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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위기의 시대, 문학의 지혜

 

질문을 바꾸면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최근 서사 속 노동 이야기 읽기

 

 

김미정 金美晶

문학평론가. 평론집 『움직이는 별자리들』 등이 있음.

metanous@naver.com

 

 

1. 2010년대 소설 속 노동 이야기가 부상시킨 것: 자본주의라는 문제계

 

반드시 노동의 문제의식이나 개념을 염두에 두고 쓰인 것은 아닐지라도,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소설에서 ‘노동’의 주제를 환기시키는 작품은 빈번하게 등장했고 서사의 스펙트럼도 넓어졌다. 예를 들어 사무실에 젊은 여성들이 출퇴근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다양한 비정규 활동이 알바, 프리랜서의 이름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돌보는 일이 노동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의 고군분투 서사는 소설 밖 노동의 장소 및 주체의 변화를 단적으로 환기시켰다. 예컨대 1980년대 노동문학에서 노동은 대공장 산업노동 중심성을 띠고 있었다. 일하는 젊은 여성들의 서사를 표방한 2000년대 칙릿(chick-lit)소설에서도 소비 주체로서의 측면이 두드러졌던 것에 비할 때, 2010년대 소설이 부각시킨 산업구조 및 노동 주체의 변화가 무엇인지는 뚜렷하다.

이때 경쟁을 지나온 이들의 안도감과 성취감이 서사의 중심축이 되는 장면도 의미심장하다. 한 소설의 주인공은 “20대 중반까지는 돈을 지불하고 뭔가를 학습하고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런데 이젠 돈을 내는 것이 아니라 받았고, 내 머리와 손끝을 써서 뭔가를 생산해 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았다. 쓸모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라고 말한다. 또다른 소설의 주인공은 정규직 채용 전 건강검진을 받은 후 비로소 “존중받”은 느낌이었다고 고백한다.1 소설마다 맥락은 다르지만 이런 감각들은 취업 빙하기, 청년실업 시대의 불안과 공포를 통과한 이들의 생존서사와 무관치 않을 것이다. 오늘날 노동이 개인의 능력(주의)과 직결되는 회로도 여기에서 환기된다. 개체 간 차이가 능력의 차이로 환원되고 그것이 자연화하는 것은 노동이 왜곡되는 흔한 회로의 하나다. 실제 소설 속 인물들 사이에서도 이 회로에 기반하는 경쟁구도는 자주 의식되고, 때로 각자의 자존감을 좌우하는 요인으로 놓이곤 한다.2

한편 그동안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아온 다양한 활동을 노동 개념을 통해 틀 지으며 그 의미를 확인시킨 것도 최근 소설의 성취다. 특히 2010년대 중반 이후 소설에 이르러 돌봄활동 속 젠더 역학이 뚜렷이 폭로되었다. 동시에 돌봄이 여성이나 주변인의 일로 간주된 채 급격히 시장화하고 공공 시스템이 부재하는 오늘날의 상황도 조밀하게 드러났다.3 인물, 계층, 세대 간 갈등이나 시장 안의 수요자와 제공자 사이의 갈등이 전경화하는 가운데, 돌봄을 둘러싼 ‘가부장×자본’의 문제가 일상 구석구석에 침투해 있음도 환기시켰다. 그런데 이런 폭로는 돌봄이 시장의 교환체계 속에 고착해 있다는 착시를 만들거나 고된 노동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돌봄활동의 특수성과 정동을 망각시키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이로 인해 돌봄 혹은 소외된 노동은 시민권을 얻는 동시에 여전히 폄훼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아이러니에 갇히곤 한다.4

이것은 일종의 서사적 곤경일 테지만, 결국은 보이지 않거나 소외된 노동이 가까스로 발견된 자리에서 다시 극적으로 부상한 자본주의로 인한 모두의 곤경일 것이다. 소설서사에서 노동은 작가가 의식했든 하지 않았든 늘 자본·자본주의와의 관계를 함축한다. 앞서 나열한 최근 소설서사의 몇몇 특징 역시 개별 작품의 결여나 결함으로 이야기하기 전에, 자본-노동의 관계 변화와 얽힘 양상을 통해 읽어야 한다. 오늘날 소설 안팎의 노동의 장면이 어떤 곤경과 이행을 보이고 있는지 가늠하기 위해 2018년 이후 발표된 몇편의 소설을 더 읽어본다.

 

 

2. 부드러운 통치술, 공모되는 사람들

 

2018년 화제가 되었던 장류진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일의 기쁨과 슬픔』)은 앞서 언급한 문학사적 변화를 함축하고 있었고, 판교 테크노밸리라는 장소의 상징성을 통해 한국의 노동조건 변화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여기서 다시 읽고 싶은 부분은, 소설 속 한 인물(‘거북이 알’)이 월급 대신 포인트를 지급받고 그에 대처하는 과정이다. 월급 대신 지급된 포인트란 직장 내 괴롭힘 혹은 부당대우로 따져 물어야 할 노동권 침해다. 이 일의 당사자 역시 “굴욕감에 침잠된 채”(51면) 밤을 지새운다. 하지만 그녀는 빠르게 상황의 변화를 추수하는데, 월급을 포인트로 받는 상황에 맞추어 간명하게 자기를 조율하는 장면이 상징적이다. 이런 가뿐해 ‘보이는’ 전환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따지고 보면 주인공의 처세·응전 방법은 그렇게 발현되게끔 회로화된 메커니즘과 연동되어 있다. 소설 속 세계는 이미 포인트를 현금화·현물화할 수 있는 조밀한 시스템과 방법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온라인 플랫폼의 통상적 회로에 능통한 이들에게 그것은 익숙한 리얼리티다. 또한 포인트와 화폐의 호환이라는 설정은 오늘날 ‘가상’화폐의 상징성에 근접해 있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굴욕감은 어쩌면 그리 어렵지 않게, 타협하며 휘발시킬 수 있는 것인지 모른다. 소설 속 문제들이 처리되는 방식에서 개인화한 양상을 읽어내는 것5도 합당하고, “윤리적인 지점을 초과하는 미묘한 활기”에 대한 지적6도 유의미하다. 하지만 반복건대, 이미 소설 안팎에서 충분히 조밀하게 마련되어 있는 구조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 세계의 통치술은 이미 페널티와 보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사람들을 자발적으로—물론 이것이 진짜 자발적인지는 질문되어야 하지만—공모시킨다.

이쯤에서 잠시 스마트폰을 떠올려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러 이유와 목적에서 우리는 하루 종일 스스로의 신체와 스마트폰을 동기화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단순히 기술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과거 고정자본이 공장의 벽을 넘어 오늘날 이동성을 지닌 스마트한 디바이스로 이동·확장했다고 논해지는 상황 7이 바로 여기에 있다. 주지하듯 근대의 노동이란 시계의 발명으로 상징되는 근대적 시간 개념에 기초하여 측정되고 정의되어왔다. 그러나 지금 결정적으로 그 시간 개념이 달라지고 있다. 단적으로 필요에 따라 연결된 단체대화방과 여러 종류의 SNS는 밤낮 구별 없이 공적인지 사적인지 불분명한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송하며 우리의 응답을 기다린다. 일인지 휴식인지, 공적인 것인지 사적인 것인지 혼란스러워하며 우리는 계속 무언가를 한다. 일과 휴식, 노동과 여가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우리는 “모든 삶의 모든 시간 전체가 생산적이 되도록”8 요구받는다. 이렇듯 일/휴식의 근대적 구분조차 애매해진 상황이지만, 가치화=화폐화는 계속 진행된다. 이 자본 장치에 우리가 적극 동기화되어 각자의 역능을 공모하도록 하는 것이 오늘날 통치술의 한 방법이다.

직접적으로 착취하고 수탈하는 자본의 성격이 두드러지던 시절의 많은 노동서사는 그로부터 존엄을 희구하는 안간힘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오늘날 자본은 사람들 스스로 공모하게 만들며 교묘하고 “부드러운 전제(專制)” 9를 행한다. 물론 이것이 존재의 수동성이나 결정성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제’를 수식하는 ‘부드러운’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오늘날 통치술은 직접적인 강요와 억압의 성격을 띠지 않는 경향이 점점 커지고 있다. 오히려 우리 몸의 고유한 역능을 동기화시키며 작동하도록 해 스스로의 필요와 욕망도 함께 충족시킨다. 즉 2010년대 중반 이후 서사에서의 노동은 예컨대 김세희 「가만한 나날」 속 바이럴마케팅 업무가 상징하듯, 과거에 비할 수 없이 훨씬 추상화되었다. 이 업무는 광고주(기업)의 민낯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분식(粉飾)시킨다. 근래 소통의 메커니즘이 발신자-메시지-수신자를 전제로 한 고전적 모델을 뛰어넘어 발신자와 수신자의 경계를 지운 상황에서 작동하고 있음을 소설 속 주인공의 일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즉 자본과의 적대 및 안과 밖의 구별이 지워진 듯한 자리에 그녀들이 있다. 최근 소설 속에서 일이나 시스템의 성격에 따라 인물 및 서사의 향방이 결정되는 경향 10 또는 신자유주의적 능력주의 서사에 대한 소설적 입장이 모호해 보이는 측면11도 이러한 조건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자본과 불화하는 마지막 보루 같았던 예술(노동)을 재현하는 서사에서도 이런 양상을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다.12 2020년 발표된 임솔아의 「내가 아는 가장 밝은 세계」(『아무것도 아니라고 잘라 말하기』, 문학과지성사 2021)는 최근 한국적 모순이 압축된 부동산 문제를 첨예하게 포착했다. 이 소설은 한국에서의 부동산 열풍이 어떻게 사람들의 욕망을 자가발전시켰는지 보여주는 동시에 바로 그 욕망에 의해 열풍이 지지되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그런데 소설에서 이 욕망 메커니즘의 마디 하나를 담당하는 이가 바로 소설가 주인공이다. 10년차 프리랜서 소설가인 주인공은 생활인으로서의 영위를 위한 조건들(은행 대출, 건강보험) 속에서 내내 허둥지둥한다. 나름 성공한 예술가로 인정받지만 “위촉된 적 없는 직책의 해촉증명서를 발급받기 위해”(140면) 고군분투해야 하는 점에서 그녀는 현대의 무수한 비정규 직능인 중 한명일 뿐이다. 여기에는 예술가가 예술노동자로 지칭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나아가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논의도 함께 겹쳐진다.13

더 살펴볼 것은 소설의 결말에서 주인공이 보이는 선택이다. 본래 주인공은 온 세상 사람들의 폭력적 ‘웃음’에 동참하지 않는 대신 “무표정”(130면)을 고집해왔고, 그것이 곧 그녀가 택한 “자긍심”(132면)이라고 할 만했다. 하지만 주인공은 결국 세상과 타협하며 세상의 웃음에 동참해버리는 위악의 포즈를 보이며 각자도생의 메커니즘에 대한 냉소와 그 메커니즘에 연루된 자로서의 자기혐오를 드러낸다. 하필 주인공이 소설가라는 점에서 이는 자본주의의 반대자를 낭만적으로나마 자처할 수 있던 예술의 무기력을 선언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나아가 예술-시장 관계가 오히려 인물의 선택과 결정에 있어 알리바이처럼 사용되는 측면까지도 암시하고 있다.

2021년 발표된 박서련의 소설 「A Queen Sized Hole」(『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민음사 2022) 역시 오늘날 예술가의 비루한 초상을 그려낸다. 근대 자본주의 초창기의 예술가들은 시대로부터의 소외를 자처하며 그것에 역설적으로 추동된 이들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외감이란 일종의 자긍심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장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국가의 보호를 간절히 청구해야만 하는 오늘날 예술가의 분열적 소외감과 옛 시절의 자긍심 어린 소외감이 동일할 리 없다. 시민의 지위를 요구받고 보장받는 자리, 곧 “건보료와 국민연금과 전기세, 수도세, 통화료 고지서, 대출 인지세, 보증료 같은 것”(235면)에 허덕이며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글쓰기는 기능적·도구적·계산적인 글쓰기와 결코 충돌하지도 이질적이지도 않다.

이런 이유에서 「A Queen Sized Hole」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소설에서는 가볍게 처리되지만) 주인공의 소소한 내적 갈등이다. 소설가 주인공은 오래전의 친구와 만나게 되면서 그 만남을 자기 소설에서 활용할지 말지 고민한다. 소설에 활용하는 과정에서 그 친구의 추억을 훼손하거나 그녀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으로부터 우리 앞에 떠오르는 것은 명확하다. 즉 최근 스캔들이 된 소위 ‘창작(자)의 윤리’ 문제를 환기하고, 나아가 그것의 근본적 배후를 짐작게 한다. 창작 윤리와 관련한 최근의 스캔들은 많은 이가 짐작했듯 결코 개인화할 수 없는 구조적인 이유를 갖는다. 하지만 이 ‘구조적’ 이유는 흔히 이야기되는 문학계와 문학권력의 문제를 넘어서 있다. 이것은 이미 계급 범주를 넘어 삶의 일반적 양태가 되어버린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의 세계와 직결된다. 끊임없이 요구받는 창작의 성과, 그리고 당장 생활인으로서의 생존과 자기보존 등의 압박이 창작·글쓰기의 ‘윤리’ 문제에까지 닿아 있음은 과장이 아니다. 각자도생의 심상이 불러일으켜지고 그 과정에서 경험하는 직접적인 압박감은 다른 선택지에 대한 시야를 확보하지 못하게 한다. 창작 윤리를 비롯하여 우리의 판단과 선택 모두 궁극적으로 오늘날의 통치술을 지우고 이야기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주체로서의 의지가 발휘되는 지점이 모호해진 것(장류진), 각자도생의 심상과 동기화되며 자기보존하는 회로(임솔아), 창작 윤리에마저 스며든 불안정한 삶과 계급의 양태(박서련) 모두 오늘날 자본주의의 실질적 포섭이라고 일컬어지는 상황을 서사적으로 확인시키는 듯하다. 반복건대, 이 시대의 자본주의는 부드러운 권력 장치(agencement)이다. 수직적 착취나 수탈을 노골화하지 않고, 인권과 노동권을 배려하는 인간의 얼굴을 지니고 있으며, 더 많은 존재의 필요와 욕망을 연루시키며 자가발전한다. 이러한 자본주의를 계속 질문해야하는 이유는, 그것이 이 세계 존재들의 삶과 상상력 자체를 제약하고 포획하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3. 그런데 질문을 바꾸면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다시 일종의 자본주의 리얼리즘14을 연상시킬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이 상황 자체가 품고 있는 다른 차원이 이야기되지 않아온 것에 문제를 제기하려 한다. 이제 최근 세계 및 소설에서 미묘하게 달라진 지점을 읽을 차례다. 이서수 장편소설 『헬프 미 시스터』(은행나무 2022)는 오늘날 노동-자본 관계의 최전선을 함축하는 플랫폼 노동 이야기이자 그 노동현장에 뛰어든 가족의 분투기다. 여기서도 상황은 썩 좋지 않다.

소설 속에서, 직장 내 성범죄 피해 여성이 오히려 퇴사를 한다. 가족부양의 책임은 트라우마마저 사치스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주식과 코인을 위시한 금융자본이 제패한 세계에서 노동의 의미는 초라하다. 키오스크(무인주문시스템)로 상징되는 기술발전은 세대 간 격차를 벌리며 낙오자를 대량생산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것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다. 스마트폰 앱의 알림음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신체의 주인은 나라고 하기 어렵다. ‘굿헬스케어’(건강산업)와 ‘골드안마’(성매매산업)라는 상호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분리되지 않는 세계다. 아이들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온라인 세계로 이동한 성착취와 폭력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일일이 거론하기 어려운, 그러나 관찰력과 직관 없이는 포착하기 쉽지 않은 2022년 삶과 노동의 최전선이 이 소설에 서사화되어 있다.

여기에는 대공장 산업노동에 기반을 두었던 이른바 포드주의시대의 노동과 미국의 실리콘밸리(혹은 한국의 여러 테크노밸리)로 상징되는 포스트-포드주의시대 노동의 차이가 놓여 있을 것이다. 소설 속 인물들은 다양한 플랫폼 앞에서 상시 대기하다가 일시적이고 유동적인 일의 현장에 투입된다. 서로 늘 연결되어 있지만 실상은 지극히 파편화되어 있어서 같은 일을 한다는 동질감조차 느끼지 못한다. 소설 속 일의 현장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의 노동 유연화와 포스트-포드주의의 테크놀로지가 결합한 공간을 단적으로 보여주지 않을까. 이곳에서 노동자/자본가(사업자)/소비자 식의 구획된 정체성은 이전보다 쉽게 무화된다. 예컨대 플랫폼 배달노동자가 법적으로는 자기사업자(사장님)이지만 실제로는 고된 작업현장의 노동자라는 이중구속적 상황은 사람들끼리의 연결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당사자 자신마저 분열시킨다.

즉, 앞서 언급한 작품들에서 엿본 시대의 조건을 『헬프 미 시스터』는 고도로 세련되게 집약해놓았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오늘날 노동-자본의 조건에 대한 폐색감 대신, 그 조건 자체에서 비롯된 ‘다른 벡터’의 이야기가 있다. 이 소설이 겨루고자 한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고 믿는 시대의 감각은 아니었을까. 소설은 ‘바깥은 없다’는 인식과 동기화되기보다 거기에서 조심스레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이를 확신하게 만드는 장면들을 잠시 살펴본다.

우선, 파편화된 관계들이 느슨하고 일시적으로나마 연합할 가능성이 타진된다. 예를 들어 플랫폼 배달일을 시작한 주인공 ‘수경’ ‘우재’ 부부는 작가, 시민활동가와 술자리에서 합석하고 대화를 이어간다. 여기서 작가, 시민활동가란 그 설정에서부터 미묘한 긴장감을 자아내는 인물군이다. 앞서 임솔아 박서련 소설의 글 쓰는 주인공들에게서도 확인했고, 김혜진 『9번의 일』(한겨레출판 2019)에서 재현된 노조의 모습에서도 엿볼 수 있듯 최근 한국소설 속에서 예술이나 시민활동은 질문 혹은 의심의 대상인 듯하다. 이는 그들로 대표되던 일종의 ‘바깥’에 대한 상상, 행위, 의도가 질문받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15

소설 속 합석 장면 역시 처음에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작가, 시민활동가에게서 계몽과 위선의 포즈가 암시되는 서술은 내내 긴장감을 자아낸다. 하지만 모두가 비슷한 처지인 “별 볼 일 없”는(166면) 사람들임을 확인하면서 분위기는 누그러지고 서로가 무장해제된다. 일시적 장소에서 “가족이 아닌 사람들과 함께 웃고 떠”(167면)드는 일로 생성되는 연결감은 플랫폼 노동의 연결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 장면은 소설이 혈연가족 중심의 관계를 강조하며 흘러가지 않도록 하는, 빠져서는 안 될 중요한 대목이다. 작가, 활동가의 일을 바라보는 소설의 시선은 탈낭만화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함께 울고 웃고 떠드는’ 장소를 만들고 잇고 상상해온 이들의 역할과 의미는 재환기되고 있다. 그 장소를 만드는 느슨한 연합의 원리와 그 행위자들에 대한 사유를 소설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소설이 상대적으로 어린 인물들(‘보라’ ‘은지’ ‘준후’)에게 한줌의 기대를 보태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이때 미래 세대는 클리셰적 낙관으로 이상화되어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스물세살인 보라는 “노력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82면)다는 믿음으로 주위의 사람들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로, 2010년대 내내 현실세계의 변화를 주도한 힘과 용기를 집약해 의인화한 존재다. 한편 미성년자 은지와 준후는 이른바 플랫폼 없는 세계를 경험해본 적 없는 세대다. 이들은 플랫폼 자본주의에 가장 익숙할뿐더러 거기에 위태롭게 공모되어 있지만, 때로는 플랫폼의 틈새를 이용해 복수를 할 줄도 안다. 즉 세상의 이치를 ‘덜’ 깨달았기 때문에 낙관할 수 있는 유의 미성년자가 아니라, 이 세계의 작동방식을 가장 잘 알고 있기에 다른 곳으로 뛰쳐나갈 방법도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고안해볼 수 있는 존재다. 세계의 달라진 조건에 익숙하고 능란하다는 것이 곧바로 다른 사건성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확히 알아야 정확히 상상할 수 있다. 그 앎과 상상과 실천의 시간이 누구 쪽으로 더 많이 열려 있는지는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하면 오늘날 무기력해진 말 중 하나가 ‘희망’일 것이다. 『헬프 미 시스터』는 이 ‘희망’이라는 말을 성급히 소환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을 폐기하는 것을 조심스레 유보하며 그 의미를 ‘시간’을 통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가령 소설 속 보라 은지 준후를 통해 떠올린 것은 공교롭게도 지금으로부터 한세기 전 루쉰이 적은 말이었다. “나는 비록 내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희망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을 말살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희망이라는 것은 미래를 향하는 것이므로, 반드시 없다고 하는 내 확신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그의 주장을 꺾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6

루쉰은 그의 앞에 펼쳐질 시대와 역사에 대해 직감했을 것이다. 그것이 결코 희망과 낙관의 서사일 리만은 없음을 알고 있었을 그는 희망을 긍정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곤 했다. 하지만 그는 희망을 맹목의 구조로부터 탈구시켰다. 희망이라는 말을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의, 그러므로 무엇이 될지 모르는 그 백지의 가능성에 비끄러맸다. 여기에서 부상하는 것은 바로 ‘도래하지 않은 시간’, 그렇기에 ‘무엇이든 될 가능성이 있는 오지 않은 미래’다. 어쩌면 지금 『헬프 미 시스터』를 통해 더 읽어야 할 것은 궁극적으로 이것일지 모른다. 무엇이 될지 아직 모르며, 때문에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그 미래와 잠재성을 부정할 이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예감 혹은 추측만 가능할 뿐, 강조하건대 아무도 경험하지 않은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지 않은 시간을 부정과 비관으로 짐작하게 하는 것은 결국 누구·무엇의 욕망이고, 누구·무엇을 이롭게 하는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오늘날 통치술은 아직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 오지 않은 시간을 현재의 비관에 접합해 ‘현재의 것’으로 선취하고 전유하고자 한다. 자주 사용되는 ‘선제(先制, pre-emption)’17와 같은 말도 그와 관련된다. 통치술의 의도는 분명하다. 아득한 목적지로서의 희망을 맹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적어도 미래를 암흑으로 선취하려는 힘의 속임수는 정확히 알아차려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소설 속 플랫폼이라는 장소 역시 질문의 대상임을 강조하고 싶다. 이는 소설 바깥의 논의와도 접속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소설에서 인물들이 돈을 필요로 할 때 플랫폼과 네트워크는 정확히 거기에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시간은 온종일 플랫폼에 구속되어 있고, 플랫폼은 곧 그들 세계의 매트릭스처럼 보인다. 또한 소설 속 인물들은 플랫폼을 통해 소소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러한 네트워크를 플랫폼은 이용한다. 우리가 이루는 네트워크적 협력, 공통적인 것에 오늘날 자본주의가 기생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양상이 단적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의 삶이 플랫폼에 종속되어 있고 자본주의 바깥은 없다는 말이 다시 떠오를 수 있겠으나, 달리 보아 우리의 연결과 협력 없이는 플랫폼도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동시에 기억해야 한다.18 우리의 역량(commons)을 다시 가져올 조건이 바로 이 지점이라는 것, 자본주의가 이 힘을 빌리지 않고 매끄럽게 작동할 수 없다는 것. 이런 의미에서 최근 고정자본으로서의 데이터, 기술 등을 재전유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이미 널리 공유되며 설득력을 얻고 있다는 사실을 적어둔다.19

제목 ‘헬프 미 시스터’를 바로 이러한 재전유의 상상과 연결시켜볼 수 있지 않을까. 소설에서 ‘헬프 미 시스터’는 다양한 플랫폼 노동현장 중 하나이자 여성의 불안을 타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앱이다. 여성의 불안이 시장에서 소구력 있는 자원으로 활용되는 양상을 보여주지만 이 또한 어떤 식으로 변화해갈지 아직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이 앱을 통해 현재 사람들은 끊임없이 “나는 누군가 필요합니다”(304면)라고 발신하고 응답한다. 우리를 불안정하고 취약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세계이고, 세계는 우리의 불안정함과 취약함을 이용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불안정함과 취약함으로 인해 소설 속 이들은 연결되고 만나고 있다. 이러한 아이러니가 품은 가능성이 지금 여기에 뒤섞여 있다.

 

 

4. 상상력 해방시키기

 

오랫동안 문학을 이야기하며 자본주의를 말하지 않아온 것은 그것이 이미 ‘자연(自然)’이 되었다거나 너무 큰 이야기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기피는 어쩌면 ‘바깥은 없다’라는 믿음의 결과 혹은 통치술의 가스라이팅 효과였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오늘날 자본주의의 멸망보다 지구의 멸망을 상상하기 더 쉬워하는’ 세태에 대한 지적20 이상도 말해본 적이 별로 없다. 물론 자본주의(시스템)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켜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문학에서 익숙하다. 하지만 지금 정작 질문되어야 할 것은 ‘바깥은 없다’라는 바로 그 인식 혹은 믿음에 대해서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장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믿음’의 체계21다. 압도적인 것, 바깥은 없다고 여겨지는 것일수록 맹목적 믿음에 의해 지지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믿음 혹은 오인의 구조를 질문하지 않는 상상력이 오히려 질문되어야 한다.

즉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행한 것을 묻는 대신에, 거꾸로 우리가 자본주의를 위해 무엇을 해왔고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 질문해보면 어떨까.22 통상적인 사고의 전제를 바꾸어보는 것이다. 예컨대 화폐가 존재하기에 앞서 인간-비인간 행위자가 먼저 존재해왔다는 것. 오늘날 자본주의는 더욱더 우리의 활동과 협력 없이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 단적으로 구글, 페이스북 같은 플랫폼 기업 역시 나를 포함한 유저가 제공하는 주인 없는 데이터 더미 없이 존속할 수 없다는 것. 투쟁은 늘 억압에 앞서 있었다는 것. 이런 식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조금 다른 이야기도 짚어본다. 최근 한국소설에 ‘유령’ 혹은 ‘영혼’ 등 비인간 존재들이 들어오는 장면이 흥미롭다. 공히 인간의 상태를 경험한 바 있는 이 존재들은 소설에서 다양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재현으로 증명할 수 없는 모호한 진실을 확인시키는 매개자 역할을 하거나(구소현), 이루지 못한 소망 충족의 대리자가 되거나(임선우), 인간들끼리 선뜻 내보이기 어려워하는 마음(내면)의 표현-연결자가 되거나(김멜라 임선우), 몸을 잃은 형체없는 마음들이 세상을 부유하는 과정이 그려진다(김지연).23

이는 소설에 간헐적으로만 등장하던 이전의 유령과는 확연히 다르다. 지금은 유령이 아니라면 서사가 전개될 수 없거나 달라졌을 정도로 이들은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또한 이들은 단독적인 행위자라기보다 인간/비인간, 생물/무생물, 유기체/무기체 식의 구획을 지우며 움직이는 일종의 연합과 배치(assemblage)에 가깝다. 소설마다 양상은 다르지만, 이들은 이 세계에서 현실의 범주를 질문한다. 현실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드러나거나 현행화되지 않은 것 너머의 보이지 않는 힘을 환기시키고 증거한다.

이러한 유령의 등장 역시 ‘바깥은 없다’라는 믿음에 미학적으로 반응하는 의식적·무의식적 교섭이라고 생각한다. 내내 폐색적인 세계 속에서도, 늘 소리 없이 여기저기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균열들 덕분에 어쩌면 우리는 질식하지 않을 수 있었다. 유령들은 현실과 비현실 혹은 보여지는 세계 너머의 전모를 순간적으로 감지시킨다. 이 세계에 엄연히 존재하지만 쉽게 가시화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부정되거나 지워지는 것들을 증거하는 힘이기도 하다. 이러한 유령의 방법은 앞서 『헬프 미 시스터』에서 엿본 작가-시민활동가-플랫폼 노동자의 느슨한 연결, 그리고 보라 은지 준후가 상징하는 오지 않은 시간, 나아가 플랫폼의 조건 자체가 곧 역전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사실 등과 분명히 상통한다. 그 잠재성을 더 많이 발견하고 현행화하는 일은 이제 읽는 이가 함께 고민할 몫일 것이다.

‘질문을 바꾸면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앞서 적어두었다. 이것은 반복건대 ‘다른 것이 보이기 시작’하는 상상력의 출발에 대한 말이다. 그러므로 당장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견고한 믿음 자체를 질문하고 그것에 동의하지 않을 용기다. 결정되지 않은 것, 오지 않은 시간을 누가 어떻게 상상하고 선취하느냐 하는 문제에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세계의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 즉,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미래에 대한 이 연루의 책임이다. 상상력을 해방시켜야 할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1. 앞의 인용은 김세희 「가만한 나날」(『가만한 나날』, 민음사 2019)의 구절로, 주인공에게 일이란 “성취감” “프로” “능력” 같은 가치들과 관련된다고 기술된다. 뒤의 인용은 장류진의 「백한번째 이력서와 첫번째 출근길」(『일의 기쁨과 슬픔』, 창비 2019)의 구절이다. 두 작품은 각각 2017년, 2018년 발표되었다.
  2. 이와 관련하여, 2021년경의 몇몇 소설이 노동에 대한 관습적 가치평가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과정에서 보인 난점(공정-능력주의의 착종이나 노동에 대한 일면적 인식을 보여주는 측면)을 지적한 한영인 「우리 시대의 노동 이야기」(『창작과비평』 2021년 봄호)도 좋은 참고가 된다.
  3. 여기에서 염두에 둔 작품은 김유담 「돌보는 마음」(『돌보는 마음』, 민음사 2022), 장류진 「도움의 손길」(『일의 기쁨과 슬픔』), 이미상 「여자가 지하철 할 때」(『문장 웹진』 2020년 9월호) 등이다. 또한 돌봄의 서사화를 다루면서 “페미니즘에 의한 자본주의 비판”을 역설하는 이지은 「재생산노동력의 상품화와 여성 연대의 곤경: 장류진 「도움의 손길」에 부치는 주석」(『문학동네』 2019년 겨울호) 및 환대나 돌봄이 “가난에 대한 일종의 형벌이나 희생에 가까운 수동적 행위로 간주”되는 양상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박서양 「비평 연재 실험」(『웹진 비유』 2021년 11월호)도 이 주제와 관련된 참고목록이다.
  4. 돌봄을 노동의 자리에 놓을 수 있게 된 계기라 할 1970년대 서구의 가사노동 임금투쟁이 궁극적으로 ‘가부장제×자본주의’로부터의 이탈을 목표로 했음을 생각하면 지금 돌봄 및 돌봄서사의 딜레마가 무엇인지 선명하다. 이와 관련해 팬데믹을 겪으며 드러난 돌봄의 위기와 가능성 모두를 포착하고 사회를 바꾸는 개방적 삶의 실천과 전환의 원리를 발견하려는 백지연 「삶의 전환을 꿈꾸는 돌봄의 상상력」(『창작과비평』 2021년 여름호), 나아가 돌봄을 취약성과 연결하는 통상적 해석으로부터 이탈시켜 보편적이고 중심적인 가치로서 급진화하는 황정아 「가치로서의 돌봄」(『개념과 소통』 28호, 2021)도 중요하게 참고할 수 있다.
  5. 반드시 이 소설에 대한 것만은 아니지만, “일의 소외, 노동의 소외 양상은 더 심해졌”지만 “저항의 양상”이나 “소통과 연대의 정서는 거의 찾기 힘들”고 “고립된 단자론의 세계”만을 보여준다는 비판도 기억해두어야 한다. 오길영 「노동소설에서 사회소설로: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과 김혜진 『9번의 일』」(『황해문화』 2020년 여름호) 참조.
  6. 강경석·서영인·강지희·이철주 좌담 「새로운 작가들의 젠더·노동·세대감각」(『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중 강지희의 말.
  7. 이것이 기술비관론으로 연결될 리 없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노동개념 변화에 대해서는 이미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논의가 축적되어 있지만,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참고한 것은 질 들뢰즈 외 『비물질노동과 다중』(서창현 외 옮김, 갈무리 2005)과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어셈블리』(이승준·정유진 옮김, 알렙 2020), 조너선 크레리 『24/7 잠의 종말』(김성호 옮김, 문학동네 2014) 등의 논의다.
  8.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앞의 책 173면.
  9.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정치』, 조성훈 옮김, 갈무리 2018, 90면.
  10. 졸고 「부드러운 전제와 노동-자본의 뫼비우스띠」(반교어문학회 『위기와 성찰의 뉴노멀 시대』, 보고사 2022) 참조.
  11. 한영인, 앞의 글 참조.
  12. 여기에서 언급하는 소설들은 졸고 「숲을 돌보는 시간」(『문학과사회』 2022년 봄호), 「여성 서사의 자긍심」(『문학과사회』 2022년 여름호)에서 다룬 바 있는데, 당시 서평 형식 내에서 충분히 논하지 못한 문제의식을 구체화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13. 2010년대 문화예술계에서 있었던 ‘예술노동’의 의제화와 그에 대한 논의들이 함께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14.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잘 알려져 있듯 맑시즘 문화비평가 마크 피셔(Mark Fisher)의 말이다. 피셔는 1990년대 이래로 신자유주의가 유일한 경제정책이 된 오늘날 1세계 사람들의 감각을 지시하며 이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의 바깥에 대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그것이 ‘바깥 없음’에 대한 체념으로만 풍미되는 경향은 떨쳐지지 않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수사적·수행적 효과 측면에서라도 이 말을 탈구축해야 한다고 여기기에, 여기에서는 극복의 대상으로 지칭한다.
  15. 김혜진 『9번의 일』(한겨레출판 2019)에서 노조와 사측이 등가적으로 그려지는 장면은 재현 및 시선에 대한 작가의 고민과 관련된다. 하지만 익숙한 표상으로부터 이탈시키고 외부로부터의 판단을 되도록 개입시키지 않으려는 듯한 이러한 재현법이 의도치 않게 또다른 편향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한영인, 앞의 글 및 졸고 「부드러운 전제와 노동-자본의 뫼비우스띠」 참조. 또한 이것은 과거 가치들의 전선(戰線)이 무화된 오늘날 전방위적인 가치 헤게모니 쟁탈 상황과도 연관시켜 살필 주제다.
  16. 루쉰 「자서」, 『루쉰 소설 전집』, 김시준 옮김, 서울대출판부 1996, 8~9면.
  17. 권력과 행정의 용어로도 익숙해진 ‘선제’라는 말과 관련해서는 브라이언 마수미 『존재권력』(최성희·김지영 옮김, 갈무리 2021)이 중요한 참조가 된다.
  18. “자본주의가 하나의 생산 양식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들의 생산”(질 들뢰즈 외, 앞의 책 240면)이며, “자본주의는 자연을 형성한다. 자연은 자본주의를 형성한다”(제이슨 W.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47면)는 말은 정확히 여기에서 복기되어야 할 것이다. 내내 강조했듯 자본주의가 우리의 ‘공통적인 것’에 더욱 의존하는 경향 자체가 마치 ‘바깥은 없다’라는 말의 완벽한 실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공통적인 것’ 없이는 자본주의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19. 이러한 문제의식은 한국에서도 연이어 논의되고 있는 듯하다. 『창작과비평』의 커먼즈 논의(2018년 여름호), 계간 『문화과학』의 플랫폼 자본주의 및 커먼즈 논의(2017년 겨울호 및 2022년 봄호), 이광석 『피지컬 커먼즈』(갈무리 2021) 등의 논의를 참조할 수 있다.
  20. 대표적 논자로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과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을 들 수 있다.
  21. 정용택 「물질 없는 유물론 대 물신 없는 가치론」(『뉴래디컬 리뷰』 2022년 여름호) 참조. 정용택의 글은 유물론적 종교 비판의 관점에서 한국사회를 비판적으로 조망한 것이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가 물신주의적 믿음의 체계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한 글로도 읽을 수 있다.
  22. 이 문장은 정확히 다음 문장의 패러디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자연에 행하는 바가 무엇인지 묻는 대신에 자연이 자본주의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물음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제이슨 W. 무어, 앞의 책 37면) 맑시즘 생태주의자 제이슨 무어(Jason W. Moore)는 지구 생태계의 문제를 사유하는 전제로서 자본주의와 자연의 통상적 이분법적 관계를 재설정하고 출발하는데, 이는 최근의 커먼즈 논의의 방법과도 상통하는 바가 있다.
  23. 이 대목과 관련되는 소설은 다음과 같다. 구소현 「시트론 호러」(『문학들』 2021년 여름호), 임선우 「유령의 마음으로」 「빛이 나지 않아요」 「커튼콜, 연장전, 라스트 팡」(『유령의 마음으로』, 민음사 2022), 김멜라 「제 꿈 꾸세요」(『제 꿈 꾸세요』, 문학동네 2022), 김지연 「내가 울기 시작할 때」(『마음에 없는 소리』, 문학동네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