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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문명전환의 세계감각과 문학

 

(비)인간의 자리로부터

 

 

전기화 田己和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황정은 다시」 「부풀어 오르는 모녀서사」 등이 있음.

octobervoice@naver.com

 

 

더 많이 알게 될수록, 모든 것이 낯설어진다(혹은 아마 더 친숙해진다).

—제이슨 히켈 『적을수록 풍요롭다』(김현우·민정희 옮김, 창비 2021) 363면

 

2022년 현재 우리는 기후위기에 관한 경보가 어느 때보다도 크게 들려오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며,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삶을 2년여간 지속해오고 있다. 너무나 거대하고 압도적인 층위에서 진행되기에 오히려 잘 수신되지 못하던 위기의 경보는 전염병의 대유행과 함께 보다 명료하게 와닿을 수 있었던 듯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들로부터, 동물과 바이러스와 같은 비인간들로부터, 그리고 지구 생태계를 포함한 물질적 환경으로부터 단 한번도 분리된 적 없는 다분히 취약한 존재이자 다른 존재들과 뒤얽혀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며 ‘인간’에 관한 이해가 근본적으로 재편되는 흐름 가운데, 비인간에 대한 문학적 재현 또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금 한국문학의 가장 뜨거운 담론적 흐름 역시 ‘인간’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는 듯하다.1 동식물과 사물을 포함한 다양한 비인간 존재들을 낯설게 감각하며 인간을 물질세계 안에 재배치하고 포스트휴먼 담론을 적극적으로 껴안는 흐름이 있는 한편으로, ‘보편적 인간’의 범주에서 누락되어온 ‘몫 없는 자들’을 견인하여 사회적 차별과 혐오의 문제를 직시하고 인간의 범주를 끊임없이 재조정하려는 시도 또한 꾸준하게 이루어지는 중이다. 일견 관점의 차이를 지니는 듯 보이는 두 흐름이 실상은 별개의 것이 아니며, ‘문학적 재현이라는 몫’ 혹은 ‘문학적 발언권’을 거의 누리지 못했던 존재들에게로 확장하는 방향성을 공유하고 있다는 날카로운 지적은 이러한 흐름들이 근원적으로는 동일한 원리에 입각하여 추진력을 얻고 있음을 드러내준다.2 이러한 시각은 2010년대 후반 현실의 정치를 향해 다시금 빠르게 근접해갔던 문학의 정치와 그 운동성을 효과적으로 포착해준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다만 그 운동성을 반성적으로 되짚고 점검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숙고해볼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의 장에서 배제되어 있던 존재들을 가시화하며 정당한 문학적 시민권을 부여하는 시도가 단지 그 자체로 ‘정치적’이라고 간주되어서는 곤란하며, 그것이 과연 어떠한 재현이며 어떠한 정치인가에 관한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는 문제제기는 물론 타당하다.3 다만 이때 ‘비판적’ 성격을 확보하는 방식에 관해서는 보다 섬세한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이를테면 그 점검이 문학적 재현을 현실과 맞대응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염려도 있기 때문이다. 문학이 현실의 무엇을 변경하고 삭제하고 왜곡했는가를 따져보며 문학의 ‘정치적인 것’을 점검하는 방식은, 자칫 문학과 현실 각각에 대한 이해를 협소화하고 문학과 현실의 관계를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데로 고착될 수 있다.

문학적 재현의 몫을 다양한 존재들에게로 확대해나가는 노력이 문학이 언제고 해오던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 반복이 지금 여기에서 일어날 때 발생하는 차이가 없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듯하다. 이를테면 비인간 존재들을 소설의 전면에 앞세우는 재현은 인간 중심의 문학적 재현에서 누락되어온 존재들을 끌어올리는 시도로 다소 단일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 지금 한국문학의 다채로운 시도를 동일한 원리로 환원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 및 형식상의 다양성이 간과될 수 있는 것이다.

더불어 문학적 재현을 통해 발생하는 효과에 대해 더 세심하게 살피는 방식으로 논의를 심화시킬 수도 있을 듯하다. ‘비가시화된 것의 가시화’는 문학적 재현의 작동원리를 지칭하기도 하지만, 그 재현을 통해 수행되는 효과까지 내포한 개념이다. 가시화는 그 자체로도 효과로서 인준될 수 있으나, 그 가시화를 통해 다시금 어떠한 효과가 수반되는지까지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지금 한국문학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 새로운 이해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동시대 한국소설들에서 허구의 식물과 외계인, 유령 등 가상의 비인간을 재현하는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어지는) 가상적 존재들에 대한 문학적 재현은 ‘가시화’나 ‘성원권’을 중심으로 한 이해로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종류의 수행성을 발휘하는 듯 보인다.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드러난 것과 잠재된 것을 오가며 그 경계를 흐리는 이러한 시도는 문학과 현실을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독법을 흔들고 문학과 현실 간의 새로운 관계성을 구성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식물과 사이보그, 외계인, 유령 등 가상의 비인간을 다루는 소설들을 통해 인간의 자리를 거듭 재고하도록 이끄는 문학의 수행성으로 눈길을 돌려보려 한다. 이러한 소설은 한국소설의 다양한 흐름 가운데 일부일 뿐이지만, 이를 통해 우리는 지금 한국문학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덧붙여볼 수도 있을 것이다. 땅에서 자라나 지구인과 섞여 살아가는 ‘외계 생명체’와 한때 인간이었으되 이제는 인간이 아닌 유령의 이야기는 인간 독자들을 어디로 데려가는가?

 

 

식물, 사이보그, 외계인

 

근래 한국문학에서는 인간을 언제나 에워싸고 있었음에도 인간을 위한 배경이나 소재 정도로만 활용되던 동물, 식물, 지구, 사물 등의 비인간을 주목하고 그것이 지닌 생기와 역동성을 재인식하려는 흐름이 활발하다.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비물질, 자연과 사회, 현실과 가상 사이의 명쾌한 구분을 흐리는 다양한 시도 중에서도 식물이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는 양상은 특히 흥미롭다. 실상 우리는 한국문학에서 식물이 되고자 했던 인간의 이야기(한강 『채식주의자』, 창비 2007)나, 인간과 하나가 되었던 식물의 이야기를 이미 목격한 바 있다. 후자의 예라 할 정도경 단편 「씨앗」(『씨앗』, 온우주 2013)에서는 인간만을 위해 행해지는 숲의 벌목과 유전자 조작에 맞서 ‘진화’한 식물들이 인간 신체의 열린 구멍들에 씨앗을 심고 뿌리를 내려 인간과 한 몸이 되어 ‘돌연변이’로 재탄생하는 서사가 펼쳐진다. ‘우리’를 화자로 삼은 이 소설에서 ‘우리’란 회화나무, 떡갈나무, 버드나무, 오리나무, 참나무 등 다양한 수종(樹種)을 포함하는 동시에, 그 자체로 인간-식물-우리이다. 이때 소설에서 인간-식물-우리로서의 화자가 씨앗의 ‘침범’으로 발생한 변이를 “양쪽 모두에게 이로운 결합이었다”(188면)고 담담하게 진술하는 대목은 인간의 관점에서 다소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은 문학적 허용을 통해 식물의 행위성을 과감하게 증폭시킴으로써 인간과 식물이 맺는 관계를 전혀 다른 각도에서 돌아보도록 만든다. 이때 돌아보는 자의 위치는 모든 존재론적 차이들을 평평하게 만들며 관계적 복잡성을 내려다보는 신적인 위치가 아니라, 아주 작고 구체적인 씨앗에 결박된 숙주로서의 자리다.

최근 주목되는 흐름은 이를테면 「씨앗」의 방식에 가깝다고 하겠는데, 인간 외의 다양한 비인간들을 서사의 중심부에 배치하는 한편, 동물과 아주 다른 방식으로 그 생존을 모색하기에 ‘외계 생명체’4라 할 만큼 낯선 존재로서 식물을 재인식하는 데서부터 서사가 뻗어나가기 때문이다. 식물종의 생존방식을 들여다봄으로써 그간 심상하게 지나쳐온 식물 고유의 역능을 새로이 감각하고 일상적으로 마주쳐온 식물을 ‘외계 생명체’처럼 바라보게 되는 것, 그것은 인간이 비인간과 맺어온 관계를 다른 각도에서 낯설게 바라보도록 촉구하는 SF와 판타지의 시선을 통해 구현된다.

김초엽의 장편소설 『지구 끝의 온실』(자이언트북스 2021)은 인간이 만들어낸 재난인 ‘더스트 시대’가 2070년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종식된 이후 약 60년이 흐른 시점을 상정하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서사다. 2129년 ‘해월’ 지역에 ‘모스바나’라는 더스트 시대 후기의 우점종 덩굴식물이 급작스럽게 증식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소설은, 22세기의 시점에서는 과거가 되어버린 더스트 시대의 진실을 거슬러 탐사하는 구도를 취한다. 그리고 이 탐사 과정은 모스바나와 사이보그, 인간, 공동체, 정치, 기술, 환경 등의 다양한 행위소 간의 복잡한 얽힘을 충실하게 드러낸다. 징그러울 만큼 거대한 군락지를 형성하는 덩굴식물 모스바나는 소설에서 단순히 분위기 형성을 위한 요소 정도로 활용되지 않는다. 사이보그에 의해 개량된 식물종으로서 모스바나는 더스트 폭풍으로부터 인간을 구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농작물을 말려 죽이기도 하며, 더스트 시대 종식 이후에는 ‘악마의 식물’이라는 악명으로 불리다가도 ‘구원자 식물’로 상찬되기도 한다. 인간들의 오해와 이해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경의 제약에 적응하고 생존하며 자신의 영역을 확보해나가는 모스바나는 무언가의 비유로서가 아니라 식물종 자체로서 서사 내에서 존재감을 존중받는다.

인간과 비인간이 복잡하게 얽힌 양상을 드러내면서 다양한 비인간 행위소들이 인간의 기대와는 무관하게 존재하는 양상을 부각하는 이 소설에서,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과 사변적 실재론의 ‘어른거림’을 읽어내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5 그러나 이렇듯 지적인 접근을 통해 모스바나의 행위성이 소설에 적실하게 기입되는 것과는 별개로, 덩굴식물 모스바나의 정동적 존재감이 충분히 발휘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지적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6 이는 소설이 택한 접근법에서 비롯된 필연적 결과로도 보이는데, 다양한 행위소들의 네트워크를 촘촘하게 엮어가는 가운데 모스바나 또한 서사 내에서 하나의 행위소로서, 덜하지도 더하지도 않게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모스바나의 존재를 인간에 의해 인식되고 경험되는 대상으로만 제시하지 않으려 한 의지의 관철로도 읽히지만, 이미 인지적 기울기가 인간을 중심으로 현격하게 기운 세계에서 인간중심주의적 색채를 걷어내며 평형을 만드는 방식으로 비인간에 깃든 기이하고 생생한 활기를 포착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7 소설의 주 초점화자인 ‘아영’이 해월을 방문하여 모스바나 군락지를 처음 목격하면서 느낀 기묘함이나, 모스바나가 무서운 생명력으로 텃밭을 잠식해가는 광경을 보고 ‘나오미’를 비롯한 프림 빌리지의 사람들이 일으킨 동요는 대단히 간결하게 기술될 뿐이다. 모스바나가 촉발하는 정동에 관해 충분한 서술이 할애되지 않음으로써,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모스바나의 넘실거리는 생기에 저항·굴복하거나 매료되고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동시에 사로잡히는 등 역동적인 미학적 체험을 통과하기 어려우며, 모스바나라는 행위소를 포함한 전체적인 관계망을 먼 거리에서 조망하게끔 위치 지어진다. 모스바나의 잎과 줄기, 뿌리가 곤충과 동물 같은 다른 비인간 존재에게는 어떻게 움직이며 감응하는지도 재현되지 않은 채 남겨진다.

그 대신 소설은 모스바나를 만들어낸 사이보그 ‘레이첼’의 입을 통해 “동물을 과대평가하고 식물을 과소평가”하는 등 ‘피라미드형 생물관에 종속’된 인간들의 인지편향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식물들은 동물이 없어도 얼마든지 종의 번영을 추구할 수 있”(364~65면)다는 명료한 판단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택한다. 실상 우리는 작가의 전작 「오래된 협약」(『방금 떠나온 세계』, 한겨레출판 2021)에서 이와 유사한 판단을 이미 확인한 바 있다. 생각하고 말하며 감정까지 느끼는 지성체로 재현된 식물종 ‘오브’가 인간 개체들에 대해 ‘환경에 취약하고 지극히 생태 의존적인 생물’이라고 판단 내리는 장면에서 발생하는 전도(顚倒)는 자립적 개체라는 인간에 대한 환상을 가볍게 부순다. 인간에게 연민을 베푸는 시혜자로서 오브의 위치를 표면화하고 오브에게 구체적인 목소리를 부여하면서 소설은 식물에 대한 인간의 착취가 실상 식물에 대한 인간의 절대적 의존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대수롭지 않게 드러낸다. 그리고 『지구 끝의 온실』에 이르러 이 진실은 인간의 반성이나 인격화된 식물에 의한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라, 인간과 식물의 관계를 바라보는 사이보그 과학자 레이첼이라는 제3의 존재에 의해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지구 끝의 온실』에서 진정 주목되는 점은 식물의 역능에 대한 재현보다는, 인간들이 당연하게 전제하는 믿음과 가치로부터 거리를 두고 이를 관조하는 레이첼의 낯선 시선이 지속적으로 개입한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인간의 기대와는 영 어긋난 방식으로, 세계에 대한 자신의 고유한 이해를 관철시키며 움직이는 이 ‘낯선’ 사이보그의 형상은 독자들에게 인간이라는 종과 거리를 두어볼 것을, 인간이라는 종을 낯설게 여길 것을 거듭 촉구한다.

인간과 식물, 그리고 외계인이라면 어떨까? 천선란의 장편소설 『나인』(창비 2021)에서는 식물종과 각별한 친연성을 지니는 외계 종족 ‘누브’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8 평범한 열일곱살 고등학생으로 살아가던 ‘나인‘은 어느날 손끝에서 새싹이 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이 초거성 리겔 근처에 있던 행성이 수명을 다해 수백광년 떨어진 지구까지 이르게 된 누브족 외계인이라는 사실과 마주한다. 누브족은 손가락에서 싹을 틔우며 그것이 땅에 뿌리를 뻗고 자라다 꽃을 피우게 되면 뿌리째 뽑혀 지상으로 나와 살아가는 종족이다. 소설은 나인을 중심으로 ‘박원우’라는 고등학생의 실종사건을 추적해가는 구성을 지닌다. “엮이면 피곤해져”(127면)라는 누브 동족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나인은 엮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박원우의 주검이 묻혔을지 모르는 땅에서 죽어버린 식물들을 외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인 자신이 그 수가 점점 줄어 ‘멸종’해가는 누브족의 한 개체로서 박원우의 죽음/멸종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인은 죽은 인간과 자신의 누브 동족들, 인간 동료들과 식물들, 인간이었던 식물, 그리고 땅 모두와 간절하게 최선을 다해 엮이며 소설은 이를 통해 비인간과 인간 행위자들이 뒤얽히는 세계를 최선을 다해 긍정한다.

소설은 이미 형성이 완료된 행위소들의 연관성을 평평하게 내려다보는 대신, 형성이 완료되었다고 전제되곤 하지만 사실은 언제고 계속 ‘생성 중’인 네트워크 사이로 개입해 들어가는 나인을 통해 그 배치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준다. 물론 그 얽힘이란 조화롭고 평화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만은 아니다. 기대와 어긋나고, 뜻밖의 변수와 함께 통제를 벗어나기도 하며, 다소간 지지부진하고, 폭력과 배제 혹은 속임수를 동반하기도 한다. 이러한 얽힘 가운데, 소설은 다양한 존재들 간에 차이가 없으며 차별도 위계도 없다고 시치미 떼지 않는다. 오히려 분명한 차이는 실존한다고, 그런데 그 차이들과 ‘더 지독하게 얽혀보고 싶다’며 용기있게 나서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이때 그 용기와 선한 의지만큼이나, 나인이 모든 식물들과 직접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비범한 능력을 지닌 존재로 형상화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누브는 식물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도 의미를 알아듣지는 못하는 이(異)종족이지만, 나인은 식물들과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며 식물들이 보여주는 것을 보고 식물들이 들려주는 것을 듣게 된다. 바로 그러한 나인의 능력을 통해 서사는 박원우 실종사건의 전말을 밝히는 것을 넘어, 가해자가 죄책감을 느끼고 다시 ‘인간’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만드는 데로 향한다.

다만 나인이 식물과 소통하는 외계 생명체라는 명시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여성 청소년의 외양을 지닌 이 존재에게서 지속적으로 ‘인간적’이라고 믿어왔던 자질을 발견하려는 충동을 멈추기는 어렵다. 소설을 읽는 동안 비인간을 가장 ‘인간적’인 존재로 위치시키고, 인간의 ‘인간됨’을 반성하려는 인간중심적 독법이 자연스럽게 장착되는 것이다. 실제로 나인의 선택과 행동을 좇는 가운데, 우리는 현실 도처에 만연한 인간의 죽음과 다양한 생물종의 멸종 문제를 반성적으로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을 덧씌우지 않고 비인간 그 자체로서 나인의 존재를 읽어내려는 독법은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인간의 죽음, 그리고 그 죽음을 감당해야 하는 남겨진 이들의 슬픔에 감응하고 이에 응답하려 하는 공감과 연대, 우애의 능력을 ‘외계성’의 범주로 이해하는 순간 발생하는 전도는 분명한 충격을 가져다주지만,9 동시에 인간이 적극적으로 짊어져야 할 책임을 가상의 영웅적 비인간 존재에게 일임하는 방식으로 그 독법이 쉽게 굴절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인간 지성체를 인간 친화적으로 재현하는 방식은 인간 편의적으로 독해될 수 있는 여지를 떠안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구 끝의 온실』과 『나인』 두 소설은 인간과 비인간이 뒤얽혀 사는 세계를 재현하는 주목할 만한 방식을 보여준다. 사이보그의 시선을 경유하여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을 메타적으로 바라보는 방식 옆에는, 이 연결 안으로 더욱 더 깊숙하게 얽혀들려 하는 외계인의 능동적 움직임을 좇는 방식도 있다.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소설은 지성체로서의 가상적 비인간 존재를 통해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물질세계를 새롭게 조명하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낯설게 인식하게 만들고, 너무도 ‘인간적’인 비인간을 통해 인간에 대한 안일한 통념이 흔들리게끔 만든다. 재난과 구원, 존재와 절멸, 삶과 죽음,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거듭 휘젓고 가로지르며 인간의 좌표를 낯설게 만들어버리는 것, 이 소설들은 그것을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인간이 인간 자신을 재인식하는 데 머물지 않고 인류세(人類世)의 현 단계에서 인간이 져야 할 책임을 적극 짊어지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인간 행위자를 더욱 두껍게 읽어내는 시각과 그것을 재현하는 방식 또한 절실해질 수밖에 없다. 이는 다시금 인간중심주의로 회귀하는 반동을 정당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책임을 환기하고 그 위에서 존중을 갖춰 비인간과 더욱 섬세하게 얽히기 위해 요청되는 것이다.10

 

 

유령, 가이드, 괄호

 

한편 물질세계를 이루는 비인간 존재들에 내재된 능동성과 생기에만 몰두할 경우 자칫 삶과 죽음, 생명과 비(非)생명이 뒤얽히는 관계에 대해서는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11 흥미롭게도 최근 한국소설에서는 죽음 이후의 존재들, 특히 다감(多感)하고 섬세한 유령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이러한 소설들은 전통적인 해원(解冤)서사와는 거리가 먼데, 산 자가 죽은 자의 한을 풀어주고 애도를 완성하면서 현실의 구멍을 메우는 데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12 이러한 소설에서 유령은 현존하지만 현존하지 않는 듯 다루어지는 존재의 은유로만 등장하는 것도 아니며, 현실에의 반성을 촉구하는 기능적 역할만을 담당하는 것도 아니다. 이들 소설은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된 구체적인 한 인간의 죽음을 다루고 있으며,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존재들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이다.

임선우의 소설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유령의 마음으로』, 민음사 2022, 이하 「커튼콜」)의 화자는 폭우와 강풍으로 인해 떨어진 중국집 간판에 머리를 맞아 사망하게 된다. 유령이 된 화자 앞에 나타난 저승사자 비둘기는 화자와 같이 급사한 존재들에게는 이승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백시간이 부여된다고 고지한다. 소설은 유령이 된 화자가 무엇을 보고 듣고 느끼는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말하고 어떻게 변하는지를 따라간다. 화자는 생전에 알던 이들을 찾아가는 대신 이곳저곳을 소요한다. 단골이었던 까페에 들러 사람들의 대화를 엿듣다 유명 가수의 내한 공연에 가려 나서지만, 지하철 역사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간 곳에서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버린 다른 유령을 만나게 된다. 잠시 다녀온 공연장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살아 있음’에 두려움을 느낀 화자는 이내 다시 청소기 곁으로 돌아오고, 또다른 유령의 도움을 받아 갇혀 있던 유령을 구조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청소기에서 빠져나온 유령 ‘이랑’이 꿈을 이룰 수 있도록 격려하는 동료이자 그 꿈을 이루는 순간의 목격자가 되어준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유령이 유령을 만나 손을 뻗고 손을 잡는 이야기이고, 죽었는데도 또 죽고 싶어하던 유령이 다시 사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는 데로 변화해가는 이야기이다. 유령에게 그 기분을 느끼게 한 존재는 생전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인간들이 아니라, 유령이 된 이후에야 만날 수 있었던 다른 유령이다. 이들은 ‘유령으로서’ 새롭게 관계 맺고 그 관계 속에서 새로운 것들을 느끼고 체험한다. 서글프지만 이상하게 설레는 방식으로, 걷는 듯 떠다니며 경계를 넓히는 유령들의 경로는 인간들의 세계에 투명한 겹 하나를 덧씌운다.

한편 김멜라의 소설 「제 꿈 꾸세요」(『창작과비평』 2022년 봄호)의 화자는 자살 기도에 실패한 뒤 사흘 만에 깨어나 “이 악물고 살아주마”(148면)라고 결심한 직후 그만 초코바에 목이 막혀 죽는다. 믿을 수 없이 아이러니한 세계에서 생의 의지가 순식간에 죽음으로 꺾여 들어갔음에도 화자는 자신의 죽음을 이내 납득하는데, 이는 그녀의 죽음에 관해 정확한 정보를 전해주는 특별한 안내자가 나타난다는 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소설의 설정에 따르자면, 어떤 죽은 사람들(소설의 표현으로는 ‘깨어난 사람’)은 살아 있는 사람의 꿈으로 들어갈 수 있는데 ‘가이드’는 그가 꿈으로 향하는 길을 잃지 않도록 돕는 존재다. 화자의 가이드 ‘챔바’는 죽음을 30초 앞둔 화자에게 나타나 죽음을 고지하고 밴조를 연주하며 「오 수재너」를 부르는 지독한 음치로, 나이와 성별은 불분명하다. 「제 꿈 꾸세요」는 화자가 ‘길손’이 되어 그와 함께 자신이 방문할 이의 꿈을 향해 길을 떠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화자는 거듭 행선지를 철회하고 행로를 변경하는데, 그때마다 화자에게 아주 중요했던 사람들 그리고 화자가 생전에 그녀들과 맺었던 관계의 구체적인 곡절이 드러난다. 화자가 누구의 꿈에 나타날지, 자신의 죽음을 어떻게 알릴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거듭 확인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삶과 죽음의 의미를 완결 짓고 꼼꼼하게 밀봉해 상대에게 건네는 일이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이다. 화자가 엄마와 ‘규희’ 그리고 ‘세모’에 관한 너무도 구체적이고 생생한 기억들을 떠올리고 그들이 자신의 죽음에 어떻게 반응할지를 고민하고 예상하는 동안 화자와 그녀들은 내내 연결된다. 그리고 그 관계 안에서 화자는 계속하여 변하고 느끼고 출렁인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산 자들의 몫이 아니라, 산 자들의 가장 여리고 취약한 부분에 대해 떠올리고 그것을 어떻게 보듬고 보살필 수 있을지 고심하는 화자의 몫이다.

그럼에도 화자의 거듭된 철회가 슬픔에 잠기지 않는 까닭은, 누군가의 꿈으로 찾아가 자신의 죽음을 알림으로써 생을 ‘오해 없이’ 완결지어야 한다는 여정의 목적을,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꿈을 만들어 함께 기뻐하겠다는 데로 슬쩍 옮겨두기 때문일 것이다. 이로써 죽음을 완결 지을 존재를 선별해야 한다는 무거운 꼭짓점은 무너지고 소설은 가이드와 길손이 함께 상상의 눈밭을 구르는 난장으로 마무리된다. 죽은 사람을 “깨어난 사람, 혹은 괄호”(152면)로 재명명하며 삶의 종착지로서의 죽음이라는 통념을 사뿐하게 비튼 위에서, 유머러스하고 솔직한 화법을 지닌 화자의 슬픈 상상력 곳곳을 헤매는 여정은 이상하게 서정적이며 아름답기까지 하다. 화자와 동행자 챔바가 함께 눈길을 걷고, 보글보글 끓는 떡볶이를 나눠 먹고, 삼각뿔 모양의 커피우유를 마시는 순간순간 그 상상력의 세계가 지닌 온기는 보존된다.

「커튼콜」과 「제 꿈 꾸세요」 두 소설에는 젊은 여성들의 삶과 죽음이 나타나지만, 이들 소설이 조명하는 것은 죽음 이후의 존재들이 펼쳐나가는 낯선 세계다. 취업준비생 여성이 소중했던 모든 것을 잃어가며 유서를 수백장 써나가던 ‘인간 시절’(「커튼콜」), 30대 무직 여성이 사람들과 단절된 채 자살을 기도했던 ‘인간 시절’(「제 꿈 꾸세요」)에 대해 소설은 간략히 기입할 뿐이다. 고립과 단절, 사회적 취약성은 그들 삶의 전부는 아니지만, 분명 삶을 구성하는 일부였다. 이러한 생애서사로부터,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신의 소멸을 수많은 방식으로 맞닥뜨리는 것, 혹은 소멸로부터 달아나는 것, 혹은 소멸을 깨닫기조차 회피하는 것”13이었다는 말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 “자신이 지워지고 실패하는 것을 즐기는 세상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일”이야말로 “거의 모든 젊은 여성이 마주치는 과제”14라는 문장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멸을 껴안고도 기어코 살아내는 일, 그것은 「커튼콜」과 「제 꿈 꾸세요」의 화자들이 우연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까지 해내던 일이다. 지원서 위에 유서를 덮어쓰면서도 생을 포기하지 않고, 자살 기도에 실패한 뒤 다시 이 악물고 살겠다고 다짐하는 이에게 실상 죽음과 삶은 결코 나누어질 수 없이 너무나도 엉겨 붙은 채 존재한다. 이들이 비교적 수월하게 스스로의 유령-됨을 수용하는 까닭은 비둘기와 챔바같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존재론적 이행을 돕는 특별한 가이드가 존재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상 그들의 삶에서 죽음이란 언제나 의식 속에 존재했기에 ‘이미 발생한 사건’이었다는 점과 무관할 수 없다.15 어떤 독자들은 이러한 소설을 읽으며 이미 자신의 삶 속에서 이질감 없이 늘 함께하고 있는 죽음이라는 문제를, 코로나 이후 급증한 한국의 이삽십대 여성들의 자살 시도율과 그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을,16 죽음과 친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소수자들의 삶의 문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을 여성 청년, 여성 퀴어에 대한 애도의 서사로 읽는 것은 분명 가능하다. 현실의 존재들이 처한 취약한 사회구조적 조건을 소설 속 화자들의 것과 결부시켜, 비가시화된 존재들이 소설의 재현을 통해 어떻게 가시화되는지 확인하고 사회적 의미를 강조하는 독법 또한 가능하며 분명 필요하다.

다만 그녀들의 이야기를 비극적인 서사로 확정하는 일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실제로 이 각각의 소설을 통과한 뒤에 느껴지는 기분이 ‘알 수 없는 따뜻함’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는 두 소설이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신, 섬세하게 세공한 환상을 현실 위에 한꺼풀 덮어두었다는 점에서 기인한다. 특히 죽은 이들의 삶의 의미를 닫아 확정하는 대신 사후의 세계에서도 계속 확장될 수 있도록 열어두었다는 점은 중요하게 고려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커튼콜」은 죽은 이를 외로이 세워두지 않고 다른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움직여지도록 만드는바, 화자가 세계를 유영하고 다른 유령을 만나며 겪게 되는 감정의 변화를 포함하지 않은 채 이 화자에 대해 논하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고 느껴진다. 한편 자신의 죽음의 경위와 삶의 이력을 오해 없이 완결하려는 의지를 철회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선사할 생각에 들떠하는 「제 꿈 꾸세요」의 화자가 애써 비워둔 ‘괄호’를 억지로 채워 넣는 것 또한 부당하게 느껴진다. 이 소설에서 화자가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기억을 건져 올릴 때마다 드러나는 그들의 취약성이 화자에 의해 보존되고 돌보아진다는 점도 중요하다. 삶이 죽음을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삶을 애도하는 것에 가까운 이 기묘한 역전은, 화자의 생전 서사가 얼핏 드러나는 순간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내려지는 판단이나 죽음과 삶에 관한 관념 모두를 부드럽게 헝클인 채 독자들을 슬프고 다정하고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마지막으로 소설에서 유령 화자들의 변화가 섬세하게 재현되고 있다는 것만큼이나, 독자들이 이러한 서사를 통과하는 가운데 유령과 함께 움직여지며 유령의 흔적을 자신에게 묻히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짚고 싶다. 소설의 마지막에 이르게 되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돌보고 싶은 마음을 유령에게서 나눠 받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이상하고 낯선 경험이기도 하지만, 이 위화감을 남겨두지 못하고 언제든 자기위안으로 소화해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령이 묻힌 흔적에 대해, 이상한 온기에 대해 계속해서 되묻지 않는다면, 우리는 소설이 끝나는 순간 서사 바깥으로 말끔하게 빠져나오며 자신이 서 있다고 믿어온 그 자리에 대해 끝내 의심하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죽은 이들로부터 기묘한 온기를 나누어받되 그것을 이질감 없이 소화하는 데에는 실패하는 것,17 어쩌면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지향해야 할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유령들과 이도 저도 아닌 상태에서 함께 머물기 위해, 그 상태를 거듭 숙고하기 위해서는, 결국 잠시 접어두었던 현실을 다시 펼쳐야만 할 것이다. 현실과 비현실,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비생명을 거듭 오가며 양자 모두와 복잡하게 관계 맺는 방식으로 읽기가 쌓아올려지고 그것이 위태롭게 유지되는 한에서 우리는 이 소설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세계와 더 섬세하게 얽힐 수도 있을 것이다.

 

 

  1. 대표적으로 김미정 「인간의 조건, 존재의 재구성」, 『뉴래디컬리뷰』 2021년 가을호 및 최근 『문학동네』 2022년 봄호의 ‘비인간’ 특집에 실린 인아영, 최진석, 강지희, 황정아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2. 황정아 「‘문학의 정치’를 다시 생각한다」,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강경석 「진실의 습격」. 같은 책 참조.
  3. 황정아, 강경석의 같은 글; 이소 「제주에서 보낸 한철: 한강·조해진·김금희의 장편소설과 ‘정치적인 것’에 대하여」, 『쓺』 14호(2022년 상권) 참조.
  4. 스테파노 만쿠소 『식물 혁명』, 김현주 옮김, 동아엠앤비 2019, 7면 참조.
  5. 강지희 「구멍 뚫린 신체와 세계의 비밀」, 『문학동네』 2022년 봄호 140면 참조.
  6. 황정아 「물질과 문학, 그리고 인간 -되기」, 같은 책 164면.
  7. 모스바나의 ‘비인격적 정동’이 생생하게 포착되지 않는 점을 아쉽게 느끼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독해에 가까울 것이다. 다만 베넷(J. Bennett)은 비인간 물질 고유의 생기를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인간중심주의에 저항하는 방법론이 될 수 있음을 논한 바 있다. 제인 베넷 『생동하는 물질』, 김수기 옮김, 현실문화 2021 참조.
  8. 이 소설의 세계관에 따르면 지구에는 ‘누브’ 외에도 다양한 외계 종족들이 지구인들과 공존하고 있으며, 실제로 『나인』의 마지막 장면은 작가의 전작 「어떤 물질의 사랑」(『어떤 물질의 사랑』, 아작 2020)과 연결되며 그 시공간적 배경을 확장한다.
  9. 관련하여 김초엽의 「공생 가설」에서 “우리가 인간성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실은 외계성이었군요”라는 대목을 떠올려볼 수도 있겠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허블 2019, 129면.
  10. 이러한 문제의식에 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고할 수 있다. 황정아, 앞의 글; 조문영 「행위자-네트워크-이론과 비판인류학의 대화: ‘사회’에 관한 논의를 중심으로」, 『비교문화연구』 27집 1호, 2021; 문규민 「물질의 행위생태학: 물(物)의 약동」, 『교차』 2호, 읻다 2022.
  11. 크리스토퍼 갬블·조수아 하난·토마스 네일 「신유물론이란 무엇인가?」(2019), 박준영 옮김, 『호랑이의 도약』(http://tigersprung.org/?p=2494) 참조. 이 글의 저자들은 신유물론의 다양한 갈래들을 나누어 살피는 가운데 생기론적 신유물론이 “삶과 죽음, 능동성과 수동성 사이의 뒤얽힌 관계들에 관해 사유할 수 없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
  12. 이미 2000년대 소설에서 전통적 해원서사와 변별되는 유령 화자들이 출현했다는 점이 주목된 바 있다. 신수정은 이러한 소설들이 ‘원한의 치유 불가능성, 원한 자체의 환기 불가능성’을 드러내며 소설의 윤리적 입장을 새롭게 창안했다고 평가했는데(「2000년대 소설에 나타나는 유령 화자의 의미: 윤성희·황정은의 소설을 중심으로」, 『한국문예창작』 46호, 2019), 이 글에서 살필 소설들이 이러한 2000년대의 경향성과 어떻게 변별되는지를 살피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13. 리베카 솔닛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김명남 옮김, 창비 2022, 15면.
  14. 같은 책 15~16면.
  15. 죽음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휴먼』, 이경란 옮김, 아카넷 2015 참조.
  16. 김보경 「실종」, 『문학과사회 하이픈』 2021년 가을호 참조.
  17. 소화불량의 메타포에 관해서는 최유미 「공생의 생물학, 감응의 생태학」, 권용선 외 『감응의 유물론과 예술』, 도서출판b 202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