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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박서영 朴瑞英
1968년 경남 고성 출생. 1995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붉은 태양이 거미를 문다』 『좋은 구름』이 있음. raga68@naver.com
삵
밤이면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이지
오랫동안 서로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며
부드러운 털 사이로 피가 나지 않을 만큼
누군가 슬픔은 뭔가를 찌르고
쪼아대는 일 따위를 모른다고 말하네
울고 싶을 때
갑자기 가로등이 꺼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사람을 끌어안으며
서로 번진다는 건 어떤 걸까
바람이 불면 목덜미에 키스하고 싶은
우리는 아무도 서로에게 망명한 적 없어
눈빛이 눈빛을 올라타고
왼손이 오른손을 올라탄 순간이 있더라도
털 사이로 피가 나지 않을 만큼
서로를 조금 할퀴다가 헤어졌을 뿐
내가 누군가를 물어뜯지 않는 건
밤이 뭔가를 기록하고 불을 지르고 가버렸기 때문,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면
삵의 울음소리가 복원된 거라고 생각해도 좋아
밤이면 다정한 사람들이 모이지
만질 수 없는데, 먼 울음 들리곤 하지
보이지 않는데, 먼 발소리 들리곤 하지
우리는 타인을 할퀴던 두 손으로
자신의 이마에 길고 흰 사랑을 기록한다
잃어버린 짠맛을 보충하기 위하여
마지막 남은 한놈을 대하듯 서로의 눈물을 핥아먹는다
슬픈치, 슬픈
통영 비진도에 설풍치(雪風峙)라는 해안언덕이 있다. 폭설과 비바람이 심해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절벽이다. 그래서 설풍치는 슬픈치로 불리기도 한다. 그 해안을 누가 다녀갔다. 길게 흘러내린 절벽치마의 올이 풀려 도도새, 여행 비둘기, 거대한 후투티, 웃는 올빼미, 큰바다쇠오리, 쿠바 붉은 잉꼬, 빨간 뜸부기. 깃털이 날아가 찢어진 치마에 달라붙는다. 다시 밤은 애틋해진다. 게스트하우스의 창문을 열어놓은 채로, 달의 문을 열어놓은 채로 잠을 잔다. 흰 눈이 쏟아진다. 커튼의 올이 풀려 코끼리새 화석의 뼈를 감싼다. 따뜻한가요? 눈사람이 끼고 있는 장갑의 올이 풀려 내 몸을 친친 감는다. 나는 달아나는 사람의 자세로 묶여 있다.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나 발견된 죽은 새를 안고 있다. 자세를 바꾸기가 쉽지 않다. 누가 다녀갔지만 슬픈치는 여전히 슬픈치로 불린다. 해안 모퉁이에 새들이 계속 쌓인다. 사랑한 만큼 쌓인다. 침묵한 만큼 쌓인다. 게스트하우스의 창문을 열어놓은 채로, 나는 여전히 당신의 절벽에 매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