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조금 더 나은 모습의 2022년을 기대하며
▶ 코로나가 이렇게 길게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게 되리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연말 분위기라고는 느낄 수 없던 2021년 마지막 주말, 성당을 찾아 봉헌초를 켜고 소중한 사람들의 무사를 빌었다. 겨울호의 ‘책머리에’를 읽으며 대선 국면 등 사회의 많은 부분이 어지럽고 실망스러운 상황이지만, 『창작과비평』만큼은 여전히 시대를 고민하고, 탐색하고, 나아가려는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묵직한 잡지를 열심히 읽으며 조금 더 나은 모습의 2022년을 상상하는 힘을 길러보고자 한다.
어떤 이야기는 ‘남 일 같지 않다’라는 생각이 들어 읽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김애란의 「좋은 이웃」이 딱 그랬다. “젊은 시절,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었는데 요즘은 자꾸 ‘재산’을 지키고 싶어집니다”(193면)라는 문장이 기억에 남는다.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은 게 보통의 마음이다. 그런데 살다보면 좋은 마음이 되지 않을 때가 있고, 그 때문에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자각까지 겹쳐 더욱 씁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좋은 마음으로, 좋은 사람으로 감당할 수 있는 한계선에 대해 늘 생각하곤 하는데, 주인공이 마지막에 느낀 복합적인 기분을 잘 알 것 같았다.
논단의 「언론중재법 개정안의 현안과 미래」를 읽으며 정준희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한다. 가짜뉴스나 잘못된 보도로 피해를 봤을 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니까 괜찮다’라는 위로는 통하지 않는 말이다. 누구나 볼 수 있는 기사에 근거 없는 이야기가 쓰이는 건 심각한 범죄나 다름없다. 큰 자유와 힘에는 큰 책임이 수반된다는 말이 있는데 우리 사회의 언론이 그만한 책임감을 보여주고 있는가, 그만한 책임감을 가지고 자유를 주장하고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 모두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성진동 oinkhoney@naver.com
때로는 예리하게, 때로는 포근하게
▶ 지난호의 대화를 짧게 평하자면 ‘쏙쏙 이해가 되는 특강’이다. 참여자 중 천현우가 한국사회를 ‘성’과 ‘평야’로 비유했을 때는 너무나 딱 들어맞아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불평등을 겪을 때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넘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지하철이 집 앞에 없다는 것, 원하는 교육을 집 가까이에서 들을 수 없다는 것, 따스한 햇빛을 누릴 수 없다는 것 모두 불평등인데 말이다. 내가 사는 동네도 수도권이지만, 원하는 교육을 듣기 위해서는 집에서 한시간 반 떨어진 서울로 가야 한다. 불평등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서울에 뭐가 많으니까, 우리 동네에 그런 게 생길 리 없으니까’라고 불평등을 합리화해온 게 내 모습이었다고 생각하니 약간은 충격적이기도 하다. 사회적으로 특히 젠더 불평등이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최근에는 코로나 때문에 여성 취업률이 상당히 하락하기도 하고,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승진이 안 되는 경우는 이전부터 흔했다. 오죽하면 여성이 사내 이사를 몇년 만에 맡게 되었다는 소식이 기사로 날까. 그렇게 화제가 되면 그 기업은 ‘여성친화’기업이라는 칭호까지 받는다. 이번 대화를 통해 스스로의 불평등을 정확하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과 함께 사회 여러 요소들과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불평등 담론을 전반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어서 의미있었다.
작가조명도 따뜻하게 포근하게 읽었다. 인터뷰 현장의 부드러운 분위기가 느껴지는 글에서 작가의 심지와 성격이 잘 드러났다. 세상엔 자신의 외로움을 잘 다스리고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단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최진영 작가가 꼭 그렇다고 느껴졌다. 그의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를 읽었을 때도 상처를 덮어놓거나 피하지 않으면서 고통을 담담하게 발화하는 ‘제야’의 모습이 좋았다. 작가의 삶과 닮아 있으면서 인물들의 개성이 살아 있는 그의 작품을 더 많이 읽어봐야겠다.
전은영 ey_19@naver.com
공부하고 싶어지는 지난호
▶ 특집 글들을 읽으면서 과도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르려’ 애쓰는 개인들의 모습은 공격받지 않기 위해 방패를 탑처럼 쌓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 안다는 확신 없이는 선뜻 의견을 말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한국인의 모습같이 느껴진다는 이야기이다(물론 나도 그 ‘전형적인 한국인’에 속한다). 이야기의 중심을 공동체가 아니라 ‘나’로 축소시키려는 경향도 비슷한 맥락에서 짚을 수 있지 않을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땐, 아무튼 내가 그러하다는 것이니 공격받을 여지가 적어진다. 그러면서도 역설적으로 타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기 때문에 ‘타인’이라는 개인에 대한 글이 많이 읽힌다. 공동체에 대한 논의는 대체로 학계에만 머무는데 그러면서 점점 학문을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과는 동떨어져가는 느낌이다. 같이 나아가기 위해서는 언어의 장벽을 좀더 낮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유튜브든 웹툰이든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겠다.
지난 가을호의 특별좌담을 읽으며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는 동학사상을 깊이 알게 되어 충격적이었는데 겨울호의 정지창 글을 읽으면서 동학사상이 한층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지금 시대의 주류적 시각이 병폐를 낳고 있음이 분명한데도 제대로 된 논의를 전개하지 못하며 겁만 내고 있다가는 지난호의 최정화 소설 「벙커가 없는 자들」이 그리는 미래로 흘러가게 될지 모른다. 오랜 고민으로 쌓아 올려진, 그리고 자본주의에 기생하지 않는 동학사상에 대해 더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그외에도 박상영 소설에 대한 이해를 깊이 해준 문학초점을 비롯해 읽고 싶어지는 책이 가득한 촌평도 유익했다. 『창작과비평』에 소개된 내용을 공부하고 여러 책들도 읽고 나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더 깊어지지 않을까 기대된다.
방명주 audwn5599@naver.com
문학의 정치,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실천’
▶ 겨울호 특집은 ‘문학, 정치, 민주주의’라는 주제 아래 문학과 정치의 연결성을 바탕으로 문학적 재현에 있어서 고민해야 할 문제는 무엇인지, 지금 작가들은 어떤 방식으로 그 난관을 극복하고 있는지를 심도있게 들여다본다. 황정아의 글에서는 이분법적 구조로 안과 밖을 “협소하게 규정”할 때 “‘정치적으로 올바른’ 문학에 속박당할 위험”(20면)이 있다고 말한다. 조직화된 프레임은 필연적으로 또다른 배제를 낳기 때문이다. 당사자로부터의 일인칭 글쓰기가 가진 “정치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정당하다’는 논리가 작동할 위험”(29면)성도 지적한다. “세상의 ‘앓는’ 주체가 결코 연약한 주체만은 아니며 돌봄이 필요한 주체는 다소간 이미 스스로 돌보는 주체임을 기억해야 한다”(34면)는 황정아의 글을 읽으며 주체가 가진 다면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과 주체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의 고민, 협소한 개인에 한정되지 않고 개인을 둘러싼 ‘관계’까지 집중해야 하는 것 등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글과 얼마간 맞닿아 있는 강경석의 글은 일인칭으로 진실을 재현하려는 것보다 재현을 통해 진실이 드러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정된 자아의 자기애가 불러오는 나르시시즘을 경계하며, 부러 말하는 데 중점을 두기보다 관계를 충실히 ‘재현’함으로써 감지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영화 속에서 수동적으로 그려지곤 하는 피해자로서의 아이의 얼굴을 새로 그려보는 시도인 이나라의 글도 흥미로웠다. 특집 글 세편을 읽으며 문학의 정치라는 차원의 고민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충분히 의미있는 실천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다양한 작품들을 깊이있게 들여다보는 분석을 통해 올바른 재현을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치적으로 윤리적으로 올바른 문학이란 무엇일지 고민하며 내 것으로 새기는 일만큼이나 이러한 고민을 작품으로 직접 실현하는 일의 어려움도 느껴졌다. ‘나’와 연결된 존재들에 대한 사유를 놓지 않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박은혜 eunhye182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