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특집│대선 이후 촛불의 갈 길

 

‘서로 돌봄’의 그물망이 희망이 된다

 

 

김중미 金重美

작가, 활동가. 소설집 『조커와 나』, 장편소설 『나의 동두천』 『모두 깜언』 『곁에 있다는 것』 『너를 위한 증언』, 동화 『괭이부리말 아이들』 『꽃섬 고양이』, 에세이 『꽃은 많을수록 좋다』 등이 있음.

mansuk99@hanmail.net

 

 

1. 글을 열며

 

대통령선거와 지방선거를 치른 뒤로 한동안 정치 기사를 보지 않았다. 애써 기사를 외면하면서 계속 주문을 걸었다. ‘섣불리 절망하고 좌절하지 말자. 군사독재정권 아래서도, 권위적인 정권 아래서도, 신자유주의정권 아래서도 우리의 삶은 지속되어왔으니까.’

대선이 치러지고 지선으로 정국이 어지러운 와중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농성이 이어지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는 지하철 시위를 재개했다. 제주와 군산에 있던 평화운동단체 평화바람은 ‘봄바람 순례단’을 꾸려 언론이 주목하지 않는 투쟁현장을 찾았다.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노동자, 농민, 장애인, 여성들이 그리고 산과 들과 강과 바다가 고통에 신음하며 저항하고 있었다. 우리 공동체1도 팬데믹으로 멈췄던 일상을 다시 시작했다. 대면회의를 재개했고 초·중등부 아이들의 농촌체험을 다시 시작했다. 강화에 온 아이들과 볍씨를 뿌리고 모를 심었고, 3년 만에 인형극도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거제 대우조선에서는 하청노동자가 배 안의 철제 케이지로 들어가 목숨 건 농성을 시작했다.

2022년 두번의 선거 결과는 절망스러웠다. 누구도 정권이 바뀌니 사는 게 좀 나아졌다거나 공정성이 강화됐다고 느끼지 못한다. 대통령 지지율 하락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 이웃들의 삶을 위한 싸움은 계속될 것이므로 썩은 내 나는 정치에 냉소만 할 수 없다. ‘사회학자도 정치평론가도 아닌 내가 지난 두번의 선거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에도 이 글을 쓰는 까닭이다. 어쩌면 전문가가 아닌 50대 후반 여성이 겪은 선거와 전망에 대한 이야기도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은 거대한 담론과는 거리가 멀다. 나와 내 이웃의 관점에서, 그리고 곁에 있는 청년의 관점에서 쓴 글이 될 것이다.

 

 

2. 두번의 선거에 대한 소회

 

늘 정의당에 투표를 해왔던 공동체 청년들 중 절반이 이번 대선에서 눈물을 머금고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후보를 택했다고 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여성을 향한 혐오가 점점 거세지고 여성가족부 폐지와 같은 공약들이 쏟아지자 청년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정치적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들이 느낀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기에 그 절실함도 이해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2030 여성들이 민주당에 표를 준 것은 민주당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지난 대선에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이 여성 의제들을 부각시키지 않았다면 0.73%포인트의 접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뒤 민주당과 정의당 일각에서는 실패의 원인을 엉뚱한 데서 찾았다. 나는 민주당과 정의당 구성원과 지지자들이 선거 실패의 책임을 민주당의 박지현 전 비대위원장, 정의당의 장혜영, 류호정 의원 등에 묻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 여성 정치인을 향한 폭력과 백래시를 ‘진보’라고 믿는 사람들을 보며 청년들이 정치에 희망을 품을 수 있을지 회의가 든다. 두번의 선거 실패를 어떻게 성찰하느냐에 따라 지금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다. 그러려면 정치를 막 시작했거나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청년 정치인들을 위한 길을 내주고 더 많은 청년들이 정치를 시작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절망은 선거 패배 때문이 아니라 어디서도 그런 움직임을 볼 수 없다는 데서 온다.

 

누가 우리를 세대로, 젠더로 대립하게 하는가

나는 모든 청년들을 ‘청년세대’라는 단일한 집단으로 묶는 것, 우리 기성세대를 ‘586’이라는 숫자로 한데 묶는 것에도 반대한다. 2021년 출간된 『허락되지 않은 내일』(이한솔 지음, 돌베개)은 청년 35명과의 인터뷰를 통해 ‘기성의 목소리가 아닌 청년 스스로의 목소리를’ 담은 책이다. 저자가 전하는 청년세대의 절망과 희망, 그 노력에 깊이 공감하며 책을 읽었지만 한 문장 앞에서 잠시 멈칫했다.

 

대학 졸업증 없이도 안정적인 정규직에 들어갔던 사람이, 일해서 모은 돈으로 부동산을 마련할 수 있었던 사람이, 전혀 다른 조건에 놓인 사람을 이해하기란 아무래도 어려울 것이다. 위험할 것을 알면서도 정당한 대가와 안전을 담보받지 못하는 일을 해야만 하는 사회가 청년들에게 주어졌을 뿐이다.(125면)

 

저자가 옆에 있다면 그 앞선 세대에서 사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고작 10% 안팎이었다는 것을, “대학 졸업증 없이도 안정적인 정규직”이 되었던 대기업 노동자들 역시 소수였다는 것을, 더욱이 그 안정적인 정규직에 여성들의 자리는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내가 자란 동두천은 기지촌을 끼고 있는 특수한 지역이었다. 미군부대가 아니면 별다른 산업 기반이 없는 지역이라 사는 게 다 넉넉하지 않았고 골목마다 아이들은 넘쳐났다. 동두천초등학교는 6학년이 11개 학급이나 되고 학급마다 70여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6학년 때 우리 반도 70명이 넘었는데, 그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년제 대학에 진학한 친구는 여학생 한명, 남학생 여섯명이었다. 장학금을 받은 한명을 제외하면 모두 여유있던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그 당시 남학생보다 공부를 잘하던 여학생들은 대부분 상고를 나와 취업을 했다.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병원 원무과, 보험회사나 은행, 중소기업의 사무·회계직으로 취업한 우리는 스스로를 노동자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히 나는 근무하던 병원 건너편에 있던 원풍모방 여성노동자들의 민주노조 투쟁을 보면서 내 계급에 눈을 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지만, 동기들 대부분은 결혼을 하면서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했고 자녀 양육과 집안일에 전념했다. 그러다 IMF 시기에 남편들이 희망퇴직, 정리해고를 당하면서 맞벌이를 시작했다. 그들은 대형마트 계산원, 보험설계사, 백화점 판매노동자로 일했고 더러는 식당에서 파트타임 노동을 했다. 60대가 목전인 내 친구들 중 절반은 자기 앞으로 된 국민연금이 없다.2 지난 연말, 몇년 만에 만난 친구들은 이제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노동은 요양보호사나 미화노동뿐이라고 자조했다. 우리 사회가 말하는 기득권세력 586세대에 여성은 없다. 50~60대의 절반을 차지하는 중년여성들의 존재는 그렇게 지워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민의힘 대선후보였던 2021년 11월, 청년 유권자 공략을 위한 당내 ‘내일을 생각하는 청년위원회’ 출범식에서 “기사는 없더라도 좋은 자기 차를 타고 자기가 필요한 시간에 원하는 장소에서 일하는 중장년층이 어떻게 버스 타고 자전거를 타고 걸어 다니고 일자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청년들의 애로를 알 수 있겠느냐”3 윤석열 “모든 부처에 청년 보좌역을 배치 할 것”」, YTN 2021.11.28.]라고 했다. 그러나 내 주위에는 ‘좋은 자기 차를 타고 필요한 시간만큼 원하는 장소에서 일하는’ 중장년층은 남녀불문 거의 없다. 내 친구들은 여전히 버스를 타고, 전철을 타고, 걸어서 일터로 나간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갈 일터가 있다면 다행이다. 생계를 위해 일자리를 찾아다녀야 하는 경우도 있다. 정치세력은 청년뿐 아니라 중장년층마저 세대로 묶어 일반화해버렸다.

남편의 주변은 좀더 복잡하다. 남편은 인천의 빈민지역과 서부공단이 만나는 동네에서 자랐다. 집에서 가까운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고, 고등학교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사립대학의 부속고등학교를 나왔다.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은 대부분 제조업 노동자나 건축노동자가 되었다. 건축노동자가 된 이들 중에는 노태우정권이 추진했던 주택 200만호 건설 때 잠깐 돈을 번 경우도 있지만, 그들의 ‘안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산재사고와 재개발 등이 번번이 그들의 안정에 발목을 걸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동창들은 달랐다. 100명이 조금 넘는 문과 출신 중 절반은 서울 및 수도권의 상위권·중상위권 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중 과반이 학생운동을 경험했다. 학생운동을 적극적으로 했건 소극적으로 했건 졸업 후에는 대기업이나 건실한 중견기업에 취업했다. 그런데 그들 역시 IMF를 기점으로 계층이 나뉘었다. 계속해서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는 경우는 절반을 넘지 못한다. 인천의 변두리 산동네에서 태어나 자란 남편과 형제들이 사년제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남의 집 살이를 하면서 돼지를 키워 아들의 등록금을 댄 어머니와 동네에서 똑똑하다고 소문이 났음에도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봉제공장에 취직해야 했던 누나 덕분이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들 중에도 가족 중 누군가의 희생으로 586이 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들은 같은 세대 중 10%를 넘지 않는다. 그들이 50대와 60대를 대표하는 것처럼 말하며 청년세대의 대척점에 그들을 놓는 것은 청년세대와 기성세대의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

올해 수도권의 한 대학병원에서 임상심리수련을 시작한 공동체 청년 T가 말했다.

“병원에서 만나는 50~60대 환자들을 보면 586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소수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고등학교조차 나오지 못한 50대가 의외로 많더라고요. 세상이 보여주지 않는, 자신의 목소리가 지워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런데 그분들의 노동이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거잖아요.”

그 병원은 공단과 가깝고 근처에 외국인특구까지 있어 산재나 사고로 오는 환자들이 많다. T는 병원에서 환자들의 심리검사를 진행하며 자신도 한때 기성세대라고 막연히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이들이 동일한 계급과 계층, 젠더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다. T는 자신이 속한 청년세대 역시 나이만 가지고 한 집단으로 묶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T는 서울 중위권 대학의 언론홍보학과를 졸업한 언니와 언니 친구들의 의식주 소비형태, 문화·예술과 여가를 즐기는 태도가 경기도에 있는 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한 자기 친구들의 모습과 다르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요. 우리 학교에는 지방에서 온 아이들이 많고 고소득층은 거의 없었거든요. 공연이나 전시 같은 데 별로 관심이 없고, 다들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빠 그럴 여유도 없었어요.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도 좀 달라요. 언니와 그 친구들은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하지만 내 친구들은 페미니즘을 지지한다 정도거든요. 그런데 또 대학원에서 만난 동기들은 여덟명이 다 페미니스트이고 퀴어를 비롯한 소수자성에 열려 있어요. 그만큼 자기와 다른 이들을 만나고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여유가 있기 때문이죠. 그런데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들은 또 달라요. 농부, 목수, 노동자…… 직업부터 차이가 나요. 어떤 친구들은 이주민들이 자신의 근로조건을 나쁘게 한다고 생각하고, 어떤 친구들은 이주민들과 같은 일터에서 일하고 같은 동네에서 살면서 그런 벽이 없어지기도 하고요. 이번 선거에서 정치인들이 청년, 청년 외쳤지만 그 청년에 내 친구들은 없었어요.”

T는 자신들의 세대를 획일화하는 기성세대, 특히 정치세력과 언론을 신뢰하지 않는단다. 선거기간 동안 정치세력들이 그렇게 추앙해 마지않던 청년세대는 우리 기성세대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파악되지도 해석되지도 않았던 것이다.

 

청년은 단일한 집단이 아니다

대통령선거 기간 내내 정치인들이 청년을 외치던 중에도 청년들은 위험한 노동현장에서 다치거나 죽어갔다. 오토바이로 치킨이나 피자를 배달하다가 차에 부딪치고, 커피를 배달하다가 오토바이와 부딪치고, 부품을 거래처에 납품하다 가로수에 부딪치고, 빗길에 미끄러져 다쳤다. 주방에서 일하다 가스 유출로 뇌를 다치고, 기계에 손이 잘리고, 건축현장에서 일하다 담이 무너져 다치고, 수영·래프팅 가이드나 안전요원을 하다가 다쳤다. 공사장에서 추락하고, 기계에 몸이 끼이고, 전자회사에서 일하다가 메틸알코올에 중독되었다. 그들은 ‘다행히’ 김용균처럼 죽지는 않았지만 평생 산업재해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4 그런데 대통령선거에서 후보들이 질리도록 호명했던 청년들에 다치고 죽고 장애를 입은 그들은 없었다.

공동체 청년들은 대학에 입학할 때나 그 이후 2년마다 집을 옮길 때 LH전세임대주택을 구하느라 애를 먹는다. 특히 가구나 가전제품을 따로 살 필요가 없는 빌트인 원룸은 요즘 전세 매물이 거의 없다. 결국 가난한 청년들은 도시 변두리의 오래된 다세대주택이나 구축아파트에 집을 구하고 당근마켓을 이용해 살림살이를 마련하지만, 돈이 더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거기다 교통비와 이동시간의 부담까지 더해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혁신파크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던 청년 B는 서울시장이 바뀐 뒤 노조에서 고용승계와 직장 내 차별 문제를 두고 싸우다 퇴사했다. B는 스타트업 회사로 이직하면서 집을 새로 구해야 했다. 처음에는 직장 가까운 곳의 LH전세임대주택에 들어가려 했지만, LH에서 대출해주는 전세금 외에도 4천~5천만원을 얹어야 했다. 결국 B는 원래 살던 은평구에서 장마철에만 비가 샌다는 다세대주택 4층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왕복 두시간을 들여 출퇴근을 하고 있다.

인천에 사는 청년들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인천에서 가장 집값이 쌌던 중·동구 지역마저 재개발로 인해 집을 구하는 게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개발을 앞둔 화수화평구역 옆 5층짜리 아파트에 전세 매물이 나왔다고 하면 빛과 같은 속도로 계약을 하러 가야 했다. 어느새 그 아파트에 공부방 청년 셋이 둥지를 틀었다.

집이 어찌어찌 해결돼도 청년들의 삶은 여전히 팍팍하다. 학자금 대출을 갚아야 하고, 계약직이든 정규직이든 최저임금을 조금 웃도는 박봉에 시달린다. 아낄 수 있는 것이 먹을 것밖에 없다는 청년들은 김밥마저 4천원을 오르내리자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와 기업은 여전히 최저임금 문제를 들먹이며 자영업자들의 고통을 그 탓으로 돌린다.

팬데믹으로 3년 만에 기념한 어린이날, 오랜만에 강화에 온 청년 C, D와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청년들의 젓가락은 고기가 아니라 생선과 나물에 주로 갔다. 집에서 해 먹기도 더 힘들고, 외식비는 더욱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C는 올해 사년제 대학의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했다. 보호종료 청년이라 대학 졸업과 동시에 기초생활수급권이 조건부 수급권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자격증을 준비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C와 마찬가지로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다 1년간 휴학을 하고 편의점과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D가 말했다.

“처음에는 휴학하는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진로를 바꿔볼 생각이었거든요. 이쪽 일이 필요하다는 건 아는데, 저처럼 지방대 나오면 거의 계약직이더라고요. 선배들 보면 9개월, 6개월 계약직까지 있어요. 그래서 기술이라도 배워볼까 한 건데, 휴학하는 동안에는 조건부 수급자가 되니까 생활비랑 학원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거예요. 근데 짜증 나는 게 뭐냐면요, 편의점 점장님이 계속 최저임금 때문에 남는 게 없다는 거예요. 솔직히 임대료로 나가는 돈이나 본사에 내는 액수도 크잖아요. 거기다 제가 일하는 편의점 가까이에 다른 편의점이 세개나 있어서 더 힘든 거고요. 점장님 사정은 이해가 되지만 그게 다 최저임금 때문이라고 하는 거, 좀 억울해요. 최저임금 받아서는 친구들 만나 술도 못 마셔요. 주택대출금 이자 내고, 관리비 내고, 차비 하고, 밥 먹으면 학원비는 모을 수가 없었어요.”

먹고사는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공동체 청년들은 조국사태가 일어났을 때 크게 분노하지 않았다.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에 이어 조국 전 법무부장관 자녀의 입시 문제가 불거지고, 최근엔 한동훈 법무부장관의 자녀와 조카들이 미국 아이비리그에 가기 위해 편법을 동원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청년들은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걸 보고 진보연하는 기성세대들은 청년들이 사회문제에 너무 무관심하다고 못마땅해한다. 그러나 청년들은 뚫으려 해도 뚫을 수 없는 유리천장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다. 청년 일각에서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에 목청을 높여 반대한 것은 그나마 공정이 통하는 장이 ‘시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모른다. 그러나 공무원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지원받을 뒷배나 돈이 없는 청년들에게, 그리고 공시에 도전할 만큼의 기초학력을 쌓을 기회를 갖지 못한 청년들에게는 공시 자체도 공정한 기회가 될 수 없다. 그래서인지 공동체 청년들은 대법원 앞에서 조국을 지키는 촛불이 켜지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SKY대 학생들 사이에서 일어난 분노와 인천국제공항 정규직들의 반발에 공감하지 못했다. 거기에 안희정 오거돈에 이어, 전 서울시장 박원순마저 성비위 문제가 드러나 자살을 하자 청년들의 냉소는 더 깊어졌다. 청년들이 처음부터 민주화시기를 이끌어온 586세대에 부정적이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정의롭고 약자들의 편이라고 믿었던 운동권이 정치세력이 되어 기득권화된 뒤, 그들은 더는 힘없는 약자들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좌파의 승리는, 공산주의자들이 내각 구성에 참여하게 되었음에도, 곧 서민층이 환상에서 완전히 깨어나는 상황으로 귀착했다. 서민층은 신뢰를 보내고 투표했으나, 결국은 이 정치인들에게 홀대받고 배신당했다고 느끼고 애정을 거둬들이기에 이르렀다. (…) 사실상 우리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좌파 정당과 좌파 지식인들, 즉 당 지식인과 국가 지식인들은 그 후로는 더 이상 피치자들의 언어가 아닌, 통치자들의 언어로 생각하고 말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들은 더 이상 피치자들의 이름으로(그리고 그들과 더불어)가 아니라, 통치자들의 이름으로(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스스로를 표현하게 되었다.5

 

1980년대 프랑스의 좌파정부에 대한 묘사가 마치 선거 전 우리 사회를 묘사한 것처럼 느껴진다.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은 자율적 주체와 개인적 책임을 지겹도록 강조해온 우파의 논리가 좌파에도 상당 부분 공유되었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여성들은 두려움으로 쪼그라들지 않고 분노를 모아 목소리를 냈다. 국민의힘의 집권을 막기 위해 선택한 정당이 민주당이든 정의당이든 노동당이든 청년여성들에겐 여성을 향한 백래시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절실한 목적이 있었다. 그들에게 젠더 문제는 노동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벅찬 청년들 중에는 정치가 자신들의 고단한 일상을 바꿔줄 거라는 기대를 포기한 이들도 적지 않다. 정치를 전유하는 특정 계층을 향해 냉소하는 청년들이 있고, 일베 등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체제순응적 태도와 능력주의를 내면화하는 청년들도 있다. 결코 하나로 묶일 수 없는 청년세대다. 그렇지만 그 다양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세상은 변할 수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계급, 계층, 젠더에 따라 다른 청년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자꾸 억누르기만 한다.

어린이날 만난 청년 C와 D는 어릴 때 시설에서 함께 살아온 친구들과 동생들을 수시로 만난다. C는 그 만남이 서로의 생존을 확인하는 자리라고 말한다. 20여년 전 보호시설 아동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그들이 시설에서 퇴소한 뒤 살 집과 가족이 되었다. 공동체에서 만들어진 연결망을 유지하며 사회인이 된 보호종료 청년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다양한 커뮤니티를 만들어 서로를 돕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결망이 공동체 밖 보호청년들, 사회집단에서 떠밀려나가거나 떨어져나가는 청년들을 붙잡는다. 학업이나 직장 문제로 인천과 강화를 떠난 공동체 청년들은 자기들이 이주한 곳에서 페미니즘 모임을 찾아가고, 유기동물보호단체를 찾아가고, 노동조합에 가입해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청년들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은 서로 고립되는 것이다. 그들의 연결망에 정치적 역량까지 더해지면 좋겠지만 그 역량은 청년들만의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존의 정치세력들에 의해 잠식당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힘있는 연결망이 만들어지려면 청년들이 처한 여러가지 문제를 함께 해결해나갈 협력자들이 필요하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 1992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중당 사람들이 공부방을 찾아와 함께 선거를 치러보자고 했다. 만석동에서 살기 시작한 지 5년이 된 때였다. 공부방 자원교사 청년들이 꽤 모여 있었고, 공부방 부모님들과 ‘푸른솔주민도서실’을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만석부두 인근의 공장이나 서부공단의 노동자였던 아버지들, 봉제노동자, 동일방직 노동자였던 어머니들에게 ‘가난한 우리를 대변할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에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부모회 회원들은 우리를 대변할 정치인을 ‘우리가’ 만들기로 마음 모았다. 고된 야근을 마치고 혹은 가게 문을 닫은 뒤에 밤늦게 도서실에 모여 선거운동 전략을 짰다. 아버지들은 일터와 동네 골목을 누비며 민중당 후보의 선거운동을 했고, 어머니들도 아기들을 둘러업고 이웃을 만나며 우리에게 왜 민중당이 필요한지 설득했다. 선거운동을 하는 동안 어머니 아버지들은 이제까지 자신들을 위한 정당이 없었음에 분노하면서 선거에서 지더라도 계속해서 민중당 활동을 하자고 약속했다. 결과는 실패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오히려 그들은 인천 중·동구 지역에서, 특히 만석동에서 민중당 후보의 득표율이 가장 높았다는 결과에 ‘진짜 시작’이라고 기뻐했다. 그러나 민중당 지도자들은 실패가 ‘끝’이었다. 가난하게 태어나 자라 몸으로 살아온 부모회 회원들은 한번의 실패가 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게다가 민중당 지도부가 신한국당에 투항했다. 부모회 회원들을 절망케 한 것은 선거의 패배가 아니라 정치세력들이 원하는 권력이 진짜 민중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정당과 민주당의 실패는 앞선 진보정당의 실패와 성공의 교훈이 쌓이고 나눠지지 않은 탓이다.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 김형탁 사무총장은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의 4주기 추모주간에 가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노 의원은 연설을 통해 6411 버스에 탄 노동자들을 “이 사회의 투명인간”이라며 가시화했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해당 연설에서 더 핵심적이었던 건 “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할 때 우리는 그들 곁에 있었는가” 묻는 성찰이었다. 진보정당도 투명정당이었다는 것이다.6

 

진보정치의 토대가 되었던 조직된 노동조합은 전체 노동자의 10%를 넘지 않는다. 진보정치는 그 10% 밖의 노동자들,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 여성, 빈민, 소수자들과 손을 잡아야 한다. 진보정치의 씨를 뿌리고 가꿔야 할 곳은 노동현장과 노동자와 가난한 자영업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그곳에는 아직까지 서로의 생명줄을 놓지 않고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키우는 것이 진보정치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3. 선거 이후, 희망을 찾아서

 

희망의 싹 하나

화수화평동의 ‘창작공간 도르리’7에서는 요즘 영화촬영이 한창이다. 도르리 청년 O와 K는 2년 전부터 그림과 글, 애니메이션을 통해 재개발로 사라질 동네와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기 시작했다. 60년이 넘은 이발소, 대를 이어 하는 기름집, 동네책방, 도시산업선교회의 이야기를 담다가 화수동 토박이 박할머니를 만났다. 박할머니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으러 온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당연하다는 듯 청년들의 이야기를 물었다. 언젠가 박할머니가 내게 그때 이야기를 해주었다.

“두 사람 얘기를 듣는데 너무 불쌍하더라고. 나는 사람들이 다 불쌍해.”

그때부터 할머니는 도르리 청년들의 밥을 챙기기 시작했다. 주위에 맨 불쌍한 사람들뿐이라는 할머니는 당신이 나고 자랐던 화수동에 자기 명의의 집 한채가 없다. 기초생활수급자인 할머니는 60만원이 채 안 되는 수급비로 살면서도 수시로 음식을 해 이웃들과 나눈다. 십대에 서울로 식모살이를 하러 갔다가 수십년 뒤 고향으로 돌아올 때까지 할머니의 삶은 늘 가부장제의 폭력 아래 있었다. 그런데도 할머니의 생각과 태도에는 가부장제가 내면화되어 있어 가끔 청년들과 말다툼을 하기도 한다. 할머니는 재개발이 되면 2천만원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재개발에 반대하지 않는다. 화수화평동 재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할머니가 잃는 것은 2천만원짜리 전셋집만이 아니다. 할머니를 비롯한 화수화평동 사람들에게 골목은 돌봄의 그물망이다.

재개발 이후를 걱정하는 청년들에게 할머니는 유쾌하게 말한다.

“걱정 마. 죽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뭐.”

영국의 한 칼럼리스트는 분열된 사회에 대한 분석은 학자나 평론가에게 맡기고 “땅 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단절을 조금씩이라도, 단 1밀리미터씩이라도 좁히는 것”8이라 말한다. 재개발 이후에 화수화평동의 노인들이 어떻게 될지 우리도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도르리와 박할머니가 새로 짠 그물은 다시 끊기는 일이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박할머니는 손수 말린 고추를 빻아 고추장을 만들었다. 그 고추장을 도르리를 통해 만난 이웃들에게 나눠주고 싶다는 할머니 말에 도르리 청년들은 작은 병을 사 와 고추장을 담고 ‘도르리’ 스티커를 붙였다. 할머니의 고추장이 도르리의 굿즈가 되었다.

 

희망의 싹 둘

공부방에는 늘 학습부진, 학교부적응 딱지를 단 친구들이 있었다. 학습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은 친구관계나 학교생활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나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친구들과는 또다른 그 아이들이 몇년 전부터 ‘경계선 지능’이라는 진단명을 갖게 되었다. 거기에 ‘느린학습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모임을 꾸리고 그 아이들을 위한 교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느린학습자들의 어머니들이었다.

공부방이 있는 지역은 기질적·환경적 요인으로 느린학습자의 비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공부방 상근자들은 학교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아이들의 부모에게 조심스럽게 지능검사나 심리검사를 권했다. 처음엔 불쾌함을 감추지 않던 부모들이 팬데믹으로 아이들이 집 안에 고립되면서 오히려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었다. 팬데믹은 장애가 있거나 이주배경의 어린이·청소년들을 고립시켰지만 공부방에서는 지역의 청소년상담센터, 학교 복지사와 돌봄교사, 담임선생님, 드림스타트 담당자들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덕분에 공부방의 느린학습자들도 지역의 청소년상담센터와 교육지원청 위(Wee) 센터를 통해 검사와 진단을 받게 되었다.

공부방의 느린학습자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느린학습자’라는 것을 알고 나서 오히려 밝아졌다. 이제야 자신들이 학교에 적응하는 것이 왜 힘들었는지, 교우관계는 왜 늘 삐걱거렸는지, 공부가 왜 그토록 어려웠는지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공부방 고등부 안에 느린학습자들의 공부모임이 따로 꾸려졌다. 그들은 공부방 초·중등부 동생들 중에도 자신과 같은 친구들이 보인다며, 그 아이들은 좀더 일찍 검사를 받고 거기에 맞는 공부를 하게 해주면 좋겠다는 부탁까지 한다.

느린학습자를 위한 고등부 수업 담당자 중에 청년 S가 있다. S는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취업한 일터에서 정신병이 발현되었다. 당장 입원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원가정과 관계가 끊긴 상태였기 때문에 입원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당사자뿐이었다. 공동체에서는 S에게 맞는 좋은 병원을 찾으며 입원을 결정할 수 있도록 설득했다. S는 타인에 대한 의심이 커지고 환청과 환시로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공동체 식구들을 믿고 입원을 결정했다. S가 치료를 받는 동안 공동체 식구들도 정신장애에 대해 새롭게 공부했다. S가 이모 삼촌이라 부르는 공동체 어른들뿐 아니라 공부방에서 함께 자란 청년들도 S가 약을 중단하지 않고 계속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돕고 지지했다.

S는 두번의 입원치료를 거치고 통원치료와 상담치료를 병행하며 자신과 병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S는 치료 중에도 까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다가 3년간은 한 보습학원의 수학강사로 일했다. 보습학원은 꾸준히 치료를 해야 하는 S에게 안정적인 일터였지만 S는 전공을 살려 취업하기를 원했다. 자격증 공부를 하면서 공부방 초등부와 고등부의 자원교사 활동을 계속했고, 올봄 드디어 전공분야에 취업했다. 정규직으로 첫 월급을 탄 날 S가 말했다.

“저는 제가 아프고 치료받았던 그 시간이 아깝거나 후회스럽지 않아요. 처음 입원했을 때는 이모 삼촌들이랑 언니 오빠 동생들이 면회 오는 날만 기다렸어요. 이모 삼촌이랑 청년회가 면회 날짜를 조율하고, 무슨 음식을 준비할지 의논하는 게 안 봐도 다 그려졌어요. 그 시간이 참 행복했어요. 첫 입원 때 내가 왜 병이 났을까를 되돌아보다 슬퍼지면, 지금 내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했어요. 저는 두번째 입원이 더 좋았어요. 그때는 다른 환자들과 소통하고 활동도 많이 했거든요. 서로 돕고 의지하는 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그곳에서 좋은 의사선생님을 만났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제게 의미있는 시간이었어요.”

S는 투병하는 동안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서 다른 청년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고 공동체 어른들의 돌봄을 받았다. 그 덕분에 고립되지 않고 자립에 성공할 수 있었다. S는 올해 자신이 오랫동안 머물던 원룸을 공부방 후배에게 물려주고 LH전세임대주택을 얻어 이사할 계획이다. 그런데 직장에서 가까운 곳보다 공동체 청년들이 여럿 살고 있는 저층아파트를 알아보겠다고 했다. S는 몸이 조금 힘들어도 돌봄의 그물망이 있는 동네를 선택했다. 그리고 느린학습자들과 하는 수업도 계속하겠다고 한다.

“느린 속도를 가진 사람들끼리 통하는 게 있거든요.”

돌봄노동이나 돌봄노동자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사는 타인들과 협력하고 서로 ‘통하는’ 것. 이것이 ‘나와 같은 타인’의 돌봄 네트워크일 것이다.9

공동체는 느린학습자들을 위한 프로그램 못지않게 ‘느린학습자 어머니모임’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올해 상반기에 도르리에서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그림책교실을 열고 느린학습자 어머니모임으로 발전시켰다. 6월에는 그동안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던 인천의 ‘느린학습자시민회’ 활동가를 초대해 강의를 들었다. 도배사, 야간업소 캐셔, 돌봄노동자로 일하는 어머니들은 휴일마다 도르리에 모였다. 어머니들은 도르리에 와야 숨이 쉬어진다고 했다. 그들은 서로를 ‘놀랍도록 용감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제 누구누구 엄마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 프로젝트의 이름은 ‘엄청난 계획’이다. 담당자들은 ‘엄청난 계획’에 함께 참여하면서 느린학습자시민회와 지속적으로 연대해가기로 했다.

공동체는 하반기에 또다른 모임을 기획하고 있다. 이주배경을 가진 어머니들 모임이다. 50명 남짓한 공부방 아이들 중 이주배경 아이들이 11명이다. 이주배경 어머니들은 한국에 와서 이중 삼중의 고통을 겪는다. 가족 안에서의 가부장적 억압, 언어로 인한 가족과의 갈등, 자녀 양육의 어려움, 노동현장에서의 차별, 그리고 가정폭력과 경제적 어려움. 작년부터 공부방은 지역의 다문화센터, 학교 복지사와 선생님과 함께 이주배경 아이들 문제에 대처해왔다. 그 과정에서 이주배경을 가진 여성들의 커뮤니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직은 준비 중이지만 이주배경을 가진 어머니들과 어떤 그물을 짜갈지 기대가 된다.

 

 

4. 글을 닫으며

 

35년간 기찻길옆작은학교가 있던 곳은 그 시대의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곳은 강경애의 『인간문제』, 현덕의 「남생이」,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배경이 되었다. 가난한 동네였지만 IMF 전까지는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노동자, 빈민, 피란민, 이농민, 지체·정신장애인, 조직폭력배들이 함께 어울려 살았다. IMF 전후 도로변의 판잣집들이 다세대주택으로 변했고 그곳에 도시의 불안정노동자들이 들어왔다. 2003년 문 닫은 목재회사 자리에 LH아파트가 들어섰다. 아파트는 원주민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길 건너 원주민들 사는 동네나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2022년, 만석동의 판잣집에는 노인들이, 다세대주택과 아파트에는 이주민과 노동자들이 산다. 우리는 그곳에서 기찻길옆작은학교와 창작공간 도르리를 거점 삼아 어린이·청소년과 청년, 지역의 여성들과 연결망을 이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거점과 연결되는 골목 너머의 네트워크도 계속 확장해갈 생각이다. 다문화센터, 청소년상담센터, 학교, 드림스타트, 느린학습자시민회, 지역의 다양한 문화예술단체들과 여성단체들과도 연대해갈 생각이다.

2002년 우리 공동체의 세 식구가 이주해 살고 있는 강화 양도면에서도 다른 지역공동체들과 연결망을 이어가고 있다. 발달장애인 공동체, 자람작은도서관, 진강산공동체, 동네책방 등이 공부방 아이들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농촌에서는 기후위기에 대한 체감이 도시보다 더 크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앞으로 그 연결망을 통해 함께 고민하고 대안들을 마련해나갈 생각이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이 연결망들이 서로를 돕고, 서로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라고 믿는다.

지난 7월 13일 경기도 마을공동체지원센터 활동가대회에 초대받아 이야기를 나누며 아직도 곳곳에서 마을공동체 운동이 시작되고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을공동체 활동가들의 화두는 ‘서로 돌봄’이었다. 바로 전날 갔던 구산동도서관마을도 마을공동체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도서관 1층의 의료협동조합은 여성들을 위한 병원이 되어 있었고, 마을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공간들이 몇년 전보다 늘어나 있었다. 7월 16~17일 이틀간은 강화 식구들이 함께하고 있는 ‘사회적 농업 양도사람들’이 완주에서 활동하는 지역공동체 몇곳으로 견학을 다녀왔다. 여전히 지역 곳곳에서 서로를 살리는 그물망들을 이어가고 확장해가고 있었다. 지자체의 지원에 따라 그물망의 확장성과 지속성이 결정되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있었다. 삶의 현장에 발을 딛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두번의 선거에 섣불리 좌절하거나 절망할 수 없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연결망들이 끊어지지 않도록 더 단단히 잇고 뻗어가는 일이다. “모든 인간의 삶, 심지어 광야에 사는 은자의 삶도 타인이 있다는 사실을 직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세계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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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찻길옆작은학교’. 필자가 1987년 인천 만석동에서 빈민운동을 시작한 뒤, 1988년 ‘기찻길옆공부방’을 열고 지금까지 공동체로 운영해오고 있다. 2001년부터는 강화군 양도면으로 귀농해 농촌공동체를 꾸렸다. 현재 만석동에 여덟 가족, 강화에 세 가족이 청년들과 함께 공부방을 하며 다양한 지역활동을 하고 있다.
  2. 국민연금 사각지대에서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경제활동 미참여자’ 가운데 대표적인 유형이 531만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무소속 배우자’다. 이는 전체 사각지대의 42%에 해당하는데, 직장을 다니다가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식으로 연금 최소 납입기간인 10년을 채우지 못한 여성들이 대다수다. 이들은 육아와 집안일 등 가사노동을 담당했지만, 국민연금공단에선 무소득 배우자를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아도 되는 ‘적용제외자’로 분류해왔다. 「50대는 국민연금 지금 내도 못받아…“무소득 배우자, 제도 안으로”」, 한겨레 2022.7.8 참조.
  3. 「[현장영상
  4. “치명적인 산재로 장애나 질병을 얻어 노동력을 100% 상실한 중장해인” 1만1533명 중 20~30대 청년은 187명(1.6%)이다(2022년 4월 기준). 한겨레 인터랙티브 페이지 「살아남은 김용균들: 2022년 187명의 기록」 참조(www.hani.co.kr/interactive/industrial-accident/intro.hani).
  5. 디디에 에리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1, 146~48면.
  6. 「“팬덤정치의 시대, 진보는 선언이 아니라 성찰에서 온다”」, 프레시안 2022.7.13.
  7. ‘창작공간 도르리’는 ‘기찻길옆작은학교’ 공부방에서 만난 30대 청년들이 2018년 만든 창작공간이다. 지금은 기찻길옆작은학교의 선배들과 함께 다양한 예술강좌를 열고, 재개발지역의 이야기와 자료들을 모으는 작업을 하고 있다.
  8. 브래디 미카코 『아이들의 계급투쟁』, 노수경 옮김, 사계절 2019, 168면.
  9. 더 케어 컬렉티브 『돌봄선언』, 정소영 옮김, 니케북스 2021, 73면 참조.
  10.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이진우 옮김, 한길사 2019, 101면.

김중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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