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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위기의 시대, 문학의 지혜

 

문명전환기의 감각에 대하여

시인의 감수성과 소설가의 상상력

 

 

김용휘 金容暉

대구대 자유전공학부 교수, 방정환배움공동체 ‘구름달’ 대표. 저서 『우리학문으로서의 동학』 『최제우의 철학』 등이 있음.

not-two@hanmail.net

 

 

땅에 내려앉다

 

올봄 드디어 땅에 내려앉게 되었다. 자연농에 대한 오랜 동경이 있었지만 엄두를 내지 못했다. 땅도 없었다. 그러던 차에 아는 분이 300평 땅을 빌려주었다. 작년까지 농약과 비료, 제초제로 농사짓던 땅이었다. 검은 비닐이 덮여 있었고, 산짐승을 피하기 위해 울타리도 쳐져 있었다. 제일 먼저 울타리와 비닐을 걷어내고 새로 밭두둑을 만들었다. 달팽이 모양, 반달 모양, 열쇠구멍 모양으로 밭을 만들었다. 익숙하지 않은 삽질과 호미질은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마음은 갈수록 편안해졌다. 먼 길을 돌아서 근본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말로만 동학을 하는 것이 싫어져서 가담하게 된 것이 환경운동이었다. 이명박정부 때였다. 환경운동은 최전선이었다. 4대강에서부터 제주 강정, 밀양 송전탑, 탈핵, 소성리 사드까지 많은 현장을 누볐다. 곳곳에서 자본의 욕망과 부딪혔다. 환경의 문제는 결국 경제의 문제이며, 정치의 문제라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중 어떤 싸움도 이기지 못했다. 내 안의 분노를 평화로 바꾸는 것이 승리의 유일한 지표일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묘한 기쁨이 있었다. 더운 한여름 땀을 비 오듯 적시면서 걸었던 생명평화 순례길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천막농성장의 한구석에서 쭈그려 지새운 하룻밤이 그 어떤 잠보다 달콤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의 목소리를 따르는 삶을 살게 된 기쁨이었을까? 그 길에서 만난 얼굴들은 투쟁의 한가운데서도 때때로 어린아이 같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제도권 사람들에게서는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웃음이었다.

그러다가 2018년 봄, 우연찮은 계기로 세계적인 생태영성공동체, 인도 오로빌(Auroville)에 가게 되었다. 오로빌은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영적 구루였던 스리 오로빈도(Sri Aurobindo, 1872~1950)의 정신을 계승하는 공동체다. 오로빈도는 우리 인류가 진화를 통해 지금의 이성적 존재를 넘어 영성적 존재, 신성(神性)의식을 가진 신인류로 한번 더 거듭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국적·인종·종교 등 모든 대립과 분열을 넘어 평화롭게 공존하며 신성한 삶을 누리는 것이 가능하다며 ‘인류의 일체성’(human unity)을 비전으로 제시했다. 나는 오로빈도의 사상이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1824~64)의 동학과 많은 부분에서 상통한다고 느꼈다. 비슷한 시기 이 둘은 의식의 진화와 인간 완성, 그리고 새로운 문명의 도래를 우주 진화와 역사의 필연으로 예언했다. 이들은 당시 서구문명의 충격 앞에서 단순한 저항이나 무조건적 수용의 길이 아닌 민중의 입장에서 서양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이는 길을 탐구했으며, 오랜 민족의 영성과 지혜를 바탕으로 그것을 재해석함으로써 동서를 넘어선 신문명의 비전을 제시했다.

나는 오로빈도를 통해 지금까지 동학을 일국적 관점에서만 바라보았던 시선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즉 동학과 같은 민중적 사상운동이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게 아니라, 제3세계 민중들이 당시 제국주의적 세계질서에 대응해서 일어난 보편적 민중운동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반면 오로빌에서의 생활은 대안적 삶과 자본주의를 넘어선 체제전환이 얼마나 지난한 과제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진정한 변화는 인간적 성숙을 전제한 영적 각성이 수반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새길 수 있었다.

오로빌에서의 삶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만 2년이 채 안 되었을 때 코로나19로 인해 귀국길에 올랐다. 정착한 곳은 경주였다. 다행히 인근 대학에 강의할 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올해 인연이 된 것이 용담정 아래의 밭이었다. 수운 선생의 묘소에서도 멀지 않은 곳이다. 기계를 쓰지 않고 모든 일을 호미와 삽으로 했고, 개울에서 직접 길어서 물을 주었다. 그러다보니 두달 동안 비 한방울 안 내리는 봄 가뭄을 온몸이 타들어가는 고통으로 느끼며 기후위기가 현실이라는 것을 절감했다. 반면 오랜 가뭄 끝에 비가 내릴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컸다. “비님,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씨앗에서 싹이 트고 봉오리가 맺힐 때의 기쁨도 마찬가지였다. 밭 위로 두루미가 날고, 저녁 어스름 은은한 달빛의 황홀감 역시 표현하기 어렵다. 땅에 내려앉으면서 나는, 비로소 깊은 숨이 쉬어졌다.

 

 

위기의 징후들

 

경주의 시골살이는 나름 평온하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려 세상을 보면 금세 마음이 우울해진다. 때로는 분노가 치밀기도 한다. 도대체 희망이 있는가 싶은 생각에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 기후위기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에너지 소비의 지속적 증가, 지나친 개발 광풍, 생물다양성 소멸, 사막화, 쓰레기 문제도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시장만능주의로 인한 서민 삶의 붕괴, 물신주의 팽배에서 오는 소외, 정신의 위기 또한 심각하다. 최근 들어 미중 간의 갈등과 전략경쟁이 치열해지고, 우끄라이나전쟁 등으로 국제적 긴장도 고조되는 상황이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이민자나 난민, 소수자를 외면하는 극우정당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게다가 연일 들려오는 국내 정치권의 뉴스는 차라리 코미디 같아 헛웃음이 나온다. 그런가 하면 한편에선 4차 산업의 기술문명이 더 가속화되고 있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자율주행, 사물인터넷, 비대면산업, 바이오기술 등이 코로나19로 인해 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무엇보다도 현재 피부로 느껴지는 가장 큰 어려움은 대한민국의 무너진 삶이다. 여기저기서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하늘을 찌르고, 불안과 혐오가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모든 분야가 돈의 지배 아래 놓인 매우 천박한 사회가 되었다. 경제적 불평등과 소득격차도 날로 심화되고 있다. 국제구호개발기구 옥스팜(Oxfam)에서 2022년 발표한 불평등 보고서 「죽음을 부르는 불평등」(Inequality Kills)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10% 부자들이 전체 부의 58.5%를 차지하고, 하위 50%가 고작 5.6%를 나누어 가지고 있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케이크 10조각을 두고서 열명 중 한 사람이 6조각을 독차지해 먹고, 네 사람이 3조각 반을 나눠 먹고, 마지막 다섯 사람은 고작 반조각을 쪼개어 먹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중에서도 하위 10%에 속하는 사람들에게는 손톱만 한 조각밖에 돌아가지 않는다. 그러니 곳곳에서 삶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가족들을 살해하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가 이제는 더이상 충격적으로 들리지도 않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사실 가난 자체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차별이다. 못 가졌다는 이유로,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행해지는 온갖 사회적 차별과 갑질, 인간적 무시와 손가락질이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힘든 모멸감과 열패감을 느끼게 한다.

나는 최근의 공정 논쟁이 아주 슬프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공정 논쟁은 상위 10%가 가져가는 케이크의 양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오히려 하위 50%끼리 케이크 반조각을 나누는 방식을 두고 싸우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청년과 여성,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점점 더 고통스러워지고 있다. 20대 대학생들을—더욱이 지방대에서—주로 마주해야 하는 나로선 학생들을 보는 것이 정말 미안하고 괴로울 때가 많다. 우리가 대학을 다니던 때에 비하면 학생들의 얼굴이 너무나 어둡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을 감추지 못하고, 늘 깊은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자주 느낀다. 그들에게 연애를 하고 청춘을 구가하는 것은 배부른 소리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과 출산을 포기했다고 하는 ‘삼포세대’ 이야기가 괜한 말이 아니라 정말 눈앞의 현실이다.

 

 

불평등, 세가지 관점으로 보다

 

이런 고민들을 하다보니, 어느 순간 철학을 이론적으로만 뇌까리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제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는 특히 2012년 무렵 프레시안에서 전개된 ‘한국경제 성격’ 논쟁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1 당시 논쟁은 크게 보면 역동적 복지국가론, 공정사회론, 경제민주화론이 저마다의 입장에서 상대를 논박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복지국가를 논하는 쪽은 모든 문제의 근원에 신자유주의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들은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신자유주의가 전면화되면서 시장만능주의와 승자독식의 미친 경쟁사회가 되었고, 이로써 서민들의 삶이 나락에 떨어졌으며 불평등이 심화되었다고 보았다. 따라서 대안으로 부의 재분배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역할, 즉 역동적 복지국가를 강조했다.2 반면 공정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신자유주의가 핵심이 아니며 그보다는 한국적 특수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평가와 보상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특권층은 계속 특권과 특혜를 누리는 반면 그렇지 못한 약자들은 지나치게 경쟁에 노출되어 최소한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이다.3 그런가 하면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우리 사회의 모든 민생파탄의 이면에는 재벌 문제가 근원적으로 깔려 있다고 보았다. 재벌의 독점과 문어발식 경영, 정경유착, 중소기업 착취, 비정규직 양산, 무분별한 개발사업 등 재벌을 개혁하지 않고서는 중소기업과의 상생 문제도, 지역의 난개발이나 비정규직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4

비전문가의 입장에서 이 논쟁을 관망하면서 세 논의가 다 일리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두 자기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상대는 틀렸다고 논박하고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대한민국의 민생파탄은 이 중 어느 하나만의 문제라기보다 세가지가 복합적으로 작동되어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대외적으로는 신자유주의가, 대내적으로는 불공정이, 그리고 역사적으로는 일제강점과 군사정권에서 성장한 재벌 문제가 함께 작동해서 민생파탄이 일어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 하나 보태자면, 분단체제 문제 역시 심각하게 작동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많은 갈등은 분단체제로 인해 비롯된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갈등은 물론, 세대갈등도 일정 부분 분단으로 야기된 측면이 있다. 정치도 종종 정책대결보단 이념대결로 가버린다. 심지어 경제적 평등의 주장, 양극화 해소 같은 의제들조차 ‘종북적’ 사고로 매도되기도 한다. 분단이 우리의 정신 역시 반쪽으로 만들어 사고의 경직성을 초래한 것이다. 이처럼 배제와 이분법적 사고를 무의식적으로 강요당함으로써 우리는 다양한 상상력의 발휘나 창의적이고 통합적 사고를 제약받아왔다.

 

 

기후위기, 문제는 탄소가 아니다

 

이렇게 볼 때 나는 기후위기의 원인 역시 다각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기후위기에 대한 논의는 대부분 ‘탄소’ 문제를 중심으로 접근되고 있다. 탄소배출이 증가해서 지구온난화가 생겼고,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지구 온도상승을 1.5도 이내에서 멈추게 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 2050년까지 ‘탄소중립’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탄소가 기후위기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데 이견은 없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환경문제는 사회문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다. 환경문제는 경제성장과 산업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 속에서 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 전쟁, 제3세계의 저발전이라는 사회문제가 동시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탄소배출이 증가한 데는 산업화 이후 화석연료에 의존한 산업구조가 있고, 그 배경에는 오로지 양적 성장에 매몰된 경제성장주의, 그리고 칼 폴라니(Karl Polanyi)가 지적하듯이 상품화해서는 안 되는 세가지—자연(토지)과 인간(노동)과 신용(금융)—를 상품화하면서 성장해온 자본주의가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문제를 놔두고 탄소배출만 문제 삼아서는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주목한 사람이 바로 네이오미 클라인(Naomi Klein)인데, 그녀는 기후위기의 근본 원인은 탄소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이며, 따라서 자본주의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서는 기후위기를 절대 해결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더 살 만한 환경, 현재의 경제보다 더 공정한 경제를 맞이하기 위한 사회변화를 시급히 이루어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5

여기에 더해, 더 근원적인 원인으로 자연을 바라보는 ‘근대적 세계관’을 꼽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심신이원론, 기계론적 세계관이라고 이야기되는 근대 서구인들의 세계관, 자연을 한낱 객관적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마음껏 정복하고 착취해도 좋은 물질적 대상으로만 여긴 그들의 관점 자체가 기후위기의 근본적 원인인 것이다. 서양도 근대 이전에는 자연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심신이원론, 기계론적 세계관은 물질과 정신의 분리, 과학과 종교의 분리, 감각세계와 정신세계의 분리를 초래하면서, 근대세계를 천박한 물리주의가 판치는 세상으로 만들어버렸다.

 

 

성장에서 균형으로, 문명전환의 사유

 

따라서 기후위기를 비롯한 문명적 위기는 단순한 탄소의 위기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이며, 그것의 인식론적 기반이 되는 근대체제 전체의 위기다. 때문에 이는 단순히 근대적응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결국 근대극복, 즉 자본주의의 체제전환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대해서 백낙청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약탈적 자본축적의 전면화와 이에 따른 빈부격차의 확대, 기후변화에서 실감되는 지구환경의 파멸적 변동, 탐(貪)·진(瞋)·치(癡)를 운행원리로 삼은 사회체제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성의 황폐화, 전대미문의 기술발전에 대해 이를 맹종하든 ‘제어’하든 똑같이 기술주의적인 대응을 넘어서지 못하는 인간의 지혜와 사유능력의 고갈 등을 보면서 바야흐로 문명의 대전환을 절실히 요망하지 않을 수 없다.6

 

다른 것도 그렇지만, 특히 기후위기는 우리가 그동안 자연을 대하고 인간을 대하고 공동체를 대하던 방식의 전면적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문명적 대전환을 하지 않으면 인류가 더이상 지구에서 생존할 수 없다는 엄중한 경고인 것이다.

몇년 전 한국을 방문한 프란치스꼬 교황은 “막대한 부의 옆에서는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내고 노동자들을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을 거부하고, 물질주의의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고 충고한 바 있다.7 자본주의적 경제체제의 근본적인 재편 없이는 사회문제와 환경문제뿐 아니라 지금 벼랑 끝으로 향하고 있는 생태적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 점점 자명해지고 있다.

여기서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을 수는 없지만, 우리 사회가 이제 이 문제에 모든 지성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당장 전면적인 전환이 어렵다면 우선 경제 기조라도 ‘성장에서 균형으로’ 전환되어야 할 것이다. 이제 GDP(국내총생산) 중심의 양적 성장론에서 탈피하고 불평등 해소와 생태계 보존, 그리고 실질적인 ‘삶의 질’을 목표로 하는 ‘균형경제’로 가야 한다. 원래 GDP 지표는 1930년대 공황기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자리 잡은 양적 성장론으로, 위기상황에서 전쟁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고 경제적 군수자원을 조직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이는 양적인 효용 총량만 중시하고, 이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부정적 효과, 불평등구조는 개의치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자원의 무제한적 소모, 환경오염과 도박 및 범죄행위, 약탈적 자본의 유입 같은 활동들도 양의 형태로 GDP 지수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이다. 반면 사회적 봉사와 공헌, 물물교환으로 이루어지는 지역경제, 그리고 가계활동은 반영이 안 된다. GDP와 행복의 상관관계도 1만~1만 5천불까지, 즉 최소한의 삶의 기초재 공급이 원활해지는 정도까지는 관련이 있지만, 그 이상이 되면 상관관계가 약해지며 오히려 더 떨어지기도 한다.8 이런 이유로 현재 대한민국은 GDP가 3만불이 넘는 경제선진국이 되었지만 국민행복지수, GDP 대비 복지예산 비중, 아동 삶의 질, 부패지수, 조세의 불평등개선 지수, 출생률과 자살률, 노조 조직률, 평균 수면시간 등에서는 OECD 최악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국민의 삶의 질 그리고 행복과 직접적으로 관계있는 지수를 중심으로 경제정책의 목표를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그중 하나가 ‘발전종합지수’의 도입이다. 여기에 대해 이래경은 다음과 같이 역설하고 있다.

 

미래의 한국사회를 위하여, 몰가치한 경제총량 중심의 평가지표로서 불평등과 불안정을 조장하고 자원을 고갈시키고 환경오염을 유발할 수 있는 GDP 개념을 폐기하고, 사회개발지수를 중심으로 한 발전종합지수(TDI, Total Development Index)의 도입을 주장하고자 한다.9

 

이와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새로운 경제 모델을 주장하는 이는 영국의 케이트 레이워스(Kate Raworth)로 그의 경제학을 ‘도넛 경제학’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도넛 모양의 안쪽 경계와 바깥쪽 경계를 잘 관리하는 방향으로 경제 목표가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여기서 안쪽 경계는 그 이하로 떨어지면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사회적 기초를 의미하고, 바깥쪽 경계는 그 이상으로 벗어날 경우 치명적인 환경위기를 초래하는 생태적 한계선이다. 이 도넛 경제학은 인류가 직면한 사회적·생태적 도전을 해결하는 그야말로 ‘균형경제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균형경제론은 자본주의체제 전환까지는 아니지만 당장의 불평등과 생태위기를 상당 부분 완화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책 대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아이디어를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더 확장해, 수도권과 지방의 경제적 균형, 남녀 임금의 균형, 세대·지역 간의 소득 균형, 나아가 남북 경제의 균형까지 포괄하는 ‘한국식 균형경제론’으로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좀더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시장이냐 국가냐’라는 이분법을 넘어서 다원적 체제, 지역적 계획경제를 표방했던 칼 폴라니의 사유도 검토해봄직하다.10 여기에 해방 정국에서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11이 추구했던 신국가건설의 비전, 즉 ‘조선식 신민주주의’에 나타난 정치이념을 참고해봐도 좋겠다.

 

우리는 미국형의 자본가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를 원치 않는다. 그는 자본제도의 내포한 모순과 폐해를 미리부터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소련류인 무산자 독재의 프로민주주의도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조선에는 일찍이 자본계급의 전횡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조선의 현단계에 적응한 ‘조선적 신민주주의’를 주장한다. 조선의 신민주주의란 어떤 것이냐.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을 경중선후(輕重先後)의 차별 없이 동일한 목적으로 취급하는 민주주의이다. 조선의 자주독립과 아울러 조선민족사회에 맞는 민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 민주도덕을 동시에 실현하려는 민주주의이다.12

 

이처럼 우리는 1947년에 이미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와 소련식의 프로민주주의를 넘어선 새로운 체제를 고민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 청우당은 ‘조선식 신민주주의’의 새로운 정치는 물론 일체의 차별적 구조를 혁파하는 ‘동귀일체(同歸一體) 순환경제’,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한울님으로 섬기는 ‘사인여천(事人如天)’에 바탕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주창했다.

시장에만 맡겨야 한다는 신자유주의 30년간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고, 서민의 삶은 내동댕이쳐졌으며, 자연은 더 많이 파괴되었다. 그렇다고 다시 사회주의적 국가계획경제가 답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대안은 시장의 장점을 잘 살리면서도 꼭 필요한 공공 부문은 국가가 직접 관리하되, 지역의 민간경제를 더 크게 확대하는 것이다. 시장과 국가와 민간이 각각 3분의 1씩 역할을 하는, 이른바 새로운 ‘삼균주의’라 할 수도 있겠다.

통일을 앞두고 한반도의 새로운 경제 시스템을 고민해야 하는 지금, 어느 일방의 체제로 재편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균형경제’의 관점에서 빈부 간, 남녀 간, 정규직/비정규직 간, 지역 간, 그리고 남북 간의 격차를 줄이고, 최종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물질과 정신의 이분법적 사유를 넘어서 근본적인 삶의 변화를 고민해야 할 때이다.

 

 

시인의 근본적 감각과 소설가의 상상력

 

그런데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위기의 가장 근원적인 부분에는 역시 세계관의 문제, 인식론적 문제가 있다. 심신이원론과 기계론적 세계관을 넘어선 새로운 인식론, 세계관이 간절히 요구된다. 그런 점에서 동양에 풍부한 자연주의적 세계관, 불교의 화엄(華嚴)이라든지 노자적 사유, 또 동학의 천지부모(天地父母)나 경물(敬物) 같은 사유가 절실하다. 그리고 북미 원주민들의 사유라든지 하와이 원주민들이 자연에 갖는 태도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런 세계관의 전환은 단순한 인식의 전환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더 근원적으로 느낌과 감각의 차원에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근대문명을 형성시킨 세계관을 감각의 차원에서부터 전환하여 자연과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에 근본적 변화를 도모하지 않고서는 이 위기를 발본적으로 극복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을 단순히 물질이라고 보는 관점을 넘어, 그 너머에 내재한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감각과 그런 마음의 회복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을 생태적 감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고, 미학적 감수성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시인에게 요구되는, 아니 훌륭한 시인이라면 이미 가지고 있는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요컨대, 시적 사유의 본질에는 어떠한 인공적인 조작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세계의 근원적인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에 대한 본능적인 인식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시인은 바로 이러한 근원적인 아름다움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그것을 보존하기 위한 싸움에 헌신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손으로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이 있는’ 데 대한 근본적 감각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시가 태어나는 모태이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진정한 시인은 본질적으로 가장 심오한 생태론자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13

 

고(故) 김종철 선생이 말한 “인간의 손으로 건드려서는 안 될 것”에 대해 사유해보건대 돈으로 환원될 수 없는, 상품화되어서는 안 되는 생명의 고유한 영역, 삶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지칭한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시인은 자본의 욕망에 따라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자연과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진리투쟁을 하는 최후의 전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진정한 시인은 아름다움이 파괴되는 것, 숲이 훼손되고 강이 파헤쳐지는 것을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아픔으로 느꼈던 것이다. 그들은 위대한 선사들이 그랬듯이, 모든 존재들이 근원에서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근본감각에 입각해서 시를 썼다.

동학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이 이야기한 천지를 부모님처럼 섬기라는 ‘천지부모’의 가르침이나, 차별받는 빈천한 자들을 먼저 하늘님으로 공경하고 나아가 물건조차도 공경하라고 했던 ‘경물’의 가르침이 바로 이런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으리라. 특히 해월은 한 아이가 땅을 쿵쿵 밟고 지나가는 소리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저 아이의 나막신 소리에 내 가슴이 아프구나.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고 하였다.14 땅이 밟히는 것을 자신의 신체적 아픔으로 느끼는 이 감각, ‘네가 곧 나’이며, 너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이라는 감각의 회복이야말로 우리가 이 천박한 시대를 건널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아닌가 한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점은, 비록 다른 존재의 고통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끼고, 때로 분노하고 통곡해야 하지만 그로 인해 마음이 무너져선 안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진정한 시인은 고통을 먹고 되새김질한 뒤 다시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켜서 시(詩)로 내놓았던 것이다.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시인의 소명이다. 세상의 고통에, 시대의 아픔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김수영 「풀」 부분

 

시인이 그랬듯, 비바람이 몰아치는 밤이면 괴로워하고 울기도 하고 엎어지기도 하지만 일어나야 한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야 한다. 우리는 애벌레에서 고치로 응고된 시간을 견뎌야 하지만, 다시 나비로 날아올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 마음을 어루만지며, 얼음물을 정수리에 들이붓고라도 새벽별처럼 깨어 진주를 빚어내야 한다.

이처럼 사람들의 가슴이 깨어나고 시인과 같은 감각을 회복할 때 새로운 세상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 소설가의 상상력이 보태져야 비로소 희망을 노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종종 인문학을 ‘더 좋은 삶에 대한 상상력을 기르는 학문’이라고 정의해왔다. 물론 철학자도 이에 해당하지만, 상상에 있어서는 소설가가 가장 뛰어난 존재인 것 같다. 나는 더 좋은 삶은 있으며,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가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좋음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다. 다만 모든 것이 다 좋고 그 자체로 긍정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다양성을 위시한 상대주의는 자칫 우리 삶의 더 좋고 나은 가치에 대한 기준을 발견하지 못하는 허무주의로 빠지기 쉽다. 각자의 좋음과 각자의 아름다움이 교향악처럼 어우러지는 세상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세상이며, 수운이 말한 동귀일체가 아닐까 한다. 수운의 무극대도(無極大道)는 상대주의와 허무주의를 넘어 ‘영원한 진리’를 말했다. 물론 이는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없으며, 나의 인격과 삶을 통해서 드러내야 하는 그 무엇일 뿐이다.

나는 지금보다 더 좋은 삶에 대해, 더 살 만한 세상에 대해 소설가들이 최대한의 상상력을 발휘해주기를 희망한다. 좋은 설계도가 있어야 좋은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좋은 미래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지금 인공지능이나 유전공학이 가져올 디스토피아에 대한 SF 소설과 영화들이 많은 것으로 안다. 반대로 좋은 미래를 상상하는 소설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는다. 기술문명이 가져올 미래의 재앙을 앞서 우려하고 경계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어야 한다.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양식을 상상하고, 사막에 나무를 심고,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면서, 더 높은 가치를 향해 지칠 줄 모르는 열망으로 좌충우돌하는 선한 눈빛의 주인공을 많이 만나고 싶다. 결국 상상력이 현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내 안의 하늘을 구현하는 삶

 

세상이 여러모로 어수선하다. 안타까운 소식과 함께 비관적인 전망도 많이 들린다. 거대한 기후위기 앞에서, 안타까운 정치적 현실 속에서, 돈으로 미쳐 돌아가는 시장사회의 거대한 광기 속에서 ‘과연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라는 무력감을 담은 자조마저 터져나온다. 고백하건대 나도 그중 한 사람으로 때때로 절망감이 든다. 그래도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동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애써 객관적 거리와 초월적 시선을 확보하고 이 현실을 냉철하게 바라보려고 한다.

나는 두 지점에서 그래도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하나는, 자연은 인간보다 더 위대하다는 점이다.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최근엔 다시 객체지향의 철학, 신유물론이 유행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자연은 인간에 의해 수동적으로 구성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자연의 위대한 힘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정말 천지부모로서, 우리 생명의 근원으로서, 그 자체로 우주적 의식과 신성(神性)을 가진 위대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두번째로 우주적 진화의 관점에서 볼 때, 이제 인류는 이성의 단계를 넘어 신성의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야흐로 애벌레에서 나비로 깨어나고 있다는 전망이다. 우주의 역사는 물질에서 생명으로, 생명에서 의식으로 진화해온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던 우주의식이 때가 되어서 물질로, 생명으로, 의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온 역사라고 볼 수 있다. 이제 우주의식이 이성의 단계를 넘어 본래적 신성을 온전히 드러낼 때가 되었다. 우주의식을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하느님은 우주 위에서 인간을 심판하는 절대자가 아니라, 이 우주에 가득 찬 신성한 에너지이며, 그 자체로 무한한 사랑이자 평화이며, 모든 어둠과 무지를 깨뜨리는 광명이며 영원한 지혜인 것이다. 이제 그 우주의식이 오랜 진화를 통해 비로소 본래적 신성과 광명을 드러낼 수 있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음이 문명전환의 진정한 의미일 수 있다. 새로운 복된 소식이다. 수운이 자기 안에서 하늘을 발견하라는 의미도 바로 사랑과 광명과 지혜, 신성과 아름다움으로서의 하늘을 자기의 인격 속에서 그리고 삶 속에서 실현하라는 의미였다. 이제 내 안의 하늘을 구현해야 할 때다.

호미를 들고 땅에 내려앉고 보니 비로소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보이고, 은은한 달빛이 느껴진다. 어느덧 내 마음도 구름이 되어 땅으로 내려온다. 빗물이 초목의 몸으로 녹아든다. 생명이 꿈틀거리고 꽃이 피어난다. 달빛과 꽃향기가 우주에 가득하다.

 

 

  1. 2012년 장하준·정승일·이종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부키)와 김상조 『종횡무진 한국경제』(오마이북) 출간을 계기로 점화되어 개혁진보 성향의 경제학자들이 다수 참여한 논쟁으로, 재벌개혁의 구체적 방법론을 둘러싼 이견에서 시작해 한국사회의 새로운 사회경제 모델을 논하는 성격을 띠었다.
  2.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장하준의 다음 책들 참조. 『나쁜 사마리아인들』, 부키 2007;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부키 2010; 『국가의 역할』, 부키 2006.
  3. 공정사회론은 김대호 『2013년 이후: 희망코리아 가는 길』, 백산서당 2012 참조.
  4. 경제민주화론은 유종일 『유종일의 진보 경제학』, 모티브북 2012 참조.
  5. 나오미 클라인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이순희 옮김, 열린책들 2016 참조.
  6. 백낙청 『근대의 이중과제와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창비 2021, 344면.
  7. 「교황 “노동자 소외시키는 비인간적 경제모델 거부해야”」, 한겨레 2014.8.15.; 「교황 시복미사 강론 “가난한 사람들 울부짖음…”」, 한겨레 2014.8.16.
  8. 이래경 『다른 백년을 꿈꾸자: 한국사회의 대변혁은 가능하다』, 책담 2017, 282~83면 참조.
  9. 이래경, 같은 책 287면.
  10. 칼 폴라니 『전 세계적 자본주의인가 지역적 계획경제인가』, 홍기빈 옮김, 책세상 2008.
  11. 1930년 신·구파로 분열되어 있던 천도교단이 합동함에 따라 천도교청년단과 천도교청년동맹도 합동해 1931년 창당한 청년 기반의 정치적 정당. 1939년 해체되었다가 해방 후 부활해 남조선청우당, 북조선청우당이 각각 결성되었다. 남한에서는 1949년 당시 정부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북한에서는 오늘날까지 천도교청우당이 유일의 종교 기반 정당으로 존재하고 있다.
  12. 김병제 외 『천도교의 정치이념』, 모시는사람들 2015, 52면.
  13. 김종철 『시적 인간과 생태적 인간』, 삼인 2018, 6~7면.
  14. 「성(誠)·경(敬)·신(信)」, 『해월신사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