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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
자본주의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최백규와 최지인이 노동과 우울을 그리는 방식에 대하여
성현아 成炫兒
문학평론가. 평론 「사랑의 파편을 의심하며 믿는 마음」, 저서 『아직 오지 않은 시』(공저) 등이 있음.
dhdlshsp93@naver.com
1. 분노 없이도
최근 젊은 시인들의 시에는 분노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 분노 이외의 다른 방식을 모색하는 움직임으로 보고 긍정할지 세계와의 대결 의지를 잃은 것으로 판단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볼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2010년대 이후 등장한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분노를 찾아보기 어려워졌다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많은 논자들이 그 원인으로 주체의 위상 변화를 꼽는다.
박상수는 ‘몰락하는 시대감각’ 속에 나고 자란 젊은 시인들이 그 감각을 체화함에 따라 시적 주체가 왜소해졌으며, 축소된 시적 주체에게는 “‘분노’와 ‘격렬한 파토스’가 스며들 여지가 별로 없”1어 무덤덤한 정서가 폭넓게 발견될 뿐이라고 진단한다. 꿈꿀 미래도, 세상에 대한 기대도 사라져 무기력해진 2010년대 젊은 시인들이 강렬한 분노를 표출하기는 어렵다는, 그 ‘불가능성’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보인다. 이후 박상수는 양경언의 비판을 일부 수용하며 “현실의 위력을 앞세우는 글은 늘 문학적 실천의 가능성과 새로운 희망에 둔감할 수 있음”2을 인정하지만, 젊은 시인들이 변화한 시대감각을 시에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는 주장은 그대로 유지한다. 그렇다면 “과연 시인은 달라진 경제조건에 조응하는 미적 감각을 드러내는 일에만 골몰하는 자들일까?”3라는 양경언의 질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게 된다.
고봉준 역시 “지금 한국시의 주력으로 평가되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분노’의 감정이 표면에 드러나는 장면을 찾기”4 어려워진 사정이 이전 세대와는 확연히 달라진 주체화 방식, 즉 주체성의 위축에서 기인한다고 해석한다. 고봉준은 분노의 부재가 결핍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며, 젊은 시인들이 세계와 마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세계와 대면하는 것일 뿐 부조리한 세계에 여전히 항거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분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노의 표출 방식이 변화한 것이라는 고봉준의 해석은 타당해 보이며 동의할 만하다. 그러나 그가 젊은 시인들이 “‘분노’라는 익숙하고 투박한 길보다 유쾌한 반란과 분열의 길을 선호”5한다고 서술하면서도 ‘선호한다’라는 술어에 담긴 능동성이 무색하게 현시대에서는 분노가 발생하기 어렵다고 판단하는 듯 보여 의문이 남는다. 고봉준은 분노란 강력한 주체성에서 발현되는 감정이기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희미해진 주체에게서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고 진단한다. 더불어 “신자유주의가 강제하는 삶과 노동의 가속화”6가 분노가 일어날 여지 자체를 없애버렸다고 이야기하며, 분노가 생기기 어려운 시대적 배경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이 전제하는 ‘주체의 왜소화로 인해 분노가 배면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는 인과는 자칫 젊은 시인들이 변화하는 주체의 위상과 시대감각을 그저 ‘수용’하고 그에 부합하는 실감을 시에 ‘반영’하는 수동적 존재로 비치게 할 위험이 있다. 개인의 고립이 시적 주체의 축소로, 열악해진 경제적 여건에 기반한 시대감각이 무기력한 시적 태도로 직결되지는 않듯, 분노라는 감정이 생겨나기 어렵게 된 현실이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 시적 경향성으로 곧바로 연결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적 경향이란 물론 시인들이 처한 환경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만, 그에 응전하기 위해 현실적 조건과 길항하며 구축하게 된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젊은 시인들이 놓인 현실의 특수성과 이에 대응하는 방식, 나아가 그 둘의 상호작용 양상까지 헤아려 분노를 선택하지 않게 된 사정을 살필 필요가 있어 보인다.
젊은 시인들이 직접적인 분노를 표출하지 않게 된 데는 분노라는 감정 자체가 불가능해졌다기보다, 자본주의에 잠식된 세계와 맞서기에 분노가 충분히 효과적인 선택지가 아니게 된 사정이 자리하고 있다. 우선 분노란 겨냥할 대상이 분명해야 하는 감정이기에 파편화된 현 사회에서는 확산되기 어려운 성질을 지닌다. 이러한 격렬한 감정의 분출은 영악해진 자본주의 앞에서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자본주의와 대적하는 일에는 몇가지 곤경이 자리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미 치밀한 방식으로 일상에 침투하여 다양한 대상들과 결탁했고 인식되기 어려울 만큼 자연화되었기 때문이다. 마크 피셔(Mark Fisher)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든다. 이는 자본주의가 “문화의 생산뿐 아니라 노동과 교육의 규제도 조건 지으며, 나아가 사고와 행동을 제약하는 일종의 보이지 않는 장벽으로”7까지 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제 자본주의는 선택 가능한 체제 중 하나가 아니라 대안 없는 유일무이한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자본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감수해야 했던 기회비용과 숱한 갈등은 지워지고 가치판단은 중단된다.
자본주의가 이데올로기로 인식조차 되지 않는 현 상황에서 자본주의를 향해 부정적 정서를 표출하는 작업은 어떤 감응도 창출해내기 어렵다. 게다가 자본주의가 초래한 극심한 불평등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도리어 그것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질서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자본주의를 향한 직설적인 비판이 오히려 자본주의는 공고하며, 혁명은 무모하고 불가능하다는 인식을 강화하게 되는 셈이다. 실재하는 불의의 세력이 비교적 선명히 눈에 보이던 시기에는 분노가 효과적인 저항의 동력이 될 수 있었겠으나 지금의 자연화된 구조 앞에서는 바위에 부딪혀 그 내구성을 증명해주는 계란 신세가 된다. 비판을 거두고 냉소로 일관하는 태도도 대안이 되기는 어렵다. ‘냉소적인 거리 두기’ 또한 “이데올로기적 환상이 지니고 있는 구조화하는 힘에 눈을 감아버리는 여러 방식 중 하나”8이기 때문이다. 체제의 결함을 명확히 인지하고 객관적 거리를 확보한다 해도 여전히 자본주의에 가담하는 상태가 된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더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생존이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리며 공동체는 위축되었다. 지금의 시인들은 자본주의와 맞서기 힘든 최악의 여건 속에 있다. 치밀해진 자본주의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영리한 방식이 필요하다. 일격을 가할 강력한 힘보다 자본주의에 포섭되지 않으면서 그것이 우연성에 기대고 있을 뿐임을 짚어내는 유연한 예리함이 요구된다. 정면으로 돌파하여 깨부술 수 없기에 오히려 세밀한 묘파 작업이 중요해진다. 꼬리를 끊고 달아나버리는 적의 꼬리를 잡고 꼬리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그 꼬리가 본디 어떤 몸체를 가졌는지 상세히 포착하는 방식이 가장 효과적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2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시집을 선보이는 최백규, 최지인에게서 그 긍정적인 움직임을 발견할 수 있을 듯하다.
2. 아버지-아들, 나란히 노동자인 이들
최백규의 시집 『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창비 2022)와 최지인의 시집 『일하고 일하고 사랑을 하고』(창비 2022)9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시집 전반에 걸쳐 ‘아버지’가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젊은 시인들의 시에서 잘 찾아보기 어려운 낡은 상징으로 인식되어왔기에 이목을 끈다. 한국 시사(詩史) 속에서 ‘아버지’는 군부독재의 알레고리로 기능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불합리한 가부장제의 수혜자로 또는 극복해야 할 기성문화의 대표자로 그려지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소환할 필요가 없어진 텅 빈 기표가 되어 외면받는 경우가 많았다. 아버지를 냉소하는 일조차 기성세대나 기존 세계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일이 되기 때문에 젊은 시인들은 그에 가담하지 않는 무심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10 특히 2010년대 중반 이후에는 그간 주체로 자리매김한 적 없었던 독자적인 ‘나’들의 목소리를 기입하는 데 시인들이 더욱 주목했으므로 아버지가 비중있게 다루어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최백규와 최지인의 시집에서는 전면에 등장한다.
최백규와 최지인의 시에서 아버지는 ‘가족을 짓밟은 사람’11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두 시인은 그런 아버지를 극복해야 할 대상 혹은 경멸의 대상으로 치환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잘못을 명확히 인식하고 기록하되, 그것이 전적으로 아버지 개인에게서 비롯된 문제는 아니라는 점도 제시하기 위해 노동자-아버지의 비참한 삶에 주목한다.
약에 취한 아버지는 실종되었고
가계부채가 늘어갔다
(…) 힘없는 자들이
입안에 독한 술을 털어 넣고
가장 아끼는 것을 박살 냈다
(…) 아버지는 부랑자였다
그는 정당한 보수를 받아본 적이 없었고
평생 일했다
결과가 어찌 됐건
그것은 왜곡되었다
—최지인 「마카벨리전(傳)」 부분
아버지는 가양동 현장에서 일하셨다
오함마로 벽을 부수는 일 따위를 하셨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
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
—최지인 「비정규」(『나는 벽에 붙어 잤다』, 민음사 2017) 부분
최지인은 아버지를 “평생 일했”으나 “정당한 보수를 받아본 적” 없는 노동자로 인식한다. “세상에는 벽이 많았고/아버지는 쉴 틈이 없었다”라는 대목은 청년세대에 비해 일이 끊이지 않는 아버지 세대의 노동환경에 대한 서술로 읽히기도 하지만,12 이는 ‘비정규’ 노동자가 처해 있는 곤경, 즉 계층의 장벽이 만연해 있는 세상에 관한 비유로도 보인다. 최지인은 “가계부채”를 가족에 떠넘기고 “실종”되어버린 무책임한 아버지가 일생토록 몸 바쳐 일해도 “가장 아끼는 것을 박살” 내게 되는 “힘없는 자”였음을 헤아려본다. “결과가 어찌 됐건/그것은 왜곡”된 것임을 짚어내며, “가족을 버린 아버지”(「보드빌」)라는 결과에도 구조적 원인이 내재해 있으리라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고함지르며
낯선 사내와 몸싸움하던 아버지
외면했었다 나도 머리가 굵어지고
아버지 얼굴에 주먹을 휘둘렀을 때
그는 파산을 앞두고 있었다
양심 있는 지식인들은 노예제도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말한다 제대로 된 임금은커녕 마음대로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돈 버는 것에서
답을 찾으려고 했지만
삶의 모범이 없다는 건
몹시 슬픈 일이다
모든 걸 잃은 한 사람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누군가의 삶이 짓밟힐 때
자갈 구르는 소리가 났다
—최지인 「코러스」 부분
“낯선 사내와 몸싸움”이나 하는 “아버지”를 보며, 아들인 ‘나’는 “삶의 모범”을 찾을 수 없음에 좌절하고 그에게 주먹을 휘두른다. 그러나 바로 다음 연에서 시인은 그가 “파산을 앞두”게 된 사정이, 폐지되었다고 믿어지는 “노예제도”가 존속하고 있는 현실에 영향받았을 것임을 암시하며, 아버지와 아들 간의 갈등에는 더 많은 요소가 개입하고 있다는 점을 다층적으로 살피게 한다. ‘나’는 “돈 버는 것”에서 나름의 해답을 찾으려 해보지만, 녹록하지 않은 노동의 현실을 체험하며 아버지를 비롯한 현대인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몸소 감각한다. “모든 걸 잃은 한 사람의 표정을” 떠올리며 “삶이 짓밟”힌 이들의 심정을 가늠해보는 ‘나’는 ‘코러스’가 되어 묻히게 될 미약한 소리이나마, 자신에게는 선명한 “자갈 구르는 소리”를 듣는다. 계급이 유지되고 있는 이 사회의 부조리를 실감하며 ‘나’는 아버지를 위시한 노동자들을 진정으로 연민할 수 있게 된다.
최백규의 경우 과거로 돌아가 아버지의 생애를 톺아보며 죽은 아버지를 애도한다. 아버지를 묘사할 때 그는 “일터에서 귀가한”(「돌의 흉곽」), “공장에서 돌아온”(「향」)과 같은 관형절을 활용하여 그가 성실히 일했음을 강조한다. 그가 애써온 날들까지 함부로 부정하지 않기 위해 그의 열심과 그럼에도 좌절할 수밖에 없었던 그간의 사정을 조명하는 것이다. 시인은 어린 ‘나’를 구하려다 다친 아버지를 회상하며 그의 아픔에 자신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에 부채감을 느끼고 평생 고통받았던 아버지를 가엾게 여기게 된다(「아프지 않았다」). “수술비”가 없어 손 놓고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아버지를 그린 「돌의 흉곽」도 눈여겨볼 만하다. 병실에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노동으로 지쳐 있었음에도 “가족에게 바람을 쐬러 계곡으로 떠나자” 했던,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려던 과거의 아버지를 떠오르게 한다. ‘나’는 물려받은 가난과 계급으로 인해 아버지처럼 “돈에 묶여” “강바닥으로 가라앉”게 될 신세지만, “그의 심장”만큼은 “머언 바다로 밀어” 해방시켜주고 싶어 한다. 아버지를 애도하는 과정을 통해 최백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마지막 오디션에서 아무것도 못하고 카메라만 봤다 저것 때문에 평생을 망쳤구나
손바닥에 녹이 스미고 있다 해수면 위로 눈이 떨어진다
일을 마친 후 귀가하는 새벽녘마다 안전주의 표지판을 걷어차며 다짐했다 실컷 굶어 쓰린 배를 움켜쥐고
(…)
뼛가루를 안은 채 생각했다 인생은 결국 서서히 죽음을 인정하는 과정 같다
도축당한 짐승들은 어떻게 될까 인간이 그린 천국과 지옥에는 인간밖에 없어서
(…)
월요일에 죽은 아버지가 좋아하던 비가 월요일마다 온다
(…)
숨을 오래 마시면 이곳이 녹슬었다는 사실만 알 수 있다 흰 돌과 우주에 내일이 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침대에 누워 뜨거운 가슴을 움켜쥔 채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리 바라보았다
그립지 않아서 슬퍼할 수가 없다
—최백규 「천국을 잃다」 부분
‘나’는 자신이 우연한 사건으로 “평생을 망”칠 수 있는, 동등한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 기이한 구조 속 노동자임을 확인한다.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반복해서 그렸듯이, ‘나’ 또한 “일을 마친 후 귀가”하는 모습이 조명되는데, 이때 ‘나’는 “안전주의 표지판”을 걷어찬다. 이는 안전하지 않은 작업 환경을 개선하지 않고 조심할 것을 당부하여 안전책임을 근로자에게 전가하는 지금의 안전교육13을 상기시킨다. ‘나’는 최소한의 안전도 보장해주지 않는 불합리한 노동환경에 불평하며 “실컷 굶어 쓰린 배”를 통해 일을 해도 빈곤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감각한다. 그리하여 “이곳이 녹슬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녹슬어가는 자신과 사는 동안 녹슬어갔을 “죽은 아버지”에게 그 책임이 있지 않다는 점을 알게 된다. 인간이 그려낸 “천국”에는 “도축당한 짐승들”의 자리가 없듯이, 비인간으로 내몰리는 노동계급에게는 “천국”이라는 상상의 공간마저 허용되지 않기에 “천국”을 그릴 수도, 그리워할 수도 없는 ‘나’는 “슬퍼할 수”조차 없는 상태로 남는다.
이렇듯 두 시인은 아버지가 제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했음을 인식하면서도 그런 아버지와 대결하지 않는다. 섣불리 아버지를 부정하여 도리어 그에게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아버지를 말끔히 삭제하고 관계성 자체를 사유하지 않는 자기중심적 세계로 유폐되지도 않는다. 이들은 노동자로서의 아버지를 노동하는 ‘나’와 병렬적으로 연결해낸다. “2020년대에 먹고사는 건 1980년대에 노동자로 사는 것과 다르다 해도 자본가의 지배는 계속되고 있”(최지인 「서사」)다는 연속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잘못은 마땅히 지적되어야 하며, 지금 청년들이 처한 암울한 시대상황의 특이성 또한 인정받아야 하지만, 이러한 지적과 인정 요구에 대한 몰입은 세대 갈등으로 논의를 축소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대를 거듭하여 인간을 착취해왔으며 더 잘 착취할 수 있도록 발전해온 자본주의의 폐단을 의도치 않게 가리게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아버지-아들을 자본주의에 예속된 노동자로 범주화하는 일은 이들을 이해하는 세대라는 수직축뿐 아니라 착취당하는 노동계급으로서의 가로축 또한 선명히 하는 일이 된다.
자본주의는 계급을 세분화하고 이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방식으로 반(反)자본주의적 운동을 잠재워왔다. 가령 “철도 파업에 수험생들 ‘발 동동’”(최지인 「제대로 살고 있음」)이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철도 파업이 무엇에 저항하는지는 가린 채 그것이 노동자들과 무관해 보이는 이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었는지에 집중하게 하는 방식이다. “마르크스는 시간이 흐르면서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균일한 존재 조건을 공유”하게 되며 “자본주의의 계급 구조가 점차 단순”해질 것이라 예상했고, 따라서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에 맞설 응집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측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 비록 자기 노동력을 판매하는 임금소득자로서 노동계급이 폭넓게 정의되고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실제 노동자들의 경험은 대단히 파편적이기 때문에 공통된 계급 정체성을 만들어내기 어렵다.14 여전히 많은 이들이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갖지만, 공통점을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노동이 분화되어 그 경험의 차이가 분명해졌다는 말이다. 더군다나 구조적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노동계급 간의 갈등이 강조되며 공동체의식은 희미해지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는 건 정규직이라는 사실”(최지인 「컨베이어」)과 같은 내부의 대립이 먼저 인식되는 실정이다.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는 ‘계급투쟁’을 보다 넓은 의미로 재정의하여 자본주의와 맞서기 위해 필요한 세력을 연합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간주하자고 주장한다.15 계급운동이 특수한 노동자집단의 경제적 이익만을 대변하는 개별적인 투쟁으로 치부될 때, 자본주의에 맞서는 일에 다수가 동참하기는 어려워진다. 자본주의가 단순히 경제구조가 아니듯이 계급투쟁 또한 생산지점에서의 투쟁만을 지칭하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투쟁들을 계급투쟁으로 부름으로써 불필요한 갈등과 손실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비정규직과 정규직 등의 구분보다 ‘노동자’라는 공통의 범주를 젊은 시인들이 시에 새기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소 부정적인 아버지까지 노동자로서의 ‘우리’로 엮어보는 일은 저항의 에너지를 엉뚱한 곳으로 겨누지 않고 확산시켜 더 많은 이들이 결속할 수 있도록 만든다.
3. 돌파 아닌 묘파
최지인의 시에서 노동은 자아실현이나 부의 축적과 연결되지 않는다. 일과 짝패를 이루는 것은 언제나 “실업의 공포”(「크로키」)와 ‘죽음’이다. 그의 시에서 노동자들은 “사무실 이곳저곳”에 ‘지진 경보음’이 울릴 때도 모두 제자리를 지킨다(「숨」). 재난의 위험 앞에서도 자신의 일자리를 사수하려, 하던 일을 지속한다. 직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는 모순은 의아함을 자아낸다. 이들이 이토록 일자리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로, 그것은 해고되는 주변인들을 보며 자신이 언제라도 대체될 수 있는 인력임을 확인했던 경험에서 온다.
마흔이 되던 해에 회사를 그만두고 고용센터 민원 대기실에 앉아 손에 쥔 번호가 불리길 기다리는 선배에게 지나온 삶은 행복이었을까 절망이었을까
(…)
인간은 왜 죽을힘을 다해 일하는 걸까
함께 일했던 동료 두명은 쓸모없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대체할 수 있는 것들
포개져 있는
무해한 사람들
—「살과 뼈」 부분
적지 않은 나이에 회사를 그만두고 다시 “고용”되기를 기다려야 하는 “선배”의 모습을 보며 시적 주체는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예감한다. 이에 더해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죽을힘을 다해 일”했음에도 “해고당”하는 상황을 목격하며 ‘무엇을 위해’와 같은 일의 목적은 희미해지고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강박적 사고가 팽배해진다.
둘째로, 시적 주체들을 일에 매이도록 만드는 것은 이들이 지고 있는 ‘부채’다. 최지인은 밤새워서 일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성실한 노동자들을 시에 등장시킨다. 그리고 이들이 다달이 내야 하는 “월세”(「언젠가 우리는 이 원룸을 떠날 테고」), “전기 요금”(「포스트 포스트 펑크」), 대출이자(「세상이 끝날 때까지」) 등으로 인해 결코 일을 그만둘 수 없음을 강조한다. 라자라또(M. Lazzarato)는 현재 자본주의의 가장 핵심적이고 보편적인 권력관계가 ‘부채’를 중심으로 한 ‘채권자-채무자 관계’이며, 이는 수혜자, 노동자, 소비자와 같은 다양한 주체를 모두 채무자로 만들어버린다고 이야기한다.16 이로써 노동은 노력하고 보상받는 구도에서 빚을 지고 이를 갚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는 구도로 변화한다. 부채는 ‘빚진 자’로서의 주체를 생산하고 이는 책임감과 죄책감을 유발하며 노동과 윤리가 분리 불가능해지도록 만든다. 주체가 스스로 계약하여 채무자가 된 것이기에 변제 의무를 다해야 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 부도덕한 인간으로 전락한다. 신체적·지적 능력뿐만 아니라 채무자의 도덕성 그리고 그의 실존 방식까지 채무 관계에 의해 동원된다.17 빚은 노동자가 일하게 될 미래의 시간까지 저당 잡기 때문에, 이 시대의 노동자는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다. 노동자는 일자리를 잃거나 직장을 옮기게 되는 변수를 최소화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되고 “부당한 요구에도”(「언젠가 우리는 이 원룸을 떠날 테고」) 순응하게 된다.
독특한 점은 최지인의 시에서 이러한 노동자(채무자)가 “고용”되어 노동할 수 있을 때는 ‘슬픔이 없는’(「세상의 끝에서」) 상태로 서술된다는 점이다. 노동으로 인해 슬픔이 극복된 걸까. “곧 잘릴 것”을 예감하며 “사라질 것이”라 다짐하는 노동자 또한 “더이상 슬픔은 없다”(「컨베이어」)고 말하는 것을 보아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노동에 예속된 일상은 부정적인 감정을 긍정적 감정으로 변환해주는 게 아니라 감정을 느끼는 주체인 ‘나’ 자체를 지워버린다. “나를 잊고/일에 집중”(「최저의 시」)하려는 노동자에게 ‘나’라는 통합적인 인격체는 불필요한 방해물이기 때문이다. 일을 통해 비인간화되거나, 일이 없어 비인간의 처지로 내몰릴 이들이 필사적으로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격리하는 과정은 비극적이고 기괴하다. 이러한 광경은 언뜻 자본주의에 예속되어버린 시적 주체가 자신의 처지를 무력하게 받아들이는 광경처럼 보이지만, 기이함을 자아내며, 인간의 노동이 더는 긍정적 요소와 연결되지 않음을, 더구나 그 노동에는 노동하지 않을 권리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강조하게 된다.
시인은 이인증(depersonalization)을 앓는 듯 보이는 주체의 서술을 선택적으로 취합하여 통일성 있게 배치하기보다는 그저 의식의 흐름처럼 받아 적는다. “집계된 감염자 수”(「이번 여름의 일」)와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는 군경들’(「세상이 끝날 때까지」) 등의 사건들이 틈입할 때면 슬퍼졌다가도, 이를 억제하고자 인격을 제거하고, 그로 인해 죄의식을 느끼며, 그럼에도 다시 먹고살 궁리를 하게 되는 현대인들의 조각난 일상을 시인은 파편인 채로 그러모은다. 도무지 통합되지 않는 파편적 서술은 자기통합적 사유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지금의 사회구조를 되비춘다. 부채를 감당하기 위해 감정을 제거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채무자로서의 죄책감에는 매이게 되는 분열 양상을 통해 자본주의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계속 새로운 빚을 지게 되므로 그러한 죄에 대한 처벌은 유예된다. 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언제든 유죄를 확정지을 수 있는 “미결수”(최백규 「천국을 잃다」)로서 불시에 찾아올 판결을 경계하며 늘 불안증에 시달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들은 일하지 않을 때도 죄책감과 우울감을 느낀다. 다시 최백규의 시집으로 돌아가보면, 최백규는 이를 세세히 묘사하면서도 그 정서적 반응이 사적인 문제로 인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름’이라는 계절을 동원한다.
정학과 실직을 동시에 치르고도 여름은 온다
터진 수도관에서 녹물이 흐르고 장롱 뒤 도배된 신문지로 곰팡이가 번지다 못해 썩어들어간다 기름때 찌든 환풍기를 아무리 틀어도 습기가 자욱하다
(…)
밀린 급여라도 받기 위해 진종일 공사판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전신주에 기대앉아 신발 밑창으로 흙바닥의 침을 짓이기고 불씨 죽은 드럼통이나 해진 목장갑만 물끄러미 들여다보기도 한다
숨이 차도록
구름이 낮다
(…)
이제 홀로 뒷골목에 남아 뜨거운 눈물을 훔치며
왜 비가 그쳐도 우리의 장마철은 끝나지 않는가 중얼거리며
멍하니 올려다본다
(…)
너무 오래 비가 왔다
—「장마철」 부분
최백규 시의 배경은 대부분 여름의 장마철이다. 이 “장마”는 “비가 그쳐도” “끝나지 않는”다는 시구에서 알 수 있듯이 계절적 배경이자 내면의 풍경이다. 젖은 상태의 지속은 “터진 수도관에서” 흘러나오는 “녹물”, 환기가 잘 되지 않는 방의 “습기”와 연결되며 빈곤과 밀착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다른 시(「천국을 잃다」)의 “비가 오지 않는 집”에 살기를 희망하는 장면에서도 “비”는 물이 새는 집에 관한 비유로 기능하며 경제적 어려움을 상기시킨다. “구름”은 ‘나’의 가까이에서 언제든 “비”를 뿌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이는 가난과 불운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 속에서 ‘나’는 “숨이 차”(「장마철」)는 답답함을 느낀다. 과도한 습도로 인한 불쾌감은 여러 시편에서 반복되며 시집 전체에 가시지 않는 우울로 자리 잡는다. 최백규는 부조리한 사회가 불러온 끝나지 않는 여름에 갇힌 “누구라도” “우울”(「천국 흐리고 곳곳에 비」)을 견디며 “젖은 하루”(「애프터글로우」)를 살아가게 된다는 점을 짚어 개인적 음울함을 세계 전체가 “아쿠아리움”(「천국 흐리고 곳곳에 비」)이라는 사유로 확장해낸다. 시적 주체가 강력한 주체성을 발현시켜 날씨를 주관한다기보다 자연현상이기도 한 이 기후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가 별로 없다는 점을 가시화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열심히 일했지만 하나의 불행한 사건, 한번의 실수로도 쉽사리 무너지는 현대인들은 이 세계에서 젖은 채로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 속에 녹슬고 부패해간다.
최지인이 슬픔을 소거하게 하면서도 죄책감을 유발하는 지금의 노동에 집중해 그 모순을 폭로한다면, 최백규는 우울을 장마철 날씨와 결부시킴으로써 그 증상의 근본적인 원인을 노출한다. 최백규는 우울이 개인적 사정이나 유전, 고유한 감정반응 등에서 기인하는 사적인 문제라기보다 착취적인 자본주의의 산물에 가깝다는 점을 형상화한다. 언제나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되는 우울감이 사회구조로 인해 생겨난 병리적 현상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지금의 ‘신자유주의적인 성과사회’에서는 금지나 처벌 같은 부정성이 아닌 ‘행복하라’ ‘무엇이든 해보라’라는 새로운 지배공식을 바탕으로 하는 긍정성이 주체를 구속한다. 현대인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을 착취하게 되고 행복이 사적인 문제로 간주되자 고통 또한 개인적인 실패의 결과로 해석되며 그 해결은 약학과 의학의 영역으로 축소된다.18 최백규는 우울이 자본주의 아래 모두가 느낄 수밖에 없는 계절감과 같은 것임을 밝혀, 고통이 병폐적인 사회구조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한다. 나아가 다수가 우울을 경험하게 되는 현상을 “이상기후”(「이상기후」)로 지칭하여 이것이 논의되고 개선되어야 할 부자연스러운 상태임을 짚는다.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만연해진 우울 증상이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음을 그려 자본주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고장 난 체제임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4. 번지기 위해 청유하는 시
젊은 시인들은 더욱 영악해지는 자본주의와 대적하기 위해 그보다 치밀한 대응 방식을 마련해나가고 있다. 그럼에도 최지인과 최백규가 던지는 몇몇 물음들, 가령 ‘노동이란 무엇인가’ ‘서로에게 번질 수 있을까’ ‘나는 무엇에 공모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은 시집이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범위하고 관념적이라는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책임질 수 있는 사소한 질문만 던지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기 어려운 질문들까지 포기하지 않는 이들을 섣불리 무책임하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다만 제 몸집보다 큰 질문들을 떠메고 이들이 어떻게 걸음을 옮길 것인가라는 질문은 던져볼 수 있다.
양경언은 2010년대 시가 낯익은 화법으로 말을 건네는 방식, 즉 “‘잠재적인 대화의 관계’를 끊임없이 요구하는 방식으로”19 쓰인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나’의 발화는 언제나 ‘너’의 응답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대화로서만 온전해진다. 물론 시란 본디 불가능해 보이는, 시공간적으로 분리된 이들과의 대화를 전제하며 창작되고 향유된다. 다만 2010년대에 들어서며 ‘너’와의 공존을 모색하기 위해 타자인 ‘너’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흐름 안에서 등장한 최지인과 최백규는 ‘너’를 요청하며 ‘청유형’을 활용한다.
우리는 죽지 말자 제발
살아 있자
—최지인 「제대로 살고 있음」 부분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시를 쓰자 아름답게 살자 남은 인생을 모두
이 천국에게 주자
—최백규 「애프터글로우」 부분
그어버릴게 번지듯 퍼뜨려지자 우리는 영원하지 않을 거야 우리 없이 살아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죽어갈 거야 시동을 걸자 걷다가 질주하자 (…)
몇년 후에 다시 사랑하자
—최백규 「불시착」 부분
이들의 청유형은 ‘너’를 적극적으로 요청한다는 점에서 2010년대의 발화 방식과 궤를 같이하면서도 ‘너’의 답변을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낸 답변들을 가지고 ‘너’에게로 다가간다는 점에서 다르다. 멋대로 판단하고 독백하는 ‘나’로의 퇴행이 아니다. 무엇도 단정 짓지 않고 불명확한 상태로 바라보는 윤리적인 관점이 세련된 방식의 회피가 되지 않도록 책임감을 더하려는 의지로 보인다. 최지인과 최백규는 ‘너’의 실천이 없으면 무색해지는 ‘나’를 내세우되 자기 몫만큼의 책임을 다한 채로 ‘너’의 참여를 요청한다. 함께 행동해줄 주체를 찾는 것이기에 청유형 안에서 이들은 상호주체적이 되며 ‘너’의 응답이 이어지면 대화를 넘어 모종의 움직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는 ‘너’를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너’를 찾아 헤매는 행위를 통한 적극적인 기다림이다. 기다림은 기다리는 대상이 부재한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대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기대를 동시에 담고 있다. 불의에 맞서서 “악은 물러가라/악은 물러가라”라고 소리치며 “거리를 행진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릴 때도, 시인은 그 기한을 “세상이 끝날 때까지”(최지인 「세상이 끝날 때까지」)라고 명시한다. 이는 ‘죽을 때까지’라든가 ‘목숨이 다할 때까지’와 같은 표현과는 분명 다르다. 과정에 의미를 두면서도 이런 불의한 세상을 끝장낼 수 있다는 변화의 가능성, 결과에 대한 긍정적인 예측을 은연중에 내비치기 때문이다. 막연하면서도 단단해 보이는 이러한 믿음은 더 많은 이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기반으로 작용할 수 있다.
젊은 시인들은 정해진 방향으로 겨누어지는 분노를 거두고 그 힘을 널리 퍼뜨리려 한다. 그 열기를 응축하는 대신 확산하여 더 많은 이들이 결속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를 통해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불필요하게 갈등하며 자본주의적 기획에 사로잡히게 되는 악순환을 중단하고자 한다. 시인들은 더 많은 이들이 서로의 삶에 스미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도 혼자서는 감히 책임질 수 없는 질문을 함께 짊어질 이들을 찾아 나선다. 세계가 망가지더라도 살아서 시를 쓰자고, 세상이 끝장나도록 소란스럽게 시를 읊자고, 그리하여 번지듯 서로에게 퍼뜨려지자고 외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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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수 「기대가 사라져버린 세대의 무기력과 희미한 전능감에 관하여: 2010년대 시인들의 무기력 혹은 무능감 2」, 『문학동네』 2015년 여름호 367면.↩
- 박상수 「발칙한 아이들의 모험에서 일상 재건의 윤리적 책임감으로: 2010년대 시와 시비평에 관하여」,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291면.↩
- 양경언 「이제 되었다니, 그럴 리가」, 『문학과사회』 2015년 겨울호 544면.↩
- 고봉준 「분노의 시대, 분노하지 않는 시」, 『문학 이후의 문학』, 도서출판b 2020, 181면.↩
- 같은 책 192면.↩
- 같은 책 192~93면.↩
- 마크 피셔 『자본주의 리얼리즘』, 박진철 옮김, 리시올 2018, 36면.↩
- 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이수련 옮김, 새물결 2013, 68~69면.↩
- 이하 이 두 시집에서의 인용은 제목만 표기함을 밝힌다.↩
- 신형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2010년대의 시를 읽는 하나의 시각」,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379~80면 참조.↩
- 최백규 「섬광」, 최지인 「코러스」 「마카벨리전(傳)」 「보드빌」↩
- 이경수 해설 「우울한 미래의 비망록」, 『나는 벽에 붙어 잤다』 159면 참조.↩
- 박두용 「안전교육, 그 허상과 실상」, 416세월호참사 작가기록단 『재난을 묻다』, 서해문집 2017, 179~80면 참조.↩
- 에릭 올린 라이트 『21세기를 살아가는 반자본주의자를 위한 안내서』, 유강은 옮김, 이매진 2020, 205~206면 참조.↩
- 낸시 프레이저·마르띤 모스께라 대담 「‘식인 자본주의’의 부상」, 『창작과비평』 2021년 겨울호 382~84면 참조.↩
-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부채인간』, 허경·양진성 옮김, 메디치미디어 2012, 57면.↩
- 같은 책 80~87면 참조.↩
- 한병철 『고통 없는 사회』, 이재영 옮김, 김영사 2021, 20~24면.↩
- 양경언 「작은 것들의 정치성: 2010년대 시가 ‘안녕’을 묻는 방식」, 『안녕을 묻는 방식』, 창비 2019, 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