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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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

 

마당문화예술, 촛불혁명의 뒷심

 

 

김봉준 金鳳駿

화가, 오랜미래신화미술관장. 저서 『신화 순례』 『숲에서 찾은 오래된 미래』 『붓으로 그린 산 그리메 물소리』 등이 있음.

sanary@naver.com

 

 

마당문화예술은 민주화운동과 함께하면서 창의적 예술성과 정치적 상상력을 더하여 새로운 마당문예로 성장하며 새로운 나라만들기의 뒷심이 되어왔다. 촛불대항쟁을 통해서는 세대를 이어가며 점점 더 진화된 영혼으로 새 비전을 찾아가는 시민운동을 보았다. ‘이게 나라냐’ ‘내가 나라다’ ‘시민이 예술가다’ 등 촛불을 든 시민의 독창적 구호가 나왔다. 젊은이들의 희망이 담긴 승리의 서사를 성취하는 열린마당, 비전을 창조하는 예술마당, 수평적 연대의 조직마당으로 남녀노소가 광장에 다 모이는 대동문화적 진화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승리의 힘을 체험한 촛불대항쟁은 더욱 성숙한 촛불혁명으로 자라나는 중이다. 나 역시 그러한 과정을 함께하며, 이 글을 통해 1970년대에 마당문화예술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1980년대 민주화운동시대 민중문화로 거듭났으며 지금도 촛불혁명의 뒷심이 되는 기층문화로 이어져왔는지 증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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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예술이 필요했다. 내 안에 오랫동안 억눌린 마음의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았다. 이십대 초반까지만 해도 내 몸은 깡말라서 48킬로그램밖에 안 나가는 청년이었다. 젊음을 발산할 문화예술이 필요했다. 그것은 탈춤이었다. 탈춤은 트라우마와 우울증에 찌든 청년을 다른 세상으로 안내했다. 탈춤, 겅중겅중 뛰는 듯한 봉산·강령·은율·양주 탈춤이 해방감을 주었다. 탈을 쓰면 경계 밖에서 세상을 엿보는 듯해 세계 밖에서 세계 안을 들여다보는 기분도 들었다. 1975년 홍익대에서 학생 서클로 탈춤반을 만들고 벗들과 같이 탈춤을 추게 되었다. 1977년에는 탈반 회원들을 이끌고 지리산 저 두메산골 풍물—‘농악’은 일제시대 민속학에서 지은 개념으로, 지방마다 혹은 쓰임새에 따라서 ‘굿’ ‘매구’ ‘풍장’ ‘두레’ ‘풍물’ 등 서로 다르게 불렀다—을 전수받으러 다녔다. 탈춤이 조선의 도시형 민중문화라면 풍물은 농촌형 민중문화였다. 지금은 그런 푸진 풍물을 좀처럼 접할 수 없으나, 70년대 지리산 산골 풍물은 고대(古代) 축제에 들어가는 듯했다. 일주일 밤낮을 임실 갈담 산골마을들을 돌아다니며 뜰밟이—정초에 마을 신화지대를 다니며 치는 굿으로 영남에서는 지신밟이, 호남에서는 뜰밟이, 중부지방에서는 마당밟이라 부른다—를 하며 추었던 풍물 춤은 내 평생에 잊지 못하는 문화체험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집단 강신하듯 저마다 타악기를 들고 신명 나게 춤을 추었다. 흡사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동예의 무천이 이랬을 거 같았다.

나는 탈춤과 풍물이 있어서 저 어둡고 사나운 유신시대 대학생활을 견딜 수 있었다. 70년대 대학가에는 전통문예 부흥기라 불리던 시대가 지나가고 있었다. 많은 대학에선 탈춤·풍물을 배우고 추는 마당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탈춤 마당극 민요 판소리 굿 민화 불화 등을 배우고 실연하는 것을 민족문화예술 부흥이라고 불렀다. 탈(脫)정치를 강요받았던 유신시대라서 탈출구로 우리 전통문화를 더욱 공부했나보다. 70년대 전통문화는 대체로 문화재 제도화로 정비되기 전이어서 그냥 전래해온 민간문화였다. 탈춤·풍물·굿은 날것 그대로 근대국가주의에 길들여지기 전 최후의 야생문화 같았다. 이런 탈춤과 풍물과 굿을 통칭 ‘마당문화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다. 내게 춤과 가락을 가르쳐준 스승들은 거의가 지역에 사는 농부나 인부들이었다. 민중으로 살던 마당예술인들이 이때만 해도 많았다. 나는 이분들을 스승으로 모시며 따르는 예술학도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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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춤과 풍물과 마당굿을 대표하는 특징을 말하라면 역시 ‘마당’과 ‘신명’이다. 신명은 신이 내 안에서 난다는 뜻이다. 어릴 때 아이들이 말 배울 무렵이면 기분 좋을 때 “신난다!”는 말을 절로 한다. 안 배워도 스스로 느끼는 기분이 신명이다. ‘생명 에너지의 고양된 충족’이나 ‘확대된 자아’로 해석된다. 신명은 자기긍정의 에너지이다. 학교와 사회로부터 칭찬 한번 못 받고 야단이나 맞으며 성장한 한 청소년도 탈춤·풍물을 뒤늦게 만나면서 마당에서 큰 소리로 “신난다”라고 맘껏 소리 지르게 되었다. ‘유신독재 타도’는 잘 못해도 우리는 ‘신명의 마당’에서 소리를 질렀다. “잘한다~ 얼쑤~” “얼씨구 좋오다” “아암 그렇지~” “지화자 신난다~” 등을 장단과 춤 자락에 연발하며 신명을 주고받았다.

그렇다면 ‘신명마당’이란 무엇인가? 신이 나는 한판, 신명 나는 공동체문화, 내 안의 무의식 속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살, 자기긍정을 확인하는 신판, 원형의 힘이 소생하는 마당 등으로 이해하겠다. 우리 겨레 원형문화의 양식은 ‘마당문화’라 할 수 있다. 마당은 삶에서 살림살이하는 일과 놀이와 신앙의 터를 말할 것이다. 고달픈 삶을 살리는 시공간이기에 생명 에너지를 충족하게 하는 마당이고, 더 나은 삶을 꿈꾸며 지금 여기에서 꿈을 구현하려는 마당이라고 볼 수 있다. 마당은 성(聖)과 속(俗)이 본래 하나인 곳으로 세속적인 살림에서부터 존엄하고 숭고한 마당까지 공존한다. 평소에는 일터 두렁이고 타작마당이다가 어린이 놀이터가 되기도 하고 다시 새해 벽두 정갈하게 정화하며 신화가 상기되는 통과의례 마당이다. 살림이 곧 제사이고 굿인 살림공동체 한마당이다. 내가 나를 긍정하고 남을 칭찬하고 서로 격려하며 고양하는 신명을 내는, 억압과 공포에서 벗어나며 지친 노동으로부터 몸을 푸는 탈춤·풍물·굿이 모두 마당문화다. 이때 굿은 매우 포괄적인데 무굿 풍물굿 탈굿 두레굿 대동굿 고사굿 등 다양한 형태의 굿이 있다. 여기서 굿론을 본격적으로 펼치지는 못한다. 다만 굿은 민중의 집단무의식을 원형문화 형식으로 이어오며 민중의 자기 문화정체성을 유지했으며 더 깊은 영성까지 품는 문화이다. 한국에서 굿은 민속문화의 다른 이름이라 해도 된다. 굿은 일제와 서양문화가 들어오면서부터 근대 자본국가 권력이 주도세력이 되기까지 비주류문화로 취급되었다. 서양식 근대문명에선 미신, 비문명으로 청산했지만 세계 인류 속에서 엄연히 기층문화로 지금도 살아 있다. 70년대 대학에서 전승기를 거쳐서 80년대 본격적인 민주화운동 속으로 들어오며 굿 일부가 민중문화가 된 것은 한국의 놀라운 문화변천사이다.

 

김봉준 「말뚝이」(목판화), 1983.

김봉준 「말뚝이」(목판화), 1983.

 

탈을 만들게 되었다. 탈춤과 탈은 서로 하나로 연결된 마당예술이다. 학창시절 내 전공은 미술 중에서도 조소이다보니 탈춤에 필요해서 전통 탈을 만들었고 창작 탈춤을 연출하려니 창작 탈도 만들었다. 한번은 서울대 박물관에 오래된 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박물관 조교에게 부탁해서 수장고에 가 꺼내온 탈을 직접 만져본 적이 있다. ‘조선 후기 황해도 신천 말뚝이 탈’이라고 그 뒷면에는 적혀 있었다. 닥종이를 아교풀로 여러겹 붙여서 만든 탈인데 탈의 조형감과 색감에 전율을 느낄 정도였다. 당시 기분을 말로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돌이켜보면 그 탈은 영성이 깊고 색상이 밝고 힘찼다. 인면보다 동물 모양을 더 닮았고—두꺼비 같기도 했다—신성한 힘이 느껴졌다. 이 탈은 내 평생 조형예술을 하는 데 따라다닌 신화소가 되고 말았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은유, 그 신이한 형태소가 조선의 진짜 탈에는 깃들어 있었다. 탈을 만들며 영성을 구현하는 조형예술이 내 꿈이 되었지만 그걸 구하는 것은 잘 안 되었다. 그러다가 이십년쯤 지난 훗날, 1999년경부터 한국의 신화에 짝 맞춘 상징예술을 질조각으로 만들게 되었다. 죽다 살아난 깊은 병을 겪고 난 후 삶의 경계에서 살 적에 영성이 무엇인지 느끼게 됐으니, 내 안에 숨었던 무의식문화를 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질조각 신화상징으로 2008년 ‘오랜미래신화미술관’을 세우게 되었다. 탈로 시작해서 흙조각으로 30년 만에 이 두메산골 숲에서 내 나름 영성의 미를 갖게 된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탈 만들기 체험부터 꺼내본다. 70년대 학창시절 봉산·강령·산대 탈들을 재현하려 해도 서양미술 기법으로는 할 수가 없었다. 탈 색올림과 가장 비슷한 양식을 찾아보니 불화 기법이 있었다. 그래서 절에 가서 불화를 배우게 되었고 삼년을 다녔다. 금어스님은 조선 탱화의 적통을 이은 분이셨다. 미술대학에선 화선지에 백모필로 그리는 사군자와 산수화가 동양화 커리큘럼인데 절의 금어스님은 닥종이에 황모필로 그렸다. 달라도 너무 달랐다. 절방에 앉아 황모 장(長)세필로 초화(草畵) 그리기를 시작했다. 황모붓은 야생동물의 털로 만들어 탄력이 강하고 예리한데, 삼년쯤 지나니 그 붓맛을 조금씩 느끼겠다. 왜 금어스님이 초화 베끼기를 반복해서 시켰는지 후에야 알았다. 우리 서화 학습은 기본이 몸으로 공부하는 임서모화(臨書摸畵)다. 임서모화란 좋은 글씨는 베끼고 좋은 그림은 모방하는 학습 전통이다. 선생 앞에서 오래전 초화를 받아서 밑그림으로 자기 스스로 습득하는 육화 전승의 필법이다. 바른 자세로 운필력을 얻는 득필이 매우 중요하다. 오체투지 하듯 바닥에 그리는 조선탱화·조선민화의 원조는 고구려벽화였다. 지금은 이런 황모장필의 고구려붓 계승이 끊겼다. 이와 같은 청산주의문화 풍조는 어디서 온 것인가. 자기 민족 안에 품고 전해오는 수천년 문화자원을 버린 셈이다.

그나마 다행히도 고구려시대 붓그림인 고구려벽화 실물이 남아서 고대의 겨레미술의 특징을 한눈으론 전한다. 고구려붓으로 남긴 고구려인의 성정과 기백과 신기를 알 수 있다. 이것도 마당문화처럼 신명의 문화다. 서양 선은 존재의 ‘있음’ 그 자체를 중시했다면, 동양에서 선은 점에서 시작해서 진행되다가 사라짐으로 끝나는 ‘생성과 소멸’이다. 장지에서 불씨처럼 생성하였다가 물길처럼 소멸한다. 붓선에도 신명이 중요하다. 붓이 먹물을 품고 휘청거릴 적에 마음에서 척추와 손으로 전해지는 신명이 생긴다. 기운생동으로 밝고 힘찬 생명력이 나온다. 서양의 소묘법은 존재의 실체를 고정시켜 직관한다. 존재 그 자체를 중시해 명암으로 진하게 형상화하니 대체로 어둡다. 거기다 고정된 눈 하나로 본 대상을 원근법으로 해석한 세상이다. 움직이지 않는 내 눈으로 보면 대상도 움직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물론 그건 그것대로 서양미술의 훌륭한 개성이고 서양의 예술철학과 같이 이어져왔다. 그와 달리 조선 붓그림은 동양의 생성철학처럼 생동하는 생명을 표현하는 미술양식이었다. 고구려벽화로부터 민화 불화 풍속화 초상화 진경산수화로 이어져온 붓그림이 겨레의 주류 미술이다. 그리고 마당예술은 노래와 춤과 기악, 시와 글씨와 그림을 하나로 연결해 예술이 미분화된 상태로 영성문화를 만들어왔다. 시서화의 어머니인 알타이 암각화나 울주 암각화처럼 하나의 글그림 상형문이 이어오다가 서체와 화체로 나뉘고, 그러다 다시 모여 시서화를 한마당으로 모아 사용하기도 하며 진화했다. 가무악도 마찬가지다. 마당문화는 이 가무악시서화(歌舞樂詩書畫)가 같이 놀다가 따로 놀다가를 반복하는 형제처럼 들락날락하며 진화했다. 굿을 보면 신명의 마당에 가무악시서화가 즉흥적인 우연의 연속처럼 들락날락하며 한마당에서 노닌다. 마당은 새해맞이도 있고, 달맞이 들맞이처럼 자연맞이도 있고, 조상맞이 벗님맞이 님맞이도 있다. 마당그림도 ‘맞이’라고 했고—무화(巫畵)를 지금도 맞이라고 부른다—춤과 가락이, 장단과 노래가, 글씨와 그림이, 판소리와 북이, 탈과 춤이 서로 신명을 맞이한다. 그 맞이의 바탕이 바로 마당이다. 태극사상도 ‘신명맞이’의 역동적 조화를 궁극으로 하는 마당문예와 세계관이 같다. 서로 대립과 갈등을 마당으로 맞이하여 신명으로 하나 되는 것이 마당문화다. 마당문화는 긍정의 힘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솟아나게 하는 신명의 발원지이다. 터 닦음으로 정화해서 빈터를 만들고, 길놀이로 모여든 민중은 난장을 터서 서로 교감하고 우정 공동체를 만들면서 재미지고 푸지게 내 안에 신 맞이하며 노닐다가 사라지는 것이 마당문화이다. 그래서 굿판에서는 지금도 말한다. “먹고 나고 놀고 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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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서양으로부터 들어와 자리한 엘리트 예술만으로는 소통이 어렵다는 판단을 우리는 현장문화운동에서 해왔다. 풍물을 민중에 다시 되돌려주자는 풍물 강습도 탈춤과 민중노래와 함께 이어졌다. 이때도 풍물은 낡은 전근대적 예술이라서 노동자문화로 정착하기 힘들 것이라는 비판이 리얼리즘 문학계 일각에서 있었다. 80년대 초 공동체문화 문예지 토론에서 붙은 논쟁이다. 우리는 풍물이야말로 노동하는 이들이 더 좋아한다고 보았다. 노동현장에서 풍물 수용 현상을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지하(金芝河) 시인은 1963년 한일굴욕외교를 반대하는 집회를 연출하면서 풍물과 타령조 상엿소리를 시위행진 안으로 끌어들였다. 한일굴욕외교에 대항하는 동시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강변하는 박정희정권에 항거하는 시위였다. 이름하여 ‘민주주의 장례식’이다. 김지하 시인의 담시 「오적(五賊)」 「비어(蜚語)」 등은 마당예술 창작의 길을 보여주었다. 민중의 구비문학 전통을 계승하며 민족문학의 길을 새로 열고 있었다. 「비어」 중 특히 두번째 부분 ‘소리내력’을 보면 시어는 산문적 말투지만 운문적 가락을 타고 있다. 산문적 운문이다. 엇머리장단이 이야기를 운문 장단에 실어 가락을 타게 한다. 사설을 장단에 싣고 운문화하는 것은 판소리뿐 아니라 무당굿이나 고사소리 사설에서도 많이 사용된다. 덩○쿵 따○ 쿵○따 쿵○, 3+2, 3+2 총 열박으로 이야기를 가락에 태워 운문마당을 만든다. 마당예술이 민중적 정서 소통에 효과적인 것은 말이 장단을 만들거나 타거나, 몸짓이 춤이 되거나, 보이는 사실을 탈같이 운문적 문채(文彩)로 만들기 때문이다. 풍물과 굿의 장단은 악보 없이 구비 전승하는 말가락으로 전승되어왔다. 70년대는 마당극 「아구굿」 「금관의 예수」 「진오귀굿」 「밥」이 나오면서 「동일방직문제를 해결하라」 「함평고구마」 등 민중의 직접 출연 마당극도 나오게 되는데, 어문체의 연극 대사보다 민중의 말가락을 탄 구문체 마당극이 더 생동하고 재미졌다. 민중이 주체 되는 마당문화의 힘이 풍물 마당극 가요 판화 등 민중현장에서 입증되고 있었다. 70년대 아직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담시와 마당극과 마당굿(창작탈춤), 창작판소리와 민요 등이 80년대 마당문화에서 민중과의 본격적인 소통 면을 넓히는 질적 변화를 보였다. 그야말로 마당문화 부흥시대였다.

민중집회 양식이 마당예술에 힘입어 진화하고 있었고 또 민주화가 새 마당문화를 견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노동현장과 농촌, 그리고 지역의 민중 속으로 하방하며 들어가는 문화운동을 현장문화운동이라고 했지만 그때는 더 진화된 마당문화를 미처 개념정리 하지는 못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민중가요 담시 마당극 마당굿 풍물굿 겨레붓그림 걸개그림 민중목판화 겨레춤 등을 다 한 흐름의 문예운동으로, 민족예술운동 이전의 ‘마당예술운동’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절했다. 이를 민중문화·민족문화라고 부르자는 다소 이념적인 정치문화적 조직운동이 있었지만, 그런 역할과 소명을 이젠 할 만큼 했으니 문예활동을 진영 속에 가둘 필요는 없다. 목판화와 걸개그림이 민중미술의 얼굴들이 되었고, 시노래가 민중가요로 불렸고, 마당극과 대동굿을 민족예술이라 했지만, ‘마당문화예술’이라는 개념은 여전히 중심을 잡고 가야 할 민중문화의 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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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국가폭력의 공포를 이기며 우리의 꿈과 희망과 자신감이 넘치게 난장을 트며 신명을 만들던 마당문화는 한국 민주화운동의 문화정체성을 만들어갔다. 무엇보다 군부독재의 공포로부터 해방감을 갖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필요했던 때에 마당문화는 자주적인 문화를 만들어갔다. 이것이 일본이나 중국과 다른 한국 민주화의 자랑스러운 마당문화유산이다.

 

김봉준 「오월의 통곡」(목판화), 2019.(왼) | 김봉준 「3·1백년」(목판화), 2019.(오)

김봉준 「오월의 통곡」(목판화), 2019.(왼) | 김봉준 「3·1백년」(목판화), 2019.(오)

 

우리 삶과 역사를 긍정하는 힘의 마당문화는 민주화투쟁 속에서 거듭나는 새 마당문화예술로 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적어도 80년대 본격화된 민중적 마당문화예술은 한국식 르네상스라고 불릴 수 있었다. 한국식 나라만들기의 자신감은 민주화운동과 민중문학과 마당예술이 교집합하며 민주화문화가 생성하면서부터라고 본다. 문학예술사상이 근대주의 세계관의 변화를 선도했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적 사고인 이원론적 사고에서 일원론적 사유가 생기며 문명전환적 사상이 나오게 된 것도 변혁적 문화운동의 산물이다. 씨알 함석헌(咸錫憲) 선생이나 무위당 장일순(張壹淳)의 실천 행보에서 변혁적 문화사상이 등장했고, 김지하가 초고한 ‘한살림선언문’이나 그의 저서 『밥』 『남녘땅 뱃노래』 등에서 나오는 생명사상도 있었다. 한편 『창작과비평』의 분단체제론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변혁적 중도주의, 김대중의 평화사상 역시 촛불대항쟁기에 변혁적 시민운동으로 대합류하는 정신적 뿌리가 된 듯하다. 지금 펼쳐지는 촛불혁명이 사회주의 무력혁명도, NL이나 PD류의 혁명론도, 일반 민주주의의 복제도 아닌 창조적인 사상과 문화를 가진 시민혁명의 길이 된 것도 한국의 오랜 문예운동의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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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무의식 심층에는 원형문화가 있다. 이를 서양에선 콤플렉스로 보기도 하고 동양에선 귀신으로 보기도 하지만,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에 있는 영성을 인정하는 것은 같다. 이 콤플렉스(귀신)를 다스리는 문화가 문화권마다 다르게 존재하고, 이러한 영성문화를 다 존중하자는 것이 문화다원주의이다. 유니온신학대 정현경 교수에 의하면 미국 대도시 사람들이 불안과 절망과 허무함을 이기지 못해 찾는 영적 치유자가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메리카 원주민이라고 한다. 자기들이 침략하여 땅을 빼앗고 제노사이드(집단학살)를 저지른 원주민을 다시 영적 스승으로 찾는 것이다. 근대의 소위 합리적 인식은 인간의 의식과 행동, 능력을 이해한다고 하지만 더 깊은 인간의 심층문화, 정체성과 영성의 문제까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김봉준 「사면초가」(목판화), 1981.

김봉준 「사면초가」(목판화), 1981.

 

생명의 마음을 갖는, 우주 공공심(公共心)을 지닌 신(新)인간은 오지 않을 것인가. 지금 여기, 자기 자리에서 신인간 출현을 기다리는 ‘다시 마당’이 필요한 시대다. 민족의 집단무의식 속 영성문화들이나 밈(meme), 심층문화를 주의 깊게 성찰하지 않고는 앞으로도 인류의 다문화공생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에서도 국가 이데올로기와 자본권력은 원초적인 영성문화에 의지하는 민중의 소박한 신심마저 근대교육이란 이름으로 파괴하고 왜곡해왔다. 그래도 베트남 대만 티벳 네팔 몽골 한국 일본 동남아 어디를 가도 영성문화는 아직 다 소멸하지 않고 살아 있다. 불안한 문명, 혼돈의 시대에 우리는 지금 샤머니즘으로도 홍역을 치른다. 불안한 미래를 점과 기복신앙같이 비합리적 예언에 의지하다보니 불안이 해소되기는커녕 제자리다. 국가권력이 복지사회로의 미래를 책임지지 않으니 더 자구책으로 나타난다. 기독교 불교 믿는 사람도 불안은 마찬가지라 샤머니즘과 습합되며 기복종교에 도피한다. 심지어는 국가권력자들도 점과 무(巫)에 의존하여 통치하려 하고 있다. 불안한 시대에 무와 굿은 무시하고 방치한다 해도 사라지지 않고 더 음성적으로 번창한다. 통계상으로 무속적 신앙을 가진 국민만 해도 삼십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무와 굿은 대책 없는 청산주의로 극복되지 않는다. 게다가 국가권력은 공생과 평화로 가는 진화의 길을 피하고 종북주의니 자유시장의 맹신자가 되는 ‘국민 미신’의 길을 자초하고 있다. 지도자일수록 무책임한 맹신적 자유가 답이 아니다. 국민복지와 시민교양은 갈수록 도외시된다. 민주화 과정 속에서 진화해온 마당문화는 여전히 비주류이고 국민교양과 개혁을 피하는 교육·문화 정책은 여전하다. 마당문예에 답이 있지는 않을까. 마당문예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으로 굿문화를 민주화운동과 합류시키며 민주적 소통과 공감의 문화로 진화시켰다. 마당 안에는 생명평화의 가치를 중심에 모시는 우주공심이 자라났다. 전통의 굿문화를 기피하거나 무시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계승하며 재창조한 결과다.

문제의 핵심은 영성문화의 이해와 해석을 피하는 왜곡된 근대주의 맹종에 있다. 동학과 굿과 민족종교의 숙제를 풀지 못하면 한국문화의 정체성은 더욱 훼손될 것이다. 정체성과 영성문화 연구를 계속 소홀히 한다면 한국학은 엘리트주의에 더욱더 갇히고 말 것이다. 아시아 문화정체성의 뿌리인 샤먼문화를 통해 생명의 마음과 소통하는 자연과 우주의 공공성으로 영성문화를 이해하고, 개인의 심리적 치유의 방법론으로 굿의례를 재조명할 때가 이제는 되었다. 인문학에서도 학문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필요하다. 안병무(安炳茂) 교수, 서남동(徐南同) 목사와 유동식(柳東植) 교수는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이분들의 민중신학과 기독교 비교연구에서 민중사건과 민중신앙을 중시했던 인문학은 계승되어야 한다. 한국에서 새로운 인문교양이 중심을 잡아주어야지, 지금은 국가권력자마저 미혹에 빠져 헌법 가치도 흔들고 평화정책마저 흔들고 있다. 굿은 생명사상의 비전을 갖고 국민적 문화전략과 방식으로 삶에 유익한 안정적 문화가 되어야 한다. 권력과 종교의 권위주의에 맹종하는 광신도 같은 대중을 양산하게 된다면 민주화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국민 미신’으로의 전락은 신종 파시즘에 국가를 빠뜨리게 되는 일이다. 하루빨리 무교와 굿 문화의 건강성을 회복하기를 바란다. 민중 스스로 영성을 갖느냐, 혹은 사이비 교주나 권위주의 권력자가 영적인 사기를 치느냐, 그것이 문제다. 마당문화의 진화에서 해결 실마리는 보인다. 마당문화를 이해하는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 샤머니즘과 문화정체성, 영성문화의 이해와 재해석, 굿과 신화예술, 무교의 종교, 마당굿과 마당문화예술, 탈과 조형예술, 재신화시대론, 굿의 교육학·치유학, 한국 시민의 영혼관, 뉴에이지 시대 한국 신화학, 다문화공생의 정체성, 칼 융의 정신분석학 및 신학과 굿의 비교연구, 민족종교의 무적 특징, 동학과 굿, 구비문학의 영혼관 등 많은 학문연구가 필요하고 마당예술가들의 창조적 예술 실천도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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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은 다시 말한다. 모든 생명에는 마음이 있고 영혼이 깃든다고. 아시아의 영혼문화를 피하지 말고 직면하자고 마당문화는 말한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샤먼—보, 뵈, 랜동, 두쿤, 굿—은 분업화 전에는 예술이었고 치유문화였으며 마을 이장 역할을 하며 공동체의 지도자로 살아왔다. 몇해 전 몽골 샤먼굿 답사를 갔을 때도 들었다. 스딸린 시대에 샤먼과 라마승 수천을 학살하고 박해했어도 무구를 숨기고 주민이 샤먼을 감춰줘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지금 몽골은 물론 브리야트족들도 소련 국가 이념을 벗어버리고 샤먼과 샤먼적 불교인 라마교를 부활시켜서 민족문화 정체성을 다시 찾고 있다. 정체성과 원형문화는 이념보다 질기다. 이러한 아시아 범신주의 문화를 동학은 합리적 이성으로 재해석하고 탈근대적 다원주의를 열었다. 전승되어온 구비문화를 아시아적 인문학으로 재정립한 것이 동학이다. 아시아 전통문화는 모든 생명에 마음이 있다고 보고 있다. 동학은 그것을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莫非侍天主也)라든가, 이천식천(以天食天), 물아동포(物我同胞) 사상으로 말했다. 아시아의 원초적 사상 전통이 동학에 이르러 학문과 종교적 경전을 갖게 되었으며 봉건주의는 물론 제국주의 침략에도 맞서는 사상으로 진화한 것이다. 베트남에서도 조선의 동학에 대한 연구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동학을 유불선의 문헌적 결합으로만 보기보다 한국적 샤머니즘인 굿에서 나온 점도 많음을 이해할 것을 권한다. 동학의 창시자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의 ‘칼의 노래’ 검결(劍訣)과 무당의 공수의례는 같은 문화로 보인다. 검결은 샤먼의 영혼관을 띤 일종의 내림굿으로, 강신무(降神巫) 입무(入巫) 전통과 같다.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의 이천식천은 토템문화의 인문적 재해석으로 이해된다. 해월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벽을 향해 제물을 바치고 절을 올리는 중에 마귀가 가져가버리니 향벽설위(向壁設位)의 제사를 버리고, 내게 제사를 지내는 마음으로 향아설위(向我設位)의 제사로 바꾸자고. 고대부터 굿의례는 본래 내 안에도 신이 있다는 향아설위가 기본이다. 내 안에 신이 있으므로, 나와 부족 공동체 안으로 제사상을 모시고 둥글게 모여서 고사반(告祀盤)을 하는 것이 풍물굿의례이다. 지신밟이 마당굿에서도 흔히 보는 풍경이다. 해월을 최초로 보는 향아설위론은 원초적 굿의례에서부터 다시 연구될 필요가 있다.

조선 말 동학이 왜 그렇게 빨리 삼남지방은 물론 경기도와 해서지방까지 퍼졌을까. 당시 농민의 자기 문화가 굿이고 무이기에 여기서 나온 동학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동학은 굿의 재해석으로 굿의 구비문화 시대를 접고 인문화 시대를 열었다. 물론 유교적 한문이 있어서 「동경대전」으로 어문화하는 데 기여했고 하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할 적에 천주학으로부터 배운 것도 있겠으나, 당시는 문자보다 말이 더 잘 전달되던 농민의 구비문화 시대였다. 문맹자 농민이 대부분이었던 조선 말기에 구비문화에 더 익숙한 농민인 해월이 있었기에 수십만의 농민이 동학도가 되어 빠르게 입교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본다. 동학의 굿 기원설이 유불선 기원설과 함께 앞으로 더 연구되기를 기대한다. 한국학은 조선의 구비문화 전통과 마당예술과 마당굿을 피하거나 모르고서는 결코 진전된 연구가 어렵다. 유학과 불교만 갖고 동학과 민족종교들을 연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봉준 「촛불시민 승리의 날」(역사풍속화), 2017.

김봉준 「촛불시민 승리의 날」(역사풍속화),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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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도 작은 마당문화가 있다. 마당문화는 신성한 힘을 찾는다. 누구나 성장 단계별로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내뿜는 본성적 에너지가 있는데, 한국인은 내 안에 마당문화로도 분출했다. 칼 융 학파의 논지에 의하면 인간은 생명 에너지가 성장기별로 고독자, 방랑자, 전사, 공동체자, 순수자, 마술사의 에너지로 나온다고 했다. 이 본성적 에너지(신명)들을 충분히 잘 쓰느냐에 따라서 내 안에 신성한 힘을 찾는 자기 신화를 창조한다. 나는 기이하게도 새로 창작할 적마다 즐거움을 체험하며 사는 예술인이다. 예술 창작은 그것대로 신화창조가 될 수 있는 사건이다. 어디 예술뿐인가, 창조적 인간은 신화를 창조해왔다. 자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는 말이다. 역사가 의미의 사건으로부터 신화를 창조하듯이 예술은 꿈의 사건화로 신화를 창조한다. 이성과 감성으로만은 이해 못하는 간절한 영성의 힘까지 꺼내어서, 이성적으로만은 이해가 잘 안 되는 기적 같은 신화적 서사가 일어나는 것이 역사다. 우선 한국발 최근 현대신화창조만 보더라도 나는 ‘한강의 기적’과 ‘민주화’와 ‘K-방역 신화’를 꼽는다. 이런 현대신화를 신화소로 만들어 신화미술관에 세우며 홀로 기뻐했었다. 내가 먼저 기뻐야 다른 사람들도 내 창작에 흡족해하며 기뻐할 것이다. 나를 사랑해야 내 안에 긍정의 힘이 나온다.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는 ‘얼쑤’가 있어야 긍정의 마당이 된다. 한국의 마당문화는 이 긍정의 힘으로 겨레의 간절한 힘까지 발동하는 역사에서 나왔다. 열린 참여정신, 유연한 창조성, 감성과 이성과 영성이 모두 마당에서 솟아나고 마당으로 모인다. 마당은 마르지 않는 샘처럼 퍼도 파도 샘솟는 마음속에 있다. 또한 마당은 정화하는 빈터에서 난장을 트고 소통하는 공감의 맞이에서 만들어진다. 우정의 네트워크로 개인과 모임들이 만나며 노니는 풍류마당이며, 역사의 위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비는 소도(蘇塗)마당이다. SNS의 사이버 시공간이며 촛불시민광장의 플랫폼이며 마당의 네트워크가 촛불대항쟁이 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것이 촛불시민의 마당문화이며, 촛불혁명의 뒷심이 바로 마당문화예술이다.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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