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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은봉 李殷鳳
1953년 충남 공주 출생. 1984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몸에는 달이 살고 있다』 『길은 당나귀를 타고』 『책바위』 『첫눈 아침』 『걸레옷을 입은 구름』 등이 있음. silverstick535@hanmail.net
푸른 곰
서라 아파트 담장 아래
푸른 곰 한마리 쪼그려앉아 있다
쪼그려앉아 풋나물 다듬고 있다
잔뜩 움츠린 채
푸른 털 세우고 있는 늙은 곰
제 몸 여기저기 붉은 꽃 피우고 있다
허리는 꼬부라졌어도
푸른 곰의 붉은 꿈
핏자국처럼 선연하다
바람 불지 않아도
땅바닥 위에 떨어져 뒹구는
푸른 곰의 붉은 꽃
환하게 아프다 아픈데도
꽃방석 만들고 있다
떨어진 꽃자리마다
동백 알들 맺고 있는 늙은 곰
함부로 치달려온 세상
더는 두렵지 않다 이제는 아이들 두엇
품에 안고 있기 때문이다
소꿉놀이를 하는 아이들 두엇
꽃떨기들 모아, 사금파리 도마 위
내일의 꽃떡 찧고 있다.
우물
막은골 이야기
마을사람들은 다 자기 집 울안에 우물을 파는 것 두려워했다
우물을 파는 것은 자기 집 밑바닥에 구멍을 뚫는 것
자기 집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면 삶의 조각배가 가라앉는다고 생각했다
집집마다 울안에 우물을 파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마을에는 오직 우물이 하나, 우물은 회당집 앞 길가 우묵한 곳에서 솟았다
돌로 야트막하게 쌓아올린 우물에는 이른 아침부터 하늘이 고였다 구름이 고였다 바람이 고였다 나뭇잎이 고였다 밤에는 달이 고이고, 별이 고였다
더러는 내 마음도 고였다
우물가는 아낙네들의 사랑방…… 보리쌀을 씻으러 온 아낙네들로, 숭늉물을 길러 온 아낙네들로 우물가는 늘 왁자지껄 시끄러웠다
때가 이울어 아낙네들이 집으로 들어가야 우물가는 꼬마들의 차지가 되었다 꼬마들에게는 활명수 병에 실을 묶어 깊은 우물에서 물을 뜨는 놀이만큼 재미있는 것이 없었다
가끔은 이 우물의 물,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침을 뱉고는 다시 먹는 나그네도 있었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집집마다 떡을 해 바치는 우물…… 떡을 해 바치는 집은 정월 대보름 때도 있었다
마을 아낙네들은 이 우물물로 밥을 안치고, 국을 끓이고, 김치를 담갔다
섣달그믐 밤에는 떡시루에 촛불을 꽂고 손바닥을 비벼대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할머니도 있었다
새마을 공동수도가 들어오면서 사라져버린 우물, 한때는 마을사람들 모두 이 우물에서 소년들의 생기가 솟는다고 생각했다 꿈이 솟는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우물이 사라져버려 소년들의 생기가, 꿈이 사라져버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