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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평

 

 

사이토 고헤이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다다서재 2021

탈성장 꼬뮤니즘에 대한 반가움과 아쉬움

 

 

김현우 金賢雨

탈성장과대안연구소 소장 nuovo9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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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또오 코오헤이(齋藤幸平)는 신간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人新世の「資本論」, 2020, 김영현 옮김)을 통해 ‘인류세’ 시대에 자본론이 갖는 적절성을 말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본론 이후 맑스 다시 쓰기를 통해 지금의 복합적 위기를 돌파할 대안으로 탈성장 꼬뮤니즘을 주장한다. 지속가능한 성장이란 없으며 기후위기는 자본주의의 종언 없이는 해결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용감하고 명료하다. 맑스의 후기 저작에서 생태주의의 자원들을 발굴한 2017년 저작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Karl Marx’s Ecosocialism, 두번째테제 2020) 이후 그가 최근의 기후정의운동과 탈성장론의 여러 갈래를 매우 개방적으로 수용한 것이 놀랍고 반갑기도 하다.

맑스에게서 생태주의의 단초들을 확인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서, 이 책에서 사이또오는 탈성장이라는 대안이 맑스의 꼬뮤니즘에 내재해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런 생각에 도달하게 된 배경에는 인신세(人新世), 즉 인류세라는 시대 규정까지 요구하고 있는 기후변화 상황이 있다. 물론 현 체제도 생태위기에 대해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같은 그린워싱과 기후 케인즈주의 같은 해법을 내놓고 있지만, 그가 보기에 탈성장 없이 이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는 주장은 기만일 뿐이다. 그렇다면 갈 길은 분명하다. 탈성장을 인식론과 정책 모두에서 중요한 수단으로 하는 꼬뮤니즘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대체하는 것, 그리고 기후정의라는 지렛대로 이 대안을 힘차게 들어 올리는 것이다.

사이또오의 주문처럼, 실제로 지금 기후정의운동은 기후변화의 원인 진단과 해법 모색 모두에서 자본주의체제와 그 한 축인 성장주의에 주목하면서 탈성장 이론 및 운동과 교집합을 키우고 있다. 이에 대해 사이또오를 포함한 좌파 일각에서는 환영과 공명의 태도를 보이지만, 한편에서는 또다른 입장이나 분위기도 감지된다. 말하자면 탈성장 이론과 운동이 기존 좌파 운동의 호소력을 약화하거나 과제를 흐리게 할 수도 있다는 경계심이다. 이런 반응이 나오는 이유는 몇가지로 설명이 가능할 것 같다.

우선 역사적으로 적대적인 맑스(주의자)와 맬서스(주의자) 사이의 관계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강제적 산아제한부터 빈민층을 돕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까지 가혹한 논리로 이어졌다. 경제적 비극과 모순들이 자원이나 생산의 총량이 아니라 계급과 권력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맑스주의 입장에서는 절대 동의할 수 없는 견해였다. 하지만 1972년 로마클럽의 「성장의 한계」 보고서부터 최근 요한 록스트롬(Johan Rockström)의 ‘지구 행성적 한계’ 개념에 이르기까지 자원과 자연의 한계라는 인식은 어떻게든 다시 등장하고 있으며, 기후위기 자체가 이에 대한 재론을 불가피하게 한다. 사이또오 역시 이 책에서 녹색 성장주의를 비판하며 지구 한계를 우려하고 있다.

둘째, 구 소비에트 블록과 서방 사이의 체제경쟁이다. 세계가 양대 진영으로 나뉠 때부터 사회주의 조국의 경제력은 자본주의를 이길 수 있는 상징이고 수단이었다. 성장이라는 과제 앞에서 사회주의 진영은 기술적 수단에 대해서도 주의 깊은 접근이 어려웠다. 가령 유로꼬뮤니즘의 공산당들은 앙드레 고르츠(André Gorz)가 ‘닫힌 기술’로 꼽은(226~27면) 핵에너지 활용도 옹호했다. 제3세계의 빈곤과 제국주의의 억압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도 어쨌든 다른 원리의 사회주의적 경제 발전이 필요하다는 게 많은 혁명가들의 생각이었다.

셋째, 맑스주의의 역사발전 법칙과 혁명론의 영향이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속에서 역사가 발전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생산력 자체를 제한한다는 발상은 애초에 자리 잡기가 어렵다. 생산(이는 성장과 구별되지 않는다)의 주역이자 해방의 심장인 노동자계급이 주도하는 대중 봉기는 실제 역사에서 매우 드문 경험이었지만 맑스-레닌주의 정치의 가장 강력한 모델이 되었다.

넷째, 맑스주의 이론의 미발전으로 좌파들이 탈성장을 오해 또는 적대하게 된 점도 있을 것 같다. 사실 맑스 자신의 이론과 넓은 맑스주의 조류 속에서 발전한 연구와 실험에는 탈성장론과 일치하는 점이나 생산적인 대화가 가능한 것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사이또오는 맑스가 『자본론』을 비롯한 후기 저작들에서 리비히(J. Liebig) 같은 당대 농화학자들의 이론에 주목하면서 자본주의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대사”에 “고칠 수 없는 균열”을 낳으며, 이를 시장 개척이나 기술 개발로 극복하려 하지만 모순은 해결되지 못하고 지연시키게 된다고 보았음을 강조한다(158~66면). 최근 사이또오가 이 ‘물질대사 균열’ 개념에 주목하여 지금의 생태위기 설명을 보완하는 것은 맑스주의와 탈성장론 사이의 거리를 극복하는 좋은 사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궁금하거나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들도 있다. 우선, 여전히 맑스의 저작에서 생태주의의 조각들을 발굴하여 복원하는 게 중요하거나 필수적인지에 대해 충분히 동의하기 어렵다. 맑스에게서 알뛰세르(L. Althusser)가 말한 것과 같은 분명한 ‘인식론적 단절’ 같은 게 있었는지 의심스러울 뿐 아니라, 사이또오가 말하는 단절은 알뛰세르와 반대 방향이다. 즉 알뛰세르가 인간주의적 맑스에서 과학적 맑스로 이동했다고 보는 반면, 사이또오는 과학적(생산주의적) 맑스에서 탈성장과 공동체의 맑스로 이동했다고 본다. 게다가 사이또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맑스 자신이 체계적인 저술로 정리하지 않은 ‘생태주의자 또는 탈성장론자로서의 맑스’가 말년의 맑스를 온전히 규정할 수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더 중요한 것은 맑스의 이론으로 현재의 위기와 문제들을 모두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이다. 21세기의 맑스주의 연구와 운동은 위축되었고 대안체제의 이론화는 부진했다. 이와 함께 기후위기와 같은 구체적인 현상과 현실 과제에 대한 탐구도 답보했다. 반면에 맑스주의 자장 바깥의 탈성장 이론과 운동에서 자본주의 비판과 대안을 위한 연구와 실험들이 축적되어왔다. 지구의 행성적 한계와 2차대전 이후 ‘대가속’을 설명하는 데 맑스의 이론적 자원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의구심이 남는다.

사이또오가 주장하는 ‘탈성장 꼬뮤니즘’은 맑스가 못다 이룬 유언이라기보다는 맑스가 행한 작업의 틀을 뛰어넘는 생태사회주의 또는 생태맑스주의의 공동 프로젝트로 보아도 좋은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은 사이또오가 다른 탈성장론자, 생태사회주의자들에게 내리는 상당히 비판적인 평가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과도 관련된다. 그는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와 세르주 라뚜슈(Serge Latouche) 같은 ‘구세대’ 탈성장론자들이 자본주의 비판을 회피한다고 비판하며, Z세대와 접속하는 새로운 세대의 탈성장론과 구별한다(2장). 그러나 이는 탈성장론의 스펙트럼을 상당히 단순화하고 새로운 탈성장론의 새로움을 다소 과장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예를 들어 그가 비판의 날을 유보하는 고르츠와 이후의 탈성장론자들인 라뚜슈, 제이슨 히켈(Jason Hickel) 그리고 안드레아스 말름(Andreas Malm) 등의 논의 사이에 어떤 결정적인 차이나 단절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요컨대 그가 생태사회주의의 여러 조류들을 비판하는 방식은 너무 일면적이고 단정적으로 여겨진다.

오래전부터 생태사회주의의 현실정치화를 위해 노력했던 마이클 뢰비(Michael Löwy)는 생태사회주의와 탈성장 이론 및 운동 사이 몇몇 지점에서는 의견이 다르더라도 적극적인 동맹을 제안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이또오 코오헤이의 논거와 주장에 대한 가감 없는 비판과 더불어 적극적인 천착이 기후위기 시대의 정치에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