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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금진 崔金眞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가 있음. simasian@hanmail.net
개구리가 우는 저녁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었던 여자들을 개구리라고 불렀다
그녀들의 차가운 피와 물갈퀴가 좋았다, 나를 업고 거뜬히 강을 건널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닥에 밥상과 TV를 패대기치면 바르르 다리를 떨며 죽는 시늉을 하는 것이 좋았다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걸하던 그녀들은 하나같이 수족냉증이 있었다
섹스를 하지 않았다
커다란 암컷의 등에 올라타고 팔도유람을 하는 운 좋은 수컷을 본 적이 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약자의 습성이 그 약골 녀석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
썩은 소달구지 같은 데라도 얹혀서 평생 떠돌다 갔으면 얼마나 좋으랴
빵빵하게 부풀어 울음주머니에서 청승맞은 가난을 꺼내 들려주는 것도 지겨워
나는 개굴개굴, 비굴하게 울었다
왕관을 꺼내어 정성스럽게 닦는다, 이것은 나의 자존심, 나의 정체성, 나의 용기
삼한시대 마한의 옛 땅에서 태어난 왕족, 증명할 수 없는 내 할아버지들의 가문은 끝났지만
조금이라도 날 사랑했던 여자들은
연꽃 기와지붕 잠긴 그 호수 아래서 아직도 천년왕국을 기다린다
여자여, 나를 등에 업어라, 편견과 왜곡과 편력으로만 살아온
불행이 후편, 속편도 없이 끝나고 있다
옛 왕가의 녹슨 칼을 허리띠에 차고
길게 혓바닥을 뽑아 내 무용담을 들려주마, 나는 늘 내가 두려웠노라
꼬리부터 돋아나던 이상한 슬픔을 견디기 위해
별들도 몸부림치며 허공을 뛰어다니는 것 아니겠느냐
왕관을 씌워다오, 왕답게, 노래의 왕답게 헤엄쳐 가마
우주까지 뛰어오르는 로켓과 위성들, 봄 새싹들, 내가 나가신다, 이 노래의 왕이
강과 호수와 바다가 금색으로 들끓기 시작하는 이 저녁에
모두 엎드려라, 울어라, 자신을 위해
오직 자신을 위해 물갈퀴 돋은 두 손을 들고 빌어라
아아, 불행하지만 내게도 꼬리뼈 톡 튀어나온 아들들이 태어났단다
아이와 달팽이
달팽이 껍데기 속에서 잠자다 화들짝 놀라 깨어난 노인들
녹슨 백원짜리 하나 건네듯 아들에게 줬다
갖다버려라, 골다공증 같은 구멍의 소용돌이와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방 속에 우글거리는 노인들
아버지는 왜 혼자 주무세요? 아버지가 점이 되어
사라질까봐 무서워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점잖지 못하게
끈쩍끈쩍 점액질 같은 농담을 나누던 날들
어린 날, 곱돌을 주워 온종일 땅바닥에 낙서하다가
마침내 그 미로 속에 내가 갇히는 것이 신기했다
늘 재수가 좋았다, 불행했지만 그건 항상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흰 머리카락이 올해 부쩍 많이 돋는구나, 마침표
속으로 들어간 달팽이는 어디로 간 걸까
아버지는 집을 가져본 적이 없단다, 바람 들고 비도 새는
집이 없어서 너에게 미안할 게 없다
나뭇잎처럼요? 아니, 제 몸을 깨무는 거미처럼, 나선형은하처럼
달팽이 껍데기를 갖고 놀았다, 내가 숨으면 아들이 못 찾고
아들이 숨으면 내가 못 찾았다, 노인들이 나와서 구경했다
아버지는 절 버릴 건가요? 달팽이 껍데기 속에 숨어
나는 몰래 울었다, 아니, 네가 날 버리게 될 거다
아버지, 아버지는 똑바로 보세요, 저는 거꾸로 볼게요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깔깔거리는 아이의 뺨을 때렸다
오늘을 잊지 말고 기억해라, 이 애비가 너와 함께 있었다
몸 없는 달팽이들이 노을 속으로 양떼처럼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