꺼린다. 칼로 배가 쭉 갈라진 동료가 오랫동안 죽지 않고 눈을 끔벅이며 “살려줘, 살려줘, 나는 너의 친구잖니?”라고 호소했다는 것, 그런데도 혼자 살기 위해 동료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신 것을 수치로 여겨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정일 「참(懺)」, 『눈 속의 구조대』, 민음사 2019.
  17. 강지희 「당신은 빚지고 있습니까: 〈오징어 게임〉과 〈더 체어〉를 겹쳐 읽으며」, 『문학동네』 2021년 겨울호 6면.
  18. 물론 부채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해서는 “모든 죄책감과 의무,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벗어나” “단 한 푼도 상환해서는 안 된다”(라자라토, 앞의 책 223면)고 주장한 라자라또라면 기훈을 부채 자본주의에 맞서는 대안적인 주체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가 선량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인간적인 존재라서가 아니라 애초부터 빚을 갚을 생각이 전혀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첫 장면에서 기훈은 “그거 이렇게 갚아도 다 못 갚아! 그러니까 좀 쓰고 살자!”라고 뻔뻔하게 역정을 낸다. 기훈은 자신이 빚을 갚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무런 죄책감과 괴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456억원의 상금을 받은 이후에도 그는 빚을 갚지 않는다. 기훈은 동료의 죽음을 딛고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한한 죄책감을 느끼지만 자신이 진 빚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채감을 지니지 않는, 가따리가 말한 ‘열등생’의 계보에 위치하는 인물이다.
  19. 한기욱은 정동과 사유가 대립적이거나 이율배반적인 것이 아니며 최근 주체들이 더욱 정동적이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정동을 통합한 사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사유, 정동, 리얼리즘」, 『문학의 열린 길』 창비 2021 참조). 정동의 측면에서 본다면 「오징어 게임」을 둘러싼 해외의 정서적 반응이 국내와 확연히 갈리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예컨대 지영이 새벽을 위해 구슬게임을 포기하는 장면이나 깐부 에피소드에서 해외의 시청자들은 큰 슬픔과 감동을 느꼈다고 고백하는 반면 국내 시청자들은 이를 ‘K-신파’라고 칭하며 그 슬픔의 정동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경향을 보였다. 그 차이의 원인과 의미를 여기서 구체적으로 규명하기는 어렵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슬픔의 정동이 유난히 금기시되고 있다는 사실은 섬세히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물론 1910년대에 들어 확정된 “신파조의 승리” 이후 반복적으로 접해온 신파적 요소에 한국인들이 어느정도 질리게 된 측면이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최원식 「두 얼굴의 계몽주의」, 『기억의 연금술』, 창비 2021, 33면). 하지만 이 슬픔에 대한 피로와 멸시는 세월호참사 이후 우파세력들이 사회적 참사에 애도를 표하는 사람들에게 ‘감성팔이’라는 냉소적 프레임을 씌운 이후 급격하게 강해졌다는 현실적 맥락을 지니기도 한다.
  20. 발터 벤야민 「폭력비판을 위하여」,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폭력비판을 위하여/초현실주의 외』, 최성만 옮김, 길 2008, 107면.
  21. 프리드리히 니체, 앞의 책 110면.
  22. 프리드리히 니체, 앞의 책 99면.
  23. 지구를 파멸시킬 거대한 운석이 지구를 향해 다가오는 상황을 가정한 영화 「돈 룩 업」(2021)과 비교해보면 「지옥」의 무정치성이 도드라진다. 「돈 룩 업」은 ‘비상사태’를 맞아 좌충우돌하는 정치권과 언론은 물론이고 그 와중에도 편을 갈라 싸우는 ‘정치적 부족주의’의 세태를 코믹하게 풍자한 영화이다. 거기서 대통령은 지구 종말의 위기조차 정파적 이익을 위해 활용하고 막대한 돈을 후원하는 후원자의 입김에 지구의 운명을 맡기는 어처구니없고 한심한 인물로 그려지지만, 그런 조롱과 풍자가 두시간이 넘도록 이어질 만큼 이 작품에서 정치는 뚜렷한 존재감을 얻고 있다.
  24. 정호재, 앞의 책 67~68면.
  25. 한기욱 「주체의 변화와 촛불혁명」, 앞의 책 17면.
  26. 한기욱 「사유, 정동, 리얼리즘」, 앞의 책 40면.
  27. 황정아 「문학성과 커먼즈」, 『창작과비평』 2018년 여름호 29~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