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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초점
레고의 세상 밖으로
손보미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모든 것의 석양 앞에서: 지금, 한국소설과 ‘현실의 귀환’」이 있음. netka@hanmail.net
단편미학을 좌우하는 핵심이 발견의 개성에 있다면 신진작가 손보미(孫寶渼)는 전도유망한 단편작가다. 그것은 전적으로 그가 발견해낸 세계의 독자성에 힘입고 있다. 설령 그가 도달한 세계의 연안이 앞선 누군가의 발자국들로 어수선해져 있다 하더라도 그만큼 뚜렷하게 새겨진 발자국은 어차피 드물다. 그는 오로지 스스로의 감각과 지각에 의존해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은 질서’를 발견하고 기록함으로써 낯선 조화와 새로운 개연성의 체험으로 독자들을 안내하고 있다.
그 새로움은 그러나 세계 자체의 새로움이 아니다. 가령 「폭우」나 「여자들의 세상」 「육인용 식탁」 같은 수록작에 그려진 ‘중산층적 삶의 미세균열’만 하더라도 그 자체로선 선행 텍스트들의 재조립에 불과한 테마이다. 손보미의 작품이 미국 포스트모던 소설의 번안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거나 문장이 번역체를 닮았다는 등의 지적은 그래서 설득력을 얻는다. 그는 단지 선행 텍스트들을 한 무더기의 레고 블록처럼 매만지고 조립하거나 해체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핵심은 이 ‘레고 블록’을 대하는 작가의 독특한 태도에 있다. 그는 이들을 마치 ‘자연’처럼 배치한다. 글자 그대로의 자연이 논평이나 가치판단의 대상이 아니듯 그는 자신의 소설적 재료에 개입하길 주저한다. 그것들은 자신의 인공적 태생을 망각한 채 마치 처음부터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이를테면 풍경처럼 존재한다. 1인칭 시점을 사용할 때조차 3인칭적인 거리감을 발생시키는 문체나 가장 중요할 수도 있는 대목에서 문득 서술을 멈춰버리는 특유의 작법이 모두 이러한 태도와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이 소설집의 입구와 출구를 감싸고 있는 작품 「담요」와 「애드벌룬」에서 가짜 록밴드 파셀(Parcel)의 공연장 사고와 역시 가짜 소설인 『난, 리즈도 떠날 거야』를 반복 변주해 등장시키고 있는 것은 소설집의 이러한 구성 원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암시하는 장치다.
‘자연의 재현’이 아닌 ‘재현의 재현’을 창작원리로 전유하는 작가는 손보미 외에도 많지만 인공 재현물로 이뤄진 세계를 삶의 근본조건으로 받아들이되 그만큼 성공적으로 내면화한 경우는 아직 흔치 않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화한 텍스트들로 만들어진 세계는 본래의 자연이 그렇듯 무정하다. 이 무정한 매트릭스의 세계에 자신을 위치시킨 자들은 고독과 불안을 살 수밖에 없는데, 손보미가 그리고 있는 우리 시대의 곤경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은 듯하다. 요컨대 그는 우울증자의 편에 서 있다. 우울증자의 눈앞에 나타나는 세계는 개입의 여지가 없는 속수무책의 세계다. 「침묵」의 주인공인 포르노 번역가가 “신음소리가 이 세계의 전부”(65면)라고 말하거나 「담요」의 화자가 “인생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는 거야. 살아봤자 별거 없어. 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겪어본 사람들, 문자 그대로 혼자가 되어본 사람들은 감히 그렇게 말하지 못한다”(12면)라고 경계하는 것은 그래서 가능해진다.
따라서 이 무자비한 우울의 중력 또는 무정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열망이 린드버그의 대서양 무착륙 단독비행에서 유래한 춤인 린디합(Lindy hop)이나 애드벌룬 같은 상승 모티프로 표현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비상을 꿈꾸는 이 끊임없는 시도들은 불완전하다. 「담요」의 어린 부부가 앉아 있던 놀이터 그네처럼 언젠가는 바닥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작가는 이 불가능한 시도들 앞에 위로의 담요 한장을 건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린디합을’은 ‘우울한 세상에 위로를’과 다르지 않다. 가짜 록밴드의 이름 ‘파셀’은 선물꾸러미란 뜻이다. 차갑고 무정한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은 오직 서로에게 건네는 한 줌의 위로(선물)뿐이라는 듯이 말이다.
자연화하는 텍스트의 세계를 그에 걸맞은 구성과 문체로 긴밀하게 조직하면서도 그 가운데 음화처럼 드러나는 시대의 우울에 깊이 공명하고 있는 이 소설집은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태로운 곡예처럼 보이기도 한다. ‘진짜 현실’이라고 불리는 무언가가 오히려 하나의 가상일 수 있다면 자연화하는 텍스트의 세계 또한 얼마든지 상대화 가능할 것이다. 거기에 개입하지 않은 채로 우울의 중력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라면 「과학자의 사랑」 말미의 한 문장을 우리 모두를 위한 경계로 읽는 것도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 지역은 천분의 일 밀리미터에 불과한 크기이지만 문자 그대로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주는 공간임과 동시에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위험한 공간이기도 하다.”(189면) 이 예민한 작가의 등 뒤에 남겨진 천분의 구백구십구는 어떤 모습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