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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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혜지 尹慧智

202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parrhe@naver.com

 

 

 

전전 역

 

 

추웠으므로

 

설산을 생각했다

 

눈의 원형이 고스란히 남은

산기슭 곳곳

 

묻혀 있는 게 많았다

 

걸친 것을 모조리 벗고

언 입으로 말했다

 

아버지

더워요

 

쪄 죽을 것 같아요 어떻게 좀 해봐요

제발

 

가짜 더위야

체온이 갑자기 떨어지면 도리어 열이 펄펄 나는 것 같다고

 

몸에 붙어 이야기해주는 게 있었다

 

그냥

보풀인 줄 알았는데

 

미세한 갈고리였다 갈고리들

다닥다닥

추운 사람의 표면에 꽂혔다

떨어졌다

 

떨어져서 나쁜 게 묻으면요?

이를테면 아주 작정하고 나쁜 거

그건

 

후후 불고 먹으면 된다

먹어도 돼

안 죽어

 

나는 용케 살아서

 

손잡이를 잡고 노란 안전선 안쪽에 서서

걷거나 뛰지도 않아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와

안전하게

열차를 기다린다

 

어떤 섬광

 

(상상해보세요. 푸른 초원, 부드럽고 달큰한 바람 속 신이 당신을 만들고 있습니다. 눈 코 입 모두 섬세하게.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요. 당신은 땀방울이 맺힌 신의 갈라진 턱……

 

상상이 되지 않는데요.)

 

생각을

눈 속에 파묻으면 눈은 밀가루처럼 보드라워서 결정끼리 끈끈하게 엉겨 붙는 것이다 몇천개의 눈사람을 만들 수 있을 만큼

투명하게 빛나는 몸체들을 안아줄 순 없을 테지만 한명씩 돌볼 순 있겠지, 털모자나 목도리도 해주고

그것들은 그냥 눈덩이가 아니니까 차례대로 순서를 지켜 에스컬레이터도 탈 수 있을 것이다, 몇몇은 애초에 온전치 못한 거 아닐까,란 생각은 하지 말자, 그것은 위험한 생각, 위험해서 반짝이는 생각, 냄비 속 폭설처럼 떠다니며

 

바닥은 모두 다른데 왜 다른 불로 끓이지 않는 건가요,

 

돌고 도는

에스컬레이터

 

같은 말을 반복하면 망가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제

뜨거운 말은 쓰지도

하지도 않을 것이다

 

땀이나 흘리며

여긴 참 덥다고

나는

무너질 때까지 눈 쌓이는 설산이라고

 

생각하면

열차가

 

198_icon1온다 198_icon1오지 않는다 198_icon1멈춰 있다 198_icon1기다린다 198_icon1나를 덥게 만든다 198_icon1나를 어떻게 해준다 198_icon1나를 슬픔의 눈사태 속에 묻어준다 198_icon1나를 멈춰 세운다 198_icon1나를 그만둔다 198_icon1나를 어둠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198_icon1나를 슬퍼한다 198_icon1나를 미쳤다고 한다 198_icon1나를 발로 밟는다 198_icon1나를 미워한다 198_icon1나를 죽인다 198_icon1나를 태운다 198_icon1기어이 198_icon1나를 198_icon1나를 198_icon1 198_icon1

198_icon1

 

돌이킬 수 없다

돌이킬 수 없다

없고 싶은데

 

다음 열차가

 

(어떤 섬광)

 

신이 나를 무서워한다

 

 

 

사랑과 공

 

 

어느날 나는 잠에서 깨어나 물수제비 뜨기를 생각했다

 

어린나무 심긴 강가에서 물수제비, 물수제비

 

내겐 어떤 돌이 있고 그것을 여러 방향으로 바꿔 쥐어보거나 허공에 가볍게 던졌다 잡으면서 가늠해보지만 모든 건 물에 띄워봐야 알 수 있다는 생각

 

그때 누군가 다가와 말한다 그런 돌 하나쯤 누구나 갖고 있는 거 아닌가요 나는 돌을 들어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다른 사람에게 닿은 돌은 소용없으므로 나는 돌을 버린다 진흙에 고개 박고 누워 있는 사람 악어가 나타나 강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버린다

 

까지 이야기했을 때 로봇은 왜 악어가 나오는지 물었다 이것은 삶을 은유하는 보통의 우화 아니었나요 악어는 돌연합니다

 

왜 사람을 돌로 쳤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요

 

내가 답하자 로봇은 운다

당연하다

로봇은 이야기를 들으면 울도록 만들어져 보급되었다 작동법은 토스터만큼 간단하다: 하나, 켠다 둘, 이야기한다 셋, (로봇이) 운다 넷, 끈다

 

우리는 거대한 쇼핑몰을 가로지르며 걸었다 로봇이 눈동자 너비만 한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게 나는 좀 끔찍했다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었을 뿐인데 사람에

근사할 뿐인데

 

생각했을 때

나와 로봇 사이를 찢으며 사람들이 왔다 그들은 한번쯤 뭔가를 저버린 얼굴을 가졌으므로 그것을 씻어낼 스몰토크가 필요했다

작디작은

 

개를 데리고 온 사람도 있었다

개가 해맑게 짖으면 사람이 개를 불렀다 돈나야, 돈나야, 마돈나야,

로봇의 눈물로 개를 구석구석 씻겼다

 

한번 안아봐도 될까요 나는 개를 안았다 젖은 털 냄새가 향긋했다 보드라운 공 같은 개를 품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다

 

당신도 돌을 잘 길들였다면 좋았을 텐데요

 

턱 끝에 눈물을 매단 로봇이 내게 말했고

 

나는 로봇을 강제 종료했다

개운한 얼굴로 흩어지는 사람들

 

집에 돌아가 몸에 남은 물기를 털고

누워서 코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을 때

어떤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궁금해할 것이다

 

어딘가

아무도 굴리지 않은 마음이 있다고?

손때 하나 묻지 않은?

진창에서 한바탕 뒹군 적도 없는?

 

그것이 개로,

아니,

공으로,

아니,

눈물의 잔물결 위로 부드럽게 튀어오르는

사랑스러운

돌로 현현했다고?

 

하지만

지금 나는 사람들과 떨어져

 

복잡한 배관이 숨겨진

건축물의 뼈대에 기대어 쉬고 있고

 

이대로 눈 감으면

 

다시 목가적인 풍경이

펼쳐질 테지만

 

상관없다

 

나는 어느 곳에서도 잘 살아남을 것이다 나는 로봇을 반납하고 밖으로 나온다 로봇은 비상구 옆에 놓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