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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유종인 劉鍾仁
1968년 인천 출생. 1996년 『문예중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아껴 먹는 슬픔』 『교우록』 『수수밭 전별기』 『사랑이라는 재촉들』 『얼굴을 더듬다』가 있음. jongin-yu@hanmail.net
연근 피리
악기엔 젬병인 내가 가을을 맞으니
물 빠진 진흙에서 뽑아올린 연근을 씻고 씻었다
퉁퉁한 것은 뽀득뽀득 아기의 낯짝처럼 씻기고
좀 가늘고 길쭉한 것은 그 아기의 팔뚝처럼 씻기다
이건 뭔가 수상한 품(品)으로 오기에
숭숭한 연뿌리 구멍에 눈독을 들이니
가을볕에 졸음이 오는 고양이 수염도 보이고 바위 곁에 누운 산국(山菊)도 뵌다
어느 한낮 사창골목 그녀가 유행가처럼 부르는
성경 시편이 낮달처럼 희미하게 비칠까
나는 문득 그 아련함에 입술을 대어본다
악기엔 죽어라 젬병인 내가
길쭉하고 갸름한 연뿌리에 긴 숨을 넣으니
세상에 없는 미욱한 악기가 입에 달리기도 하였다
음정도 박자도 모른 채 악보는 더더욱 모른 채
아득해서 누군가를 불러나 본다는 악사(樂師)를 자처하니
캄캄한 진흙에서 나온 연뿌리가
하루살이 엉기는 가을 천변에 아기 업고 우는 여인의
더운 슬픔도 가만히 따라 부른다
무인점(無人店)
손님이 주인 노릇을 하는 가게가 있다
어리보기가 와서 윤똑똑이가 되는 가게가 있다
물건 값을 치르지 않으면
하느님만 아는 외상이 되는
은행잎 날리는 한낮의 교외,
시외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나는 종점처럼 서고
이 가을날은 무인점,
바람이 어디 빈지문을 잡고 덜컹거리고 싶은
사랑도 제 속종을 팔아보려는
무인점
빈 거울만이 손님을 맞고
거울 속의 손님은
어느새 주인의 눈빛을 닮아가는 가게가 있다
그대를 사고 싶으나
그대를 다 살 수는 없는 이승의 무인점,
가만히 천지를 넓혀가는
늦가을의 무인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