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문학평론

 

이야기에는 끝이 있지만

서사 속 죽음과 루프적 시간의 리얼리즘

 

 

인아영 印雅瑛

문학평론가. 공저서로 『문학은 위험하다』, 주요 평론으로 「개와 나무와 양말과 시: 2020년대 시에 나타난 ‘타자’와 비인간 물질의 정치생태학」 등이 있음.

itwontdo@gmail.com

 

 

1. 게임적 리얼리즘의 환생

 

이듬해인 2023년부터 깐(Cannes) 국제영화제에서 비디오게임 부문 시상식을 개최한다는 소식이 들려온다.1 영화제에서 게임 부문을 시상하는 사례가 처음은 아니지만,2 선도적인 문화산업으로서뿐 아니라 복합적인 예술창작물로서 비디오게임의 성취는 앞으로 더 적극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 같다. 이른바 ‘고티’(GOTY, Game of the year)라고 불리는 게임 시상식들 중 게임의 서사적 완성도를 평가하는 내러티브 부문을 개설한 경우는 이미 적지 않다. 그러나 주류 서사양식이 된 영화 장르에서 열리는 이 제1회 깐 게이밍 페스티벌(Cannes Gaming Festival)은 게임을 디자인, 음악, 프로그래밍의 종합 산물로서뿐 아니라 이제 하나의 서사예술로서 이해하고 있는 듯 보인다. 국내에서도 얼마 전 『게임 제너레이션』이라는 웹진이 창간되고 게임비평공모전이 열리는 등 게임을 예술비평의 대상으로서 다루는 씬이 확장되고 있다.3 더이상 서사와 문학이 등치되지 않는 시대에 서사의 장르적 영역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오늘날 소비되고 있는 이야기의 주요한 형태로서 게임서사를 간과할 수 없게 된 시대에 게임서사를 경유하여 문학은 어떻게 논의될 수 있을까?

시간성의 리얼리티는 문학서사와 게임서사의 결정적인 차이점으로 여겨져왔다. ‘게임 같은 소설’은 다른 소설과 달리 근본적으로 현실과의 관련성을 제대로 모색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사람은 오오쯔까 에이지(大塚英志)였다.4 게임은 서사 속 캐릭터의 죽음을 언제나 ‘리셋(reset)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현실의 죽음을 그려낼 수 있는 문학적인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5 플레이어가 죽음을 세이브하고 리셋할 수 있는 한, 시각적인 화면에서 죽음이 아무리 사실적으로 묘사된다고 하더라도 게임은 시간성의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없다. 즉, 태어난 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은 유한하며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는 자명한 현실은 게임상에서 아무런 의미값을 지니지 못한다. 물론 오오쯔까가 말하는 ‘게임 같은 소설’은 테이블토크 롤플레잉 게임(TRPG)의 원칙을 기초로 삼는 1990년대 일본의 캐릭터 소설에 대해 설명한다는 전제가 붙어 있고, 시간성의 리얼리티를 문학성의 주요한 척도로 삼을 수 있는지에 관해서도 논박의 여지가 있다. 애초에 반박되기 쉬운 주장일 수 있지만,6 오오쯔까의 논의는 게임서사의 문학적 가능성, 혹은 게임서사를 경유한 문학서사의 가능성에 관한 질문으로 전환하는 데 좋은 단초를 제공한다. 게임서사나 게임 기법에 기초한 서사는 정말로 죽음을 ‘리얼’하게 다루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리셋 가능성이라는 요소는 리얼리즘적인 서사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만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어떤 서사에 어떤 방식으로 기능할까?

2019년 모비우스 디지털이 개발하고 안나푸르나 인터랙티브가 배급하여 2020년 수많은 상을 휩쓴 액션 어드벤처 게임 ‘아우터 와일즈’(Outer Wilds)는 현시점에서 위 질문에 가장 성실하고도 치열하게 응답하고 있는 게임일지 모른다. 초보 우주비행사인 플레이어가 수십만년 전에 멸종된 노마이족의 흔적을 찾아 우주선을 타고 태양계의 여러 행성을 탐험하는 이 게임에서도 죽음은 리셋 가능한 무엇이다. 플레이어는 초신성이 되어 폭발하는 태양에 관한 단서를 하나씩 모아 각 행성의 숨겨진 장소를 찾으면서 연쇄적인 퍼즐을 풀어야만 결말에 이를 수 있는데, 도중에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플레이어의 목숨은 무한하게 제공된다. 미세한 우주선 조종에 실패해 뜨거운 태양에 빠지거나, 순식간에 차오르는 모래에 머리끝까지 파묻히거나, 우주복 탱크에 공기가 부족해 숨이 끊어지더라도, 그러니까 죽음에 이르더라도, 플레이어는 잠에서 깨어나 모닥불 앞에서 마시멜로를 구워 먹는 첫 장면으로 되돌아가 고요하고 아름다운 우주를 유영하는 모험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게임에서 무한하게 리셋되는 죽음은 독특한 면이 있다. 두가지 의미에서 필연적이기 때문이다.7 첫째, 플레이어는 플레이 능력과 무관하게, 죽음에 이를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게임이 시작된 후 22분이 지나면 무조건 죽게 되어 있다. 수십만년 전 노마이족이 어마어마한 태양 폭발 에너지를 이용하기 위해 태양을 인공적으로 폭발시킨 뒤, 22분 전의 과거로 돌아가기를 끝없이 되풀이하는 시간 시스템을 구축해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플레이어는 22분마다 태양의 초신성 폭발을 강제로 목격하며 죽음을 반복적으로 경험해야 한다. 리셋 가능성이 특정한 단위의 시간 안에 갇힌 타임루프인 셈이다. 이를 ‘루프적 죽음’이라 부르자. 둘째, 게임의 결말에서 우주는 멸망하고 플레이어는 죽게 되어 있다. 플레이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모험에 투입되지만, 서사의 경로를 따라가다보면 무한히 반복되는 태양의 초신성 폭발을 멈추고 우주의 멸망을 막으려는 방향으로 추동된다. 그러나 온갖 고생을 통과하고 마침내 결말에 이르러 알게 되는 것은 인공적인 태양 폭발이 아니더라도 우주는 본디 생명을 다해가는 시점이었다는 사실, 즉 플레이어는 단지 우주가 소멸하기 직전의 시대에 태어나는 바람에 이 모든 정황을 목격했을 뿐 어떤 역할도 할 수 없으며 남은 것은 곧 닥쳐올 죽음을 맞이하는 일뿐이라는 허망한 사실이다.8 이를 ‘결말적 죽음’이라 부르자. 루프적 죽음이 죽음의 리셋 가능성을 토대로 작동하는 게임의 일반적인 서사양식이라면, 결말적 죽음은 게임이라는 장르와 무관하게 이야기 내적으로 설계된 엔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가지 필연적인 죽음은 따로 놓고 보면 심상해 보이지만, 하나의 서사 안에서 결합되었을 때는 특별한 결과를 산출한다. 여타의 게임에서 루프적 죽음이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서사의 승리에 가까워지기 위한 도움닫기의 역할을 한다면, 아우터 와일즈에서 루프적 죽음은 결말을 예비하는 방식으로 서사의 패배를 완성하기 위한 과정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우주의 멸망을 막기 위해 열심히 플레이했는데도 강제로 주어지는 실패 엔딩은 플레이어로서 수용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태양 폭발을 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22분마다 하던 모험을 멈추고 눈앞의 모든 것이 스러져가는 장면을 바라보며 죽음을 기다리는 체험을 수없이 되풀이하다보면, 진짜 죽음을 향한 마지막 여정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플레이 도중에는 알 수 없지만 ‘루프적 죽음’은 ‘결말적 죽음’을, 나아가 태어난 모든 존재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실을 결국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만드는 반복적 연습인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성의 리얼리티를 제거하는 장치인 리셋 가능성을 활용하여 오히려 죽음에 대한 리얼한 감각의 재현을 성취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서사뿐 아니라 문학을 비롯한 서사 장르는 어쩌면 루프적 시간을 통해 어떤 리얼리즘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에 착안하여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려 한다. 특정한 구간을 반복하는 루프적 시간은 하나의 결말을 가진 소설이라는 서사 장르 안에서 어떻게 죽음이라는 시간의 유한성을 더 리얼하게 인식하거나 감각하게 만드는가? 과거, 현재, 미래를 비직선적이고 비선형적으로 재현하는 서사적 장치는 어떻게 이야기의 질서를 구조화하여 의미를 생성하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어떻게 이야기의 시간성 자체를 새롭게 사유하게 하는가? 잘 알려져 있듯 타임루프는 독자들 사이에서 일명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이라는 줄임말이 통용될 만큼 근래 판타지 장르의 웹소설에서 지배적으로 나타나는 양식이며9 SF 장르에서도 빈번하게 발견되는 장치이다.10 그러나 이 글은 타임루프를 특정한 장르의 계보가 전유해온 하나의 ‘장르적 패턴’으로 간주하기보다는 특정한 구간을 되풀이하는 시간의 구조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서사적 요소’로 파악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타임루프’가 아닌 ‘루프적 시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성수나 정영수 김연수의 최근 소설에서 이러한 ‘루프적 시간’이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되는 장면에 주목한다. 물론 위 소설들을 모두 SF나 판타지 타임루프물로 분류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게임서사의 장치에서 힌트를 얻어 이 소설들, 더 나아가서는 서사 장르에서 이야기와 시간이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2. 죽음이라는 루프 혹은 형벌

 

성수나의 「신께서는 아이들을」(『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허블 2022)은 2022년 한국과학문학상 가작을 받으며 알려졌지만, 한 심사위원이 말했듯 한편으로는 NPC(Non-Player Character) 같은 주인공을 내세운 “게임적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탄생한 이야기”로도 읽히며,11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인간을 그려낸 신화적 이야기로도 보인다. 이 소설의 배경은 차안과 피안, 이승과 저승,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 있는 모호한 시공간이다. 광활한 바다와 여러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고요하고 평온한 이 세계에는 섬마다 반려인과 반려동물이 짝지어 살고 있다. 매 계절 신이 이승을 떠난 어린아이들을 바다 너머 섬으로 보내면 반려인과 반려동물은 이들을 돌본다. 한 계절이 지나면 아이들은 다시 태어날지 태어나지 않을지 스스로 선택한 뒤 섬을 떠나야 하는데, 그때까지 아이들이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화자인 ‘나’는 반려동물인 개와 함께 아이들이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보살피며 이들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조력자라고도 할 수 있다. 목소리가 없는 ‘나’는 입 모양으로 아이들에게 말한다. “너희, 바다, 들어가. 하루, 세 번. 너무, 멀리, 안 돼.”(261면) 그런 점에서 이 소설의 화자를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할 수는 없지만 게임 속에서 캐릭터를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NPC의 성격으로 읽어낸 것은 정확한 통찰인 셈이다.

‘나’는 계절이라는 단위로 이루어진 루프적 시간에 영원히 갇혀 있는 존재다. 루프적 죽음을 반복적으로 체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1인칭 관찰자의 입장에서 계절마다 타인들의 죽음을 계속 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 계절이 지나면 아이들은 환생하거나 바닷속으로 사라지고, ‘나’는 매번 그것을 목격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지난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 채 새로운 계절은 시작되며, 이 패턴은 영겁의 시간 동안 되풀이된다. 죽음의 가장 가까운 곳에 머물지만 끝내 죽음에 이르지 않는 존재. 언제나 타인의 죽음을 준비하지만 정작 자신은 죽지 않는 존재. ‘나’는 죽음의 시간 안에 갇혀 있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첫번째 형벌이다. 한편 ‘나’는 계절마다 정든 아이들과 이별해야 하는 끝없는 굴레에 갇힌 외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개와 짝을 지어 아이들을 돌보지만, 개가 아이들과 함께 바다에서 몸을 적시고 그 충만함으로 허기를 해결할 수 있는 것과 달리, ‘나’는 어쩐 일인지 바다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렇기에 다들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동안 혼자서 음식을 먹으며 묘한 부끄러움을 느끼고 계절이 바뀌면 기억을 잃고 다시 혼자가 된다. “늘 나만을 남겨두고 사라지는 그 세계”(279면) 안에서 ‘나’는 영원히 혼자 남겨진다. 이것이 ‘나’에게 주어진 두번째 형벌이다. 아즈마 히로끼(東浩紀)가 말했듯, 고독감은 타임루프물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증상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루프적 죽음은 되풀이되면서도 결말적 죽음에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고독감은 끝내 해소되지 않는다.12

‘나’는 왜 이런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나’는 입술을 움직여 신에게 묻는다. “내가 지은 죄가 대체 무엇이에요?” “무엇이길래 나만 계속 혼자 남게 되는 거예요?”(280면) 사정은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애절하고 인상적인 장면에 그 단초가 있다. 아주아주 옛날에 살았던 어느 섬의 거북이 들려준 이야기. 어느날 멀리서 거북을 향해 달려오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울부짖는 말(馬)이 있었다. 거북이 겨우 파악한 문장은 “무서워. 바다가 모조리 데려갔어”(268면)로,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 보이는 그 말이 전해준 바는 이렇다. 예전에 한 반려인이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아이들을 뭍으로 끌어오려 했다는 것. 그 행동이 신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 결국 거대한 파도 속으로 모두가 끌려 들어갔다는 것.

 

“그때 반려인이 바다를 향해 달려가. 말이 그를 말릴 새도 없이 반려인은 바다로 뛰어들어 여섯 번째 아이와 일곱 번째 아이를 껴안아. 반려인은 아이들을 뭍으로 끌고 오려 하고 아이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해. 여섯 번째 아이는 이미 반절이 바닷속에서 사라졌고 반려인은 아이의 상체를 수면 위로 들어 올려. 말이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거대한 파도가 나타났고 모두를 덮쳤지. 그리고 말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해변에 아무도 없어.”(269면)

 

그러니까 섬에서 떠나보내야 하는 아이들을 살리려고 했던 인간, 모든 것에는 끝이 있으며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진실을 거스르려고 했던 인간, 신의 섭리를 의심하고 감히 영원을 꿈꾸었던 인간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거북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낯설어한다. 그러나 매번 기억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알아채지 못했을 뿐 어쩌면 신의 심기를 건드린 인간은 ‘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에서 루프적 시간은 형벌로서 되풀이되는 시간이다. 시간의 유한성에 저항한 죄로 죽음의 시간을 무한히 반복하라는 형벌, 그 무섭도록 영원한 반복을 통해 시간의 유한성이 지닌 미덕을 깨달으라는 형벌, 죽음 앞에서 혼자가 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무력감에 직면하라는 형벌이다. 죽음을 반복적으로 목격하는 일은 오히려 죽음에 관한 사유를 무디게 만들거나 죽음을 물화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 ‘나’는 루프적 시간을 통해 오히려 죽음의 진상에 비로소 가까워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나’는 루프적 시간의 커다란 한바퀴를 돈 듯 보인다. 반려인이 아니라 이제 막 어느 섬에 도착한 아이가 되어 자신의 얼굴을 핥는 개와 머리가 아주 짧은 여자, 그러니까 또다른 반려견과 반려인 한쌍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어떻게 해도 죽음의 공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반려인 혹은 아이의 운명을 왕복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루프적 시간에 처한 운명이 꼭 형벌이기만 할까? 죽음 앞에서 무력감에 휩싸인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영원을 꿈꾸는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 인간의 절박한 발명품인 이야기가 필요해지는지도 모른다.

 

 

3. 이야기로서의 우울

 

「신께서는 아이들을」에서 신이 내린 형벌, 즉 무력감의 영원한 굴레를 현대사회의 용어로 바꾸면 우울증이 아닐까? 프로이트(S. Freud)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겪는 일반적인 슬픔과 달리 우울증은 외부세계에 대한 반응 능력과 함께 스스로를 사랑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한다고 말한다.13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애도의 과정을 진행하지 못해서 상실감의 책임을 자신에게 향하게 해 스스로가 쓸모없다고 여기며 깊은 무력감을 느낀다. 이를 시간의 층위에서 설명하면, 사랑하는 대상이 부재하는 현재의 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기 이전 혹은 상실한 특정한 구간에 머물며 언제나 그 시간만을 반복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상실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을 무한히 반복하는 루프적 시간 안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다.

정영수의 「일몰을 걷는 일」(『릿터』, 2022년 4/5월호)의 주인공 ‘그’도 그런 사람이다. 회사원이자 소설가인 그는 “사람이 아니라 걸어 다니는 눈물주머니라고 불러야”(147면) 할 정도로 시도 때도 없이 왈칵 눈물을 쏟아내는 남자다. 회의 도중에, 점심 메뉴를 고르다가, 달리기를 하다가, 느닷없이 터지는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오죽하면 퇴근하는 길에 서너 정거장 먼저 내려 한참을 울면서 걷는 루틴이 생겼을 지경이다. 문제는 그가 눈물을 쏟는 데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그냥 울었다.”(147면) 심리상담 선생님은 그에게 부모에 대한 질문을 던져 우울증처럼 보이는 현상의 근원을 알아내려 하지만, 그가 자신과 꼭 닮은 어머니와의 관계에 지쳐 있다는 정보 말고는 별다른 소득은 없어 보인다. 그는 그저 자신이 이런 생각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만을 아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다 부질없다, 시간이 흐르면 흔적도 없이, 단 한 톨의 의미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버릴 것들.”(158면) 해가 저물고 사방이 어두워져 모든 것이 죽음에 가까워지는 듯 보이는 ‘일몰’의 시간만을, 그는 영원히 되풀이해 걷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정말 우울증에 빠져 있다면 프로이트의 말대로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그가 상실한 대상은 무엇일까? 과거, 현재, 미래가 매끄럽게 연결되어 흘러가는 직선적인 시간관? 혹은 미래에 무언가 유의미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감? 아니면 미래 그 자체? 모두 얼마간 타당해 보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해 보이는 상실의 대상은 이야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야기에 대한 믿음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책을 낸 뒤 일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상태다. 이 역시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가 더이상 자신의 소설을 견디지 못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가인 그에게 소설은 곧 삶의 재현이다. 즉 그는 삶을 실재와 동일하게 모방하는 소설만이 유의미하다는 문학관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순간 자신의 소설이 그러한 종류의 진실을 담고 있다는 믿음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것은 꼭 자신이 쓴 소설에만 해당하는 회의만은 아니어서, 모종의 필연성, 상징, 개연성이 없는 소설 자체가 가치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떨치지 못한다. 자신이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을 믿을 수 없게 된 그에게 이야기를 짓는 일이 마치 지구 반대편에 있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게 된 것이다. 영영 소설을 쓸 수 없게 되었다는 절망에 빠진 소설가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

다행히도 소설이라는 장르에서 막힌 이야기는 다른 출구를 찾는다. 그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은 지 십수년이 지난 친구들에게 문득 편지를 보내는 습관이 있었는데, 글쓰기에 자신을 잃은 뒤 한동안 손을 놓고 있다가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언제나 미래보다는 과거로 향하는 사람이”(151면)기에 멀어진 친구들에게 편지를 쓴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어쩌면 소설을 쓰지 못하게 되면서 억눌린 이야기의 에너지를 편지 쓰기로 분출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에 대한 믿음’은 잃었지만 ‘이야기’는 잃지 못한 것이다. 특별히 전달하려는 내용이 있거나 풀어야 할 오해가 있는 것은 아니어서 편지는 혼잣말로 주절거리는 “그리움을 담은 애절한 연애 편지처럼 되”(152~53면)기도 하고, 상대를 위로하러 간 자리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털어놓다가 엉엉 울어버려 상대를 도리어 곤혹스럽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는 거의 본능적으로, 불가피하게, 그리고 끊임없이 친구들에게 말을 걸고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가 반복하고 있는 것은 일몰의 시간을 영원히 걷는 일만이 아니라, 깊은 공허로부터 그를 잠시나마 끌어올려주는 이야기 자체이기도 한 것이다.

이 시도는 얼마간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결말에 이르러 그는 돌연 “부질없는 실존적 고뇌에 점령되었던 삶을 수복”(162면)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더이상 알 수 없는 이유로 울음을 터뜨리지도 않고, 어머니나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무엇보다 글을 다시 쓰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는 우울의 루프에서 벗어나 다른 시간으로 진입한 것일까? 아무리 이야기가 주는 치유의 힘이 강하다고 해도 이것은 너무 느닷없는 회복은 아닐까? 무엇보다 그가 겪은 깊은 무력감이 “그리 길지 않은 잠시의 방황”이자 “누추한 자기연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울음”(162면)으로 간단하게 정리되어도 괜찮은 것일까? 그러니까 그는 정말로 치유되었을까?

이 결말은 너무 갑작스러운 탓에 어딘가 미덥지 않고 심지어는 허황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 미덥지 않고 허황된 느낌은 ‘그’의 이야기를 감싸고 있는 바깥 액자의 화자로 인해 가중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의 첫 문장(“이건 들은 얘긴데,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이 언젠가부터 시도 때도 없이 울음이 터져 나와 곤란을 겪게 되었다고 한다.” 147면)과 마지막 문장(“그렇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나의 바람이 아니라.” 162면) 정도에만 등장하여 ‘그’의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 ‘나’라는 서술자 말이다. ‘나’가 누구인지, 혹시 ‘그’ 자신은 아닌지, 진실을 말하고 있기는 한지 아무런 정보도 정황도 제시되지 않는다. 이 서술자는 왜 필요한 것일까? 그런데 이 서술자의 역할은 단지 내부 이야기를 감싸는 것만이 아니다. 서술자로 인해 소설은 1인칭 ‘나’의 진실한 고백이 아니라 3인칭 ‘그’의 핍진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고백의 진정성으로부터 거리감을 만들고 허구일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됨으로써, 초점은 소설가인 ‘그’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문제, 즉 소설이 진실을 담을 수 있는지 여부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허구에 불과한 이야기가 어떻게 삶을 구해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된다. ‘그’가 회복에 이르렀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하나, 분명한 것은 어떤 이야기는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삶을 구해낼 수 있다는 것, 정말로 그런 내용의 이야기가 ‘쓰였다’는 사실이 되는 것이다.

 

 

4.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삶이다

 

김연수의 「난주의 바다 앞에서」(『이토록 평범한 미래』, 문학동네 2022)의 ‘정현’도 「일몰을 걷는 시간」의 ‘그’와 비슷한 조건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가인 정현은 남해의 작은 섬에 있는 중학교로 강연을 가는데, 이틀 먼저 도착하는 바람에 밤새 방 안에서 세찬 눈보라 소리와 함께 내면의 소리를 듣는다. 칠흑 같은 밤과 흩날리는 눈보라에 무서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마음 때문일 것이라고, 자신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의미 없는 것들의 무자비함”일 것이라고 말이다. 소설가인 자신이 평생 몰두해온 일의 진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무자비할 수밖에 없는 자연에 맞서기 위해 상징을 부여하고 이야기를 만드는 것”(44면)이었음을 그는 새삼 깨닫는다. 무력감에 시달리는 상태는 아닐지 몰라도, 삶의 무의미에 대한 두려움과 고요하게 싸우고 있는 그는 서사의 전개상 훌쩍 떠나온 이 섬에서 누군가를 반드시 만나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은 대학교 시절 문학동아리 친구였던 손은정. 어린 아들이 악성종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자 깊은 슬픔에 빠진 그녀는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이 섬에 정착한다. 평범하게 살고 싶다던 이십대 초반의 계획은 폐기되었지만 이곳에 정착한 이후 마을 돌봄센터에서 일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된 그녀는 오랜만에 정현과 재회한다. 여기까지는 김연수 작가의 오랜 문학적 테마인 타인에 대한 이해, 더 구체적으로는 죽음 가까이에서 고통이나 슬픔에 빠진 여성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글 쓰는 남성의 노력이라는 익숙한 서사적 틀에 따르고 있지만, 이 소설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는 것 같다. 남성이 이해하려 애쓰는 여성이 죽었거나 사라진 사람이 아니라 살아남아 무언가를 계속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에서 그녀는 아예 소설가다. 손은정은 아들이 죽은 후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 이제는 손유미라는 이름으로 추리소설 작가가 되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주목하는 그녀의 이야기 짓기는 따로 있다. 바로 조선시대 정약용의 조카로, 천주교 박해 이후 남편이 반역자로 몰려 사지가 찢기는 극형을 당하자 두살배기 아들과 함께 제주도로 유배를 가야 했던 정난주의 삶에 관한 이야기. 정난주에 대한 설명이 적힌 섬의 안내판에 따르면 정난주는 아들이 노비가 되지 않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도록 아들을 추자도 갯바위에 내려두고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손유미가 정현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그와 달랐다. 정난주는 아들과 함께 바다로 뛰어든 것처럼 위장하고 자신만 바다로 뛰어든다. 아들을 잘 보살펴달라는 마지막 기도를 하느님께 남긴 채.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는가 싶었는데, 하느님이 그런 그녀를 건져올렸지. (…) 그녀는 곧 마음을 고쳐먹고 기도해.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느님. 저는 죽어야만 합니다. 제가 죽어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은 그녀에게 올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따라 해보라시며, ‘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보라시며. 정난주가 머뭇거리며 그래도 되느냐고 묻자, 하느님은 그래야 된다고 말씀하셔. 그녀는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그 말을 따라 해. ‘제가 살아야 제 아들이 살 수 있습니다’라고. 그 모습을 보고 하느님은 흡족해하셨지.”(65~66면)

 

이 아름다운 장면에서 정난주는 바다로 뛰어들기 직전 자신이 올린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을 듣는다.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정난주의 단호한 다짐을 들은 하느님은 부드러운 경어로 그녀를 가르친다. 당신이 살아야만 아들이 살 수 있다고,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한다고. 손유미가 손수 다시 지은 이야기에서 정난주는 모성을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한 어머니가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끝까지 쥐고 아들까지 살려낸 여자, 비록 관비가 되었지만 37년을 더 산 여자다. 정현이 찾아본 어느 기록에도 없는 결말,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은 자의 결말을 손유미는 만들어낸 것이다. 난주라는 이름을 자신의 소설 속 주인공에게 붙이면서 그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왔을 손유미에게, 이야기는 짓는 자들의 것이며 결말은 만드는 자들의 것이다.

같은 책에 수록된 「진주의 결말」의 유진주도 이야기를 짓는 여자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죽인데다가 둘이서 살던 집까지 방화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비혼 여성 유진주. 유진주에 대해 분석하는 내용의 방송을 한 범죄심리학자 ‘나’가 그녀로부터 메일을 받는 것으로 시작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그녀는 이미 이야기를 짓고 있다. 이야기 속의 그녀는 스스로를 점점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자라고 여기며 어떤 일의 결말은 바뀌지 않을지언정 거기에 이르는 중간 과정을 달리하면 자신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가는 아니지만 피의자의 심리를 분석하여 범죄서사를 구성하는 ‘나’도 일종의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다. ‘나’는 이야기가 모든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고안해낸 헛된 발명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끊임없이 유진주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결말에 맞아떨어지는 그럴듯한 서사를 만들기 위해 애쓴다.

결국 유진주의 아버지의 출혈이 간암에 의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그녀는 존속상해치사죄 무혐의에 방화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유진주가 아버지와의 고립된 삶을 견디지 못하고 살해를 저지른 수동적 희생자일 것이라는 ‘나’의 서사는 틀렸음이 증명된다. 그러나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나’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제주도로 떠나는데, 그녀의 방화 행위가 ‘억압의 표출’이자 ‘심리적 정화’일 것이라는 ‘나’의 정신분석학적 서사와 달리 그녀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죽는 것도 죽지 않는 것도 걸맞지 않은 아버지의 이야기에 결말을 짓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마치 치매에 걸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 사람처럼 불을 질렀다는 것, 그 순간 온전한 이해 속에서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97면)졌다는 것. 언뜻 해방적이고 아름다운 결말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빠를 제가 만든 이야기로 바라보고 (…) 그래놓고서 아빠를 이해했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면서, 불을 지름으로써 이해에 도달했다고 믿는 것은 모순이 아닌가? 자신에 관해서 어떤 생각을 지우거나 남김으로써 “그럴싸한 이야기”(87면)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서, 모든 이야기로부터 자유로워졌다는 것은 비약이 아닌가?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정말 이렇게 끝나도 되는 것일까? 무엇보다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이해한다고 믿으면서 혼자 자유로워지는 것이어도 괜찮은 걸까? 이것은 그저 이해와 이야기 둘 모두를 포기하는 것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다만 그녀가 돈각하듯 일순간에 타인에 대한 절대적인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면, 이 결말에서 중요한 것은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이해 여부가 아니라 차라리 유진주가 이야기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스스로 마무리를 지었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아버지에게만은 이해받는다고 느꼈던 유진주는 학창시절 아버지가 했던 말을 고이 기억한다. “마음껏 생각하고 그중에서 가장 좋은 생각을 선택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그게 너의 미래가 될 거야.”(86면) 유진주는 아버지로부터 모든 이야기는 혼돈 속에서 채택되며 저마다의 개연성을 가지고 경합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세상에 완벽하고도 매끄러운 서사는 없으며 모든 서사는 온통 울퉁불퉁하고 여기저기 튀어나오고 서로 부딪친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이야기에 기대지 않을 수 없다면 그것은 자신이 직접 짓고 지우고 남긴 이야기여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니 유진주는 “우리가 달까지 갈 수는 없지만 갈 수 있다는 듯이 걸어갈 수는 있다”(97면)는 ‘나’의 말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불가능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할 수는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의 완전한 서사를 만들어낼 수는 없지만 자신의 힘으로 서사의 결말을 지어냄으로써 미래를 만들어나갈 수는 있다는 의미로 해석한 것이 아닐까.

다시 소설의 첫 장면으로 돌아가보면, 유진주가 자신이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서 스스로를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시간여행자라고 여기는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김연수의 같은 책에 실린 표제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는 한 소설 속에서 사랑의 종말을 앞둔 연인이 시간여행을 하는 대목이 나온다. 현재에서 미래로 흘러가는 원래의 삶을 살다가, 과거의 첫 만남을 향해 되돌아가는 삶을 경험하고, 다시 첫 만남부터 미래를 향해 시작되는 삶을 상상하는 것까지. 이 세번의 삶을 살면서 연인은 가장 좋은 미래를 꿈꾸고 만들어나간다. 특정한 구간을 무한히 반복하는 것은 아니지만, 비선형적으로 흘러가는 과거 또는 미래의 이야기를 당겨와 현재의 이야기를 재구성하는 루프적 시간은 이 책을 관통하는 테마 중 하나다. 정난주의 이야기는 그 결말을 새로 짓는 손유미의 이야기로 영원히 반복되고, 유진주의 아버지 이야기는 그 결말을 만들어나가는 유진주의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태어난다. 모든 이야기의 결말은 삶이라는 것. 이것이 바로 지금 소설이 말하고 있는 시간성의 리얼리티일지 모른다.

 

 

  1. “First video-game version of the Cannes Film Festival set for Fall 2023,” The Brussels Times, 2022.10.14.
  2. 대표적으로 영국의 가장 권위있는 시상식 중 하나인 ‘영국 영화 텔레비전 예술 아카데미’(BAFTA, British Academy of Film and Television)는 2003년부터 독립적인 게임 부문 시상식을 개최하고 있다.
  3. 『게임 제너레이션』 홈페이지(www.gamegeneration.or.kr) 참조. 『게임 제너레이션』의 이경혁 편집장은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둘러싼 전반적인 환경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게임을 문화예술로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게임을 그 자체로 문화로 대우하고, 다루고, 이야기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다만 사회를 구성하는 문화로서 게임을 이해하는 것과 예술비평의 대상으로서 게임을 분석하는 것은 다른 층위에서 병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게임을 하는 건 10대, 지르는 건 30대… 그래서 게이머는 ‘과정’을 잃었다」, 한국일보 2022.9.24.
  4.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장이지 옮김, 현실문화 2012, 92~93면.
  5. 물론 죽었던 자들이 되살아나는 서사는 게임 장르에 국한되는 특징은 아니다. 근대적 시간관 이전의 한국 고전소설에서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는데, ‘신묘한 약물’ 또는 ‘신성한 공간’이라는 장치를 통해 인물의 환생이 이루어지곤 한다. 예컨대 ‘바리데기’ 신화에서는 바리데기가 가지고 온 약초를 통해 죽었던 부모가 되살아나고, 「심청전」에서 물에 빠진 심청은 연꽃에 실려 돌아온다. 다만 이러한 작품들에서는 환생의 장치가 서사의 현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작동하지 않으며 게임처럼 무한하게 반복되는 것도 아니다.
  6. 오오쯔까의 주장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차례 반박이 제출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즈마는 오오쯔까의 논의에 기대어 라이트노벨 『올 유 니드 이즈 킬』과 같은 루프물이 캐릭터의 메타 이야기적인 상상력을 통해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독특한 종류의 리얼리즘적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석했다. (아즈마 히로키, 앞의 책 122~40면) 다만 아즈마의 경우 서사가 소비, 유통되는 환경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했다면, 이 글은 서사의 내적인 구조에서 그 가능성을 살펴본다.
  7. 이어지는 두 문단에는 아우터 와일즈의 엔딩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8. 그런 점에서 아우터 와일즈는 플레이어가 이 광대한 세계의 중심도 주인공도 아니라는 사실, 각 개체는 역사의 키를 쥐고 있는 유일무이한 주체가 아니라 언제든 대체되거나 변경될 수 있는 우연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넌지시 우아하게 알려주는 게임이기도 하다.
  9. 안상원은 1990년대 후반부터 웹소설, 판타지소설 등의 한국 장르소설에서 회귀·빙의·환생과 같이 인물이 다른 세계로 이동해 모험을 하는 ‘차원 이동’ 요소가 주요한 모티프로 진화해왔다고 분석한다. 안상원 「한국 장르소설의 마스터플롯 연구: 모험서사의 변이로 본 ‘차원이동’ 연구」, 『국어국문학』, 국어국문학회 2018.
  10. 한편 박서련의 단편 「고백 루프」(박서련 외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하지』, 돌베개 2021)는 웹소설이나 SF는 아니지만 루프적 시간관이 젠더 정체성을 탄력적으로 수행하는 데 기능한 사례다.
  11. 김성중 「플래시포워드의 소설」,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수상작품집』, 368면.
  12. 아즈마 히로키, 앞의 책, 125~27면.
  13. 지그문트 프로이트 「슬픔과 우울증」,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윤희기·박찬부 옮김, 열린책들 202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