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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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향림 盧香林

1942년 전남 해남 출생.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후투티가 오지 않는 섬』 『해에게선 깨진 종소리가 난다』 『바다가 처음 번역된 문장』 등이 있음. nohpoet@hanmail.net

 

 

 

둔황은 골목 끝에도 있다

 

 

『왕오천축국전』, 그 아슬한 천축나라는 갈 수 없다고 눈빛 순한 낙타 한필을 보낸다고 했다 둔황까지 가는 길엔 원평반점 심보성 톈안먼 맛집 그 건너엔 자금성 진시황릉 만리장성 홍콩반점 등록 안 된 문화유산들이 즐비했다

 

석굴 중 하나인 지하 금빛동굴로 나를 인도할 거라는 전갈도 왔다 파란불 딸랑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나는 낙타와 헤어졌다 낙타는 방울을 흔들며 사막의 모래바람 뚫고 제 갈 길을 갈 것이다 그의 청청하늘의 북극성은 어디쯤일까

 

마스크를 쓴 채 나는 미발굴 유적을 찾듯 황사 겹친 미세먼지가 옅은 탄가루처럼 날리는 허름한 골목에 들어섰다 막고굴 모양의 좌우 반점들마다 딱 딱 따다닥 딱 딱 반죽을 수타로 힘껏 내려치는 소리 경쾌하다 하나같이 저들은 하양 가운에 하양 모자를 쓰고 하얗게 국수를 뽑으며 쉼 없이 무슨 수행을 하는 걸까

 

긴 골목 끝에서 나는 삐걱대는 지하 둔황굴 문을 밀치며 들어갔다 자장면! 독송(讀誦)하듯 나는 주문을 던진다 황금색 칠 벗겨진 계산대 앞 아주 작은 나무 의자에서 낮잠 삼매에 든 중국인 주인은 이내 주방을 향해 자쟝몐! 소리친다 오랜 기다림 끝에 나온 자장면 한그릇의 희귀 경전을 면발 하나하나 먼 길 온 혜초처럼 또박또박 읽으며 나는 나를 비우고 나왔다

 

 

 

오르락내리락

 

 

정릉 산동네 납작 집에서

그는 오래도록 살았네

지붕 한쪽이 기울대로 기울어

말년까지 그가 유일하게 한 일은

바람에 지붕 날아가지 말라고

벽돌 한장 주워 점퍼 호주머니에 넣고 온 일이었네

그리고는 한적하게

빈 파이프 문 채

산동네 길을 오르락내리락

눈 많이 내려도 따뜻하기만 한

머나먼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눈이 부시도록 햇살 맑은 날에도

스와니강이랑 요단강이랑

마음 놓고 찰랑이는 햇살

윗옷 안주머니에 소중하게 접어 넣고는

오르락내리락 오르락내리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