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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유형진 劉炯珍
1974년 서울 출생. 200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피터래빗 저격사건』 『가벼운 마음의 소유자들』 『피터 판과 친구들』(e-시집)이 있음. sengdal@naver.com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우유 사러 갈게, 하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여자가 있다
생각해보니 여자는
우유 사러 갔다 올게, 하지 않고
우유 사러 갈게, 그랬다
그래서 여자는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
우유는 슬픔
기쁨은 조각보
왜?
슬픔은 뿌옇게 흐르고
썩으면 냄새가 고약하니까
나에게 기쁨은 늘 조각조각
꿀이 든 벌집 모양을 기워놓은 누더기 같아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전혀 기억나지 않는 말
지금 기억나는 말
그때 무얼 하고 있었지?
우유를 마시고 있었다
조각보로 덮어둔
밀크잼 바른 토스트를 먹으며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재방송 드라마가 하고 있었고
주인공이 막 오래된 마음을 고백하려는 중이었다
고백은 끝나고 키스도 끝났는데
우유 사러 간 여자는 영영 오지 않았다
벌집모양 조각보는 그대로 식탁 한구석에 구겨져 있고
우유는 방 안 가득 흘러 넘쳤다
아무도 모르는 각설탕의 角
아무르파티의 아
무라노의 무
도일리패턴눈꽃송이의 도
아무도 각설탕의 각이 어떤 각인지
정확한 설명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
이것이 이 세계의 가장 큰 비극인데
사실 비극은 너무 천차만별이고
이 세계는 너무도 세심하게 갈라져 있어서
그 틈 사이에 사는
난쟁이 배우들이 생겨날 수밖에
나는 그들과 밤마다 만난다
만나서 꿈의 계산서를 받아 온다
그들은 각설탕의 각을 지나치게 꼼꼼하게 계산한다
심지어 사막에 사는 염소, 아라비아오릭스의 뿔까지도
너무 잘 계산하고 있어서
나는 그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난쟁이 배우들은 실상
보통의 사람들보다 키가 훨씬 크다는 것,
그들의 정확한 계산에 있어 이 점은 매우 유효하다
주관적으로 생각하면 그렇다고 말하기 전에
어떤 정서 실험을 하던 그 값을 객관화하여
누런 표지의 기자수첩에 꼼꼼히 기록하는 버릇,
그런 마인드가 있어야 시를 쓸 수 있다
아무르파티는 지도에 이름도 나오지 않은 소읍에서 벌어진 사건이고
무라노는 유리공예점이 많은 베네찌아 근처 작은 섬이고
도일리패턴눈꽃송이는 어제 우리 집에 찾아온 손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