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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제주 4·3 모델의 (불)가능성과 남은 과제들

 

 

고성만 高誠晩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최근 논저로 「4·3 ‘희생자’의 변용과 활용」 「KIN Gen-chin 찾기」 등이 있음.

wikigarden@jejunu.ac.kr

 

 

1. 선례화라는 욕망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3특별법)이 2021년 한해 두차례 개정되면서 과거청산의 형식과 내용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기존 14개 조문에서 31개로 전부개정된 법률이 시행 반년 만에 다시 12개 조문이 손질되고 11개 조문이 추가됐다.1 새롭게 정비된 법률이 과거청산의 양적·질적 변화를 추동할 것이라는 전망은 조문 곳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보상금(16조)과 재심(14, 15조), 인지청구 특례(21조)와 같이 4·3특별법뿐 아니라 다른 과거사 해결에서도 시도되기 어려웠던, 특히 ‘희생자 명예회복’ 실현에 초점을 맞춘 조항들이 중점적으로 보강됐다.

법률이 개정된 직후 “과거사 문제 해결의 전환점”2이라는 평가가 나왔고, 제주의 상황을2) 주시해온 “다른 지역 과거사 문제 해결의 단초가 될 것”3으로 진단됐다. “개정안의 내용이 실현되면 세계에서도 가장 우뚝 선 보편적 모델로 자리 잡을 것”4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무엇보다 개정법 16조는 국가가 ‘희생자로 결정된 사람’에게 보상금을 지급할 수 있는 근거와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전환’을 견인하는 핵심 조항으로 평가된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에 대한 첫 입법적 보상”5이라는 의의로 인해 여수·순천 10·19사건이나 노근리사건, 거창·산청·함양 민간인학살사건이 남긴 과거사 문제의 공적 해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4·3특별법이 2.0버전으로 갱신되는 과정에서6, 여순사건을 비롯한 다른 과거사 해결의 가이드라인이 출현하는 징후는 곳곳에서 확인된다. 대통령을 비롯하여 주무부처 장관, 지역 국회의원, 시민단체와 언론까지 한 목소리로 4·3특별법의 의미를 유사한 사건들에 영향을 끼칠 입법 기준이자 피해자 보상 기준의 선례로 규정한다.

개정법의 효과가 제주 사회에 나타나기도 전에 여순, 노근리 같은 지역이 연쇄적으로 호명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보상 조항을 획득한 4·3특별법은 어떻게 다른 과거사 해결의 ‘모범’ ‘모델’ 혹은 ‘기준’이 될 수 있을까? 4·3 과거청산의 경험은 효용성 높은 긍정적 유산으로만 작용할까? 어쩌면 4·3이라는 선례로 인해 개별 사건들의 역사적 특수성과 사회적 현실에 바탕을 둔 밑으로부터의 과거청산이 추동될 기회가 생략되어버리지는 않을까? 차이는 무화되고, 고유하고 독자적인 과거청산의 사상과 문화, 전략과 방법론이 모색될 가능성 역시 차단되지는 않을까?

이 글의 문제의식은 4·3특별법이 “정의로운 과거사 해결의 이정표”7로 역할할 뿐 아니라 4·3 문제의 보다 구체적인 과제와 대상을 발굴하여 소위 ‘완전한 해결’에 이바지할 것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세간의 평가와 입장을 같이하면서도, 앞서 소개한 즉각적인 반응이나 장밋빛 예견에 앞서 선행 혹은 병행되어야 할 질문이 부재하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주에만 국한되지 않을 4·3특별법 2조(정의)와 16조(보상금)의 문제점을 검토하며, ‘제주의 봄’8을 잰걸음으로 앞당기려는 과정에서 결여될 수 있는 질문들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2. ‘희생자’ 효과

 

닫힌 결말, 불가역적 종결을 의미하는 ‘완전한 해결’이 짧은 시간에 대중언어로 정착될 수 있었던 데는 ‘희생자’의 역할이 커 보인다. 사건의 복잡한 역학 구도를 단순화함으로써 현재화·기억화·제도화 과정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다양한 목소리를 묵음 처리하는 데 ‘희생자’가 활용되어왔기 때문이다.

2000년 제정된 4·3특별법을 토대로 공적 영역에서의 과거사 해결이 본격화되면서, 다종다양한 죽음 혹은 실종, 부상, 감금의 이력을 갖는 주체들의 사회적 지위는 ‘희생자’와 ‘희생자 제외 대상’이라는 서열화된 구도로 재편되어왔다.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수괴급” 무장대를 ‘희생자’에서 제외하라는 2001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선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9

공식화의 대상을 주민과 토벌대로 한정하는 구조는 과거청산의 논점에서 무장대가 상징하는 항쟁의 역사를 후경화하고 저항의 기억을 말소하는 데 기여해왔다. 무장대를 ‘희생자’에서 제외함으로써 그/그녀들의 사상과 행동, 기억은 ‘희생자’에게만 자격을 부여하는 과거청산의 무대에 들어설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대한 도민들의 저항 역사는, 4·3이 현재화되는 과정에 강하게 개입하는 “국민화합”(4·3특별법 1조), “화해와 상생”(4·3특별법 16조), “대한민국의 정체성”(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의 ‘희생자 심의·결정 기준’)과 같은 이념에 의해 다시 금기의 영역으로 회귀되어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청산의 법과 제도가 무장대를 가해자로 구도화하는 것도 아니다. 4·3특별법과 과거청산은 ‘희생자’를 선별하여 공식화할 뿐 특정 대상을 가해자로 규정하지 않고, 따라서 가해자를 선별하기 위한 기준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제외 대상’으로 분류된 무장대만 과거청산의 대상에서 배제된 채 ‘희생자’도 아닌 그렇다고 가해자도 아닌, 애매모호한 ‘보류의 영역’으로 재위치되었다.

그로 인해 가해와 피해라는 극단적 구도로는 수렴될 수 없는 관계의 실체가 더욱 불명료해져버렸다. 가해와 피해의 구분 기준에 대한 숙고는 물론이고 양극단 사이에 존재하는 개개인들의 다층적인 경험과 관계의 역동, 파편화된 기억에 대한 재평가가 보류된 채 탈맥락화된 ‘희생자’만 남게 된 것이다. 이처럼 ‘희생자’는 본래의 사전적 의미나 당사자·관련자들의 체험과 기억, 실감과 다르게 선별과 여과를 통해 2000년 이후 제주/한국사회에서 재구성되는 개념으로 이해되게 됐다.

4·3 과거청산 추진세력이 애써 부인해온 이 현상을 최근 조선일보가 새롭게 환기했다. 조선일보는 4·3특별법을 참고해 만들어진 ‘여수·순천 10·19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여순10·19특별법)이 2021년 6월 국회를 통과하자 발 빠르게 다음과 같은 사설을 내놓았다.

 

(여순사건) 특별법은 반란에 가담해 무차별 살인, 방화를 저지른 가해자와 억울한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아 반국가, 반인륜 범죄자까지 보호할 수 있는 문제를 안고 있다. (…) 2001년 헌법재판소는 제주4·3사건 특별법과 관련해 ‘사건 발발 책임이 있는 남로당 핵심 간부, 군경과 가족, 선거 관여자를 살해한 자, 공공시설과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를 희생자로 보호할 수 없다’고 결정했다. (…) 여순사건도 예외일 수 없다. 국민의 법 상식도 헌재의 이런 입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10

 

헌법재판소의 퇴행적 해석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 위에 토대를 닦아온 4·3 모델은 이제 제주를 넘어 극우세력이 여순10·19의 과거청산에 개입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4·3 과거청산 추진세력은 ‘다른 지역 과거사 문제 해결에도 단초가 될 것’이라는 말의 무게와 여파를 재인식해야 하며, 그 말이 ‘여순사건도 예외일 수 없다’는 식의 섣부른 여론 형성에 악용될 수 있는 현실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한다.

조선일보와 과거청산 세력들은 추구하는 방향과 목적은 전혀 다를지언정 과거사의 현재화 국면에서 터져 나올 수 있는 복합적인 갈등을 일거에 단순화시키는 ‘희생자’의 효과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이해관계를 같이한다. 그리고 이러한 ‘희생자’ 효과는 이제 막 닻을 올린 여순10·19의 과거청산이 구사할 수 있는 선택지를 협소화시키게 됐다.

 

 

3. 바꾸지 않은 ‘정의’

 

다시 조선일보의 사설을 보자.

 

이번 특별법은 ‘국군 14연대 일부 군인들이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고 일으킨 사건’으로 표기해 사건의 책임 소재와 반란적 성격을 의도적으로 누락했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남로당의 무장 폭동을 ‘소요(騷擾)’로 표기한 제주4·3사건 특별법보다 더 문제가 있다.11

 

이는 1947~48년의 상황을 ‘소요사태’로 규정하는 4·3특별법이 준거로 작동해 여순10·19의 법적 정의를 모색하려는 시도에 걸림돌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12 물론 4·3특별법 2조(정의)를 개정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사건’이라고 공식적으로 칭하면서도 그것을 각명하지 않는 ‘백비(白碑)’와의 긴장관계가 촉발한 정명(正名) 논쟁이 20대 국회에서 법 개정 움직임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2017년의 개정 발의안은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2003)의 결론을 반영하여 ‘소요사태’를 ‘저항’ ‘봉기’로 바꾸고, 그것이 ‘경찰과 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방어적·대항적 성격이었음을 명확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20대 국회 임기 만료와 함께 법안은 자동 폐기됐고, ‘정의’ 조항의 개정 논의도 중단되어버렸다. 그후 2020년 7월에 발의된 개정안은 개별 사건 간의 인과관계를 더 구체화시키는 방향이었다. “1947년 3·1절 기념행사에서 경찰발포에 의한 민간인 사망사고를 계기로 저항과 탄압, 1948년 4월 3일의 봉기”13와 같이, ‘계기로’라는 표현을 통해 1947년의 3·1절 기념행사와 48년 봉기 간의 관계가 보다 명확하게 표현됐다. 그러나 이 역시 개정 법률에는 포함되지 못했다. 수년간의 숙의와 공론 과정을 거쳐 이룬 전부개정의 위상과 의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정의’ 조항은 20여년째 바뀌지 않았고, 1947년 3월 1일과 48년 4월 3일을 전후로 발생한 사건들과 도민들의 행동은 여전히 ‘소요사태’로 규정되게 됐다.

‘사건을 무엇으로 정의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과 합의는 과거청산을 둘러싼 다양한 알력의 상호작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럼에도 개정법은 사건을 여전히 2000년 제정법의 역사인식을 반영하는 ‘소요사태’로 정의함으로써 과거청산의 궤적과 성과에 역행하는, 퇴행적 해석을 채택해버리고 말았다. ‘소요사태’라는 잔재는 지난 20여년간 이어져온 피해자들의 분투와 역사인식의 변혁에도 불구하고, 과거청산의 사회화가 요원한 우리의 현실을 방증한다.

수차례의 개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유독 ‘정의’ 조항이 바뀌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법 개정에 핵심적으로 참여한 인사들은 “야당과의 이견”14이나 “국회 논의과정에서 심한 칼질”15 “정부 쪽의 난색”16 등으로 회고하지만, 그 이유를 단지 외부에서 비롯된 불가항력적인 요인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오히려 새로운 ‘정의’가 개정법에 최종적으로 반영되지 못했을 때조차 질타나 아쉬움, 자성과 성찰을 요청하는 어떠한 목소리도 제기되지 않았던 ‘무반응’ 현상이 이러한 물음에 답하는 데 더 설명력을 갖췄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16조 집행에 유리한 조건을 확보하려 했던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희생자’에게 보상금이 지급될 수 있는 정치적·사회적 환경 조성이 우선시되어야 하고, ‘소요사태’라는 규정이 비록 구시대의 잔재라 하더라도 보상 프로세스의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면 협상 테이블에 안건으로 올라서는 안 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것이다. ‘희생자’에 대한 보상금 지급이 과거청산 후속 조치의 최우선순위로 부상된 상황에서 ‘정의’를 개정하는 데 발생하는 갈등 혹은 지체는 감수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저항/봉기’라는 2조의 이상과 ‘보상’이라는 16조의 현실을 양립시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16조가 안정적으로 수행되기 위해 2조의 변혁이 초래할지 모를 불안정성은 제거되어야 했다.

‘어둠에서 빛으로’ ‘침묵에서 외침으로’와 같은 구호가 상징하는 것처럼 한편에서는 진보와 발전의 도식 위에서 평화적이고 성공적인 운동 서사를 써 내려가면서도 4·3의 법적 ‘정의’를 20여년째 바꾸지 않은 현실은 결국 과거청산 추진세력의 전략적 판단이 작용한 결과였다. 다양한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상황에서 16조의 안정적인 운용을 의식해서 내려진 것이다. 16조는 일종의 ‘사고 정지’를 반영하게 된 2조와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게 됐고, 21년의 시차를 지닌 두 조항이 병존하는 기이한 현상은 “4·3 문제 해결에 새로운 해법을 찾을 수 있는 대전환점”17으로 규정되는 이행기 현상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시한다.

 

 

4. 보상의 시차

 

여순10·19특별법에는 ‘희생자 명예회복’에 대한 구체적 조치가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14조)으로 명시됐다. 진상규명(5~10조)이 선결 과제로, “5·18이나 4·3사건 관련 특별법도 처음에는 배·보상이 빠진 상태에서 나중에 개정됐다”는 데 착안해 같은 전략을 취하고 있다.18 올해 4월부터 시행될 ‘노근리사건 희생자 심사 및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의 전부개정안 역시 본안에는 보상 규정이 빠져 있지만, ‘제주4·3사건 보상 기준을 참조해 방안을 강구한다’는 부대의견을 달았다.19

4·3특별법 개정 과정에서 기획재정부는 특정 사건이 선례가 되면 노근리, 여순, 거창 등에도 모두 배·보상을 해야 한다며 보상 조항이 명시되는 것에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다.20 그러나 당·정·청 간의 이견이 합의점을 찾으면서 이 사건들의 과거청산에도 공인된 ‘희생자’에 대한 보상이 시행될 수 있는 선례를 마련하게 됐다. 거기에 문재인 대통령까지 보상 조항을 명시한 4·3특별법에 대해 “유사한 민간인 희생사건의 입법 기준”21이라며 의미를 부여하면서, 4·3 사례가 과거청산의 준거이자 모델로 역할할 가능성이 커지게 됐다.

그러나 16조의 성격은 2조에 의해 결정된다. 보상금은 ‘소요사태’라는 사건의 정의, 그리고 주민과 토벌대만을 일괄하는 ‘희생자’의 정의와 무관할 수 없다. 그런 만큼 4·3특별법의 보상금이 어떠한 환경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쟁취한 성과인지, 어떠한 정의(定義)에 기반한 돈인지 꼼꼼히 따지지 않으면 안 되게 됐다. 제주 4·3과 여순10·19를 비롯한 ‘유사한 민간인 희생사건’ 사이에는 보상의 시간차가 발생하고, 그에 따라 제주 4·3의 부정적 유산이 고스란히 여순10·19에서 재현될 가능성이 커진 만큼 더욱 섬세히 살펴야 할 부분이다.

4·3특별법이 2021년에 두차례 개정되는 동안 16조의 명칭이 ‘위자료 등’에서 ‘보상금’으로 바뀌고, 금액 산정 기준을 비롯하여 신청·심의·지급에 관한 절차가 구체적으로 표현됐다. 이러한 발 빠른 갱신은 4·3 문제 해결에 대한 정부와 국회의 확고한 실천 의지를 나타낸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희생자’ 연대 안에서의 유의미한 전환일 뿐이다.

2000년 제정법은 적용 대상을 4·3에 연루됐던 모든 사람으로 설정했지만, 2021년 개정법을 토대로 추진하게 될 보상금 지급은 그 가운데서도 ‘희생자’만을 대상으로 한다. 보상에 관한 구체적 사항은 ‘희생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그 점에서 법 개정 이후의 과거청산의 시야가 편협해질 가능성이 더 커졌다. 또한 16조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보상금의 차등 지급으로 인한 공동체 갈등을 우려한 나머지 균분 지급 방식으로 의견이 모아졌지만,22 이 또한 ‘희생자’에게만 적용되는 논리이기에 보상금 집행 과정에서 ‘희생자’와 비(非)‘희생자’ 간의 구도는 더욱 선명하게 부각될 것이고, ‘희생자’ 자격을 얻지 못한 혹은 박탈된 사람들은 더욱 논외 대상으로 밀려나게 됐다.

보상금(16조) 외에도 4·3특별법 시행과 관련하여 의견을 제출할 권리(3조)나 불이익 처우 금지(8조), 권익보호(13조), 의료지원금 및 생활지원금(19조), 실종선고 청구에 대한 특례(20조), 신체적·정신적 피해 치유와 공동체 회복(22조), 트라우마 치유사업(23조), 기념사업(24조)의 적용 대상 역시 모두 ‘희생자’ 혹은 그들의 ‘유족’으로 국한된다. 또한, 20조와 21조(인지청구의 특례)는 16조와 긴밀하게 연동되어, 많은 경우 공적기록상 혈연관계 정리가 적법한 보상 절차를 밟기 위한 사전 단계로 인식되어버린다. ‘희생자’와 비‘희생자’간의 ‘기울어진 운동장’은 고착화될 것으로 보이며, 대통령이 예고한 ‘제주의 봄’의 온기는 공평하지 않게 전파될 가능성이 커졌다. 특별법 개정을 환영하는 요란한 만세 소리로 인해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들리지 않게 될지 모른다.23

보상 대상을 ‘희생자’로 한정하는 판단은 1947~48년의 ‘저항’과 ‘봉기’를 ‘소요사태’로 회귀시켜 정의 조항을 유지하는 전략과 밀접하게 연관되고, 이는 4·3에 연루됐던 사람들을 ‘희생자’로 일원화·균질화하는 한편, ‘희생자’와 비‘희생자’로 위계화·서열화하는 과거청산의 방식을 고착화한다. ‘저항’과 ‘봉기’가 개정법에 전면화되지 않음으로써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 등을 제외 대상으로 특정하는 4·3위원회의 ‘희생자’ 선별 기준도 계속해서 정당성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2021년의 법 개정 이전에는 ‘희생자’의 공적 승인을 둘러싼 갈등이 신고 창구에서 혹은 4·3위원회의 회의석상에서, 법정에서, 4·3평화공원의 각명비 곳곳에서 발생했지만, ‘유족’이 갈등의 당사자로 부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보상이 시작되면, 보상금 신청과 수급에 ‘유족’ 혹은 ‘상속인’이 중요한 행위자로 등장하게 되면서 누가 ‘상속인’인가, 누가 우선순위를 갖는가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게 됐다. 4·3 이후 70년 넘게 역할해온 사람들 간의 암묵적 양해에 앞으로 균열이 생길 가능성이 예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보상이 현실화되고 거기에 따르는 여러 격차가 부각되게 되면 마을주민 간, 친족 간, 혹은 세대 간의 사회적·심리적 불평등은 더 가중될 수 있다. 그때는 이미 ‘재판상 화해가 성립’(18조의 3)되어버린 상태여서 국가가 더이상 문제 해결의 당사자로 나서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갈등의 책임이 오롯이 개인에게 떠넘겨져 보상으로 인한 생채기가 집 안에 갇혀 곪아버릴 수도 있다. 새로운 4·3특별법이 초래할 사회문제가 그제야 가십거리로 소비되지 않도록, 보상 이후의 시대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공론장 형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선별의 정치와 위계질서가 격화되면서 갈등과 위화감은 잠재되어온 국적의 유무와 차이를 소환해버릴지도 모른다. 4·3 시기 제주를 탈출한 많은 사람들이 피난처로 택했던 오오사까(大阪) 역시 예외일 수 없다. 4·3특별법 16조의2에 따라 설치될 ‘대한민국 재외공관의 보상금 접수처’가 한국과 일본, 북한을 가교해온 초국적 혹은 무국적 가족의 성원 모두에게 열려 있는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5.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4·3 문제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해 분투해온 제주 사람들의 과거청산 노력은 결코 부정될 수 없지만 그것을 기준이나 모델, 모범으로 서둘러 치장하고 ‘전국화’ 전략과 연동시키려는 움직임에는 더 긴 호흡을 통한 분석과 성찰이 필요하다. ‘다른 지역 과거사 문제 해결에도 단초가 될 것’이라는 전망은 4·3 모델의 ‘전국화’를 희구하는 (밑으로부터의) 성급한 욕망과 과거사 해결을 표준화·규격화하려는 (위로부터의) 관료제의 효율성 추구를 교묘하게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그 점에서 4·3 과거청산의 유산이 ‘여순10·19 모델’을 비롯해서 ‘거창·산청·함양 모델’ ‘노근리 모델’을 기획하는 데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세심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당장 4·3특별법 2조의 한계는 여순10·19에, 16조의 한계는 거창·산청·함양과 노근리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각 지역에서 응당 터져 나와야 할 질문과 새로운 방향성 모색의 기회를 차순위로 후퇴시킬 빌미가 될 수도 있다. 그러할 때, “다른 유사 과거사법과의 법 시행 시점에 20여년 차이”24를 인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주 4·3은 특별법 제정 후 20여년간의 법 체제하에서 시도되어온 과거청산의 내용적 분석이 선결되어야 하고, 다른 지역에서는 그것의 비판적·선별적 수용 및 토착화 작업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유사한 민간인 희생사건’이라는 발상은 결코 밑으로부터의 시선에서 비롯되는 관점일 수 없기 때문이다.

 

 

  1. 신설된 11개 조문은 모두 ‘보상금’과 관련된 내용으로, 신속하게 이루어진 법률 개정의 주요 목적이 보상의 근거 조항이었던 16조를 구체화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2.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 발언. 행정안전부 보도자료 「제주4·3희생자 보상 실시, 과거사 문제 완결을 위한 한 걸음」, 2021.10.28. 참조.
  3. 「오영훈 의원, 마침내 “제주4·3 희생자 보상 규정 담은 ‘제주4·3’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 발의”」, 대한뉴스 2021.10.28.
  4. 박명림(연세대) 교수의 ‘제주4·3의 완전 해결을 위한 특별좌담회’(제주연구원 주최, 2021.4.1.) 중 발언.
  5. 앞의 행정안전부 보도자료.
  6. 「비극은 평화와 만나야 한다」, 『한겨레21』 1204호(제주4·3 70년 특집호), 2018.3.26.
  7. 「제주4·3 희생자 ‘위자료’ 지원…액수·지급범위 등 과제 많아」, 한겨레 2021.3.8.
  8. “비극은 길었고, 바람만 불어도 눈물이 날 만큼 아픔은 깊었지만 유채꽃처럼 만발하게 제주의 봄은 피어날 것입니다. (…)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추념사, 제70주년 4·3 추념식(2018.4.3.).
  9.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는 2002년 헌법재판소 결정문에 명시된 “희생자의 범위에서 제외되어야 할” 사례를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간부’와 ‘무장대 수괴급 등’으로 완화해 ‘희생자 심의·결정 기준’을 확정했다. 『화해와 상생: 제주4·3위원회 백서』, 2008, 167~68면.
  10. 조선일보 사설 「가해자와 희생자를 구분하지 않은 여순사건 특별법」, 2021.7.1.
  11. 조선일보 사설, 같은 글.
  12. 4·3특별법 2조는 ‘제주4·3사건’을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그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정의한다.
  13.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전부개정법률안(의안번호:2102388), 2020.07.27. 발의.
  14. 「오영훈 의원, 4·3 특별법 어떻게 되고 있나?」, 제주도민일보 2021.1.11.
  15. 양조훈 「우리는 또다시 해냈습니다」, 제민일보 2021.3.2.
  16. “정부 쪽에서 난색을 표했습니다. ‘정의부터 다투게 되면 끝이 없을 것이다’라며 지레 겁을 먹고, 정의 작업에서는 우리가 후퇴를 감수했다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재승(건국대) 교수의 ‘제주4·3특별법의 역사적 민주성’(‘육지사는제주사름’ 주최, 2021.3.27.) 강연에서의 발언.
  17. 제주4·3희생자유족회 성명서, 2021.2.26.
  18. 「‘ 73년의 한’…특별법 의미와 과제」, 매일경제, 2021.6.30.
  19. 「보상 길 열린 ‘노근리 사건’ 유족 “치유 늦었지만 환영”」, 한겨레 2021.9.30.
  20. 「‘제주 4·3’ 피해자, 2022년 국가 배·보상 받는다」, 한국일보 2020.12.15.
  21. 2022년 1월 4일 국무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 발언. 「문재인 “4.3특별법 공포…70년 만에 정의실현 다행”」, 제주의소리 2022.1.4. 참조.
  22. 정부는 “균분 지급 방안은 4·3사건이 70년 이상 지난 사건임을 감안할 때, △소득증빙 곤란 △임금통계의 정확성 미흡 △차등지급으로 인한 공동체 갈등 우려 △집단 희생 보상을 통한 공동체 회복이라는 입법취지를 고려하고, △희생자 및 유족의 의견을 존중한 결과”라고 밝혔다. 앞의 행정안전부 보도자료 참조.
  23. 4·3특별법 전부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자축하기 위한 ‘제주4·3특별법 개정 도민 보고대회’가 2021년 3월 5일 제주시 관덕정에서 열렸다. 이날 행사의 말미에는 ‘제주4·3특별법 개정 만세!’ ‘자랑스런 제주도민 만세!’ ‘정의로운 대한민국 만세!’와 같은 구호가 제창됐다.
  24. 「소병철 의원, 여순사건법 제정 이어 시행령 마련 분주」, 국민일보 2021.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