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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동학 경전의 탄생
케리그마를 거부한 천안·목천판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김용옥 金容沃
호는 도올(檮杌). 철학자, 한의사, 고려대 정교수 역임. 최근 저서로 『도올주역강해』 『용담유사』 『동경대전』(전2권) 『노자가 옳았다』 『나는 예수입니다』 『도올 김용옥의 금강경 강해』 『스무살, 반야심경에 미치다』 『중용 인간의 맛』 등이 있음.
* 이 글은 2022년 11월 29일 ‘천안 목천판 동경대전·용담유사 간행 기념 국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필자의 기조강연문 「“동학 초창기 역사에 있어서 천안 목천 사람들의 긴장과 헌신”: 동학혁명의 획기적 계기를 만든 동학경전 목천 목활자본과 목판본」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나의 어린 기억에 남아 있는 천안과 목천
나 도올은 천안 사람이다. 천안읍 대흥동 231번지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자라났다. 휴전이 성립하기 전에 재빼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제3소학교(나중에 천안중앙국민학교가 됨)에 들어갔다. 1959년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나는 순 천안토박이로 컸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천안삼거리는 삼남에서 과거 보러 올라가는 사람들이 쉬어가던 연못과 주막집, 그리고 능수버들을 연상케 하는 옛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삼거리를 지나 진고개라는 꽤 큰 행길이 난 흑성산 옆자락의 고갯길을 넘어가면 목천(木川)에 이른다. 국민학교 꼬마들이 이 수십리 먼 길을 붕어 잡고 멱 감는다고 마구 쏴다녔다.
나는 그렇게 천안의 기를 흠뻑 마시며 컸다. 지금 독립기념관이 들어선 그 산이 흑성산인데, 우리 꼬마들은 토박이말로 ‘거무신’이라고 불렀다. ‘흑성(黑城)’이라는 한자표기로 보면 그것이 ‘검다’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볼 수 있겠지만, 당시 씨알농장을 운영하시던 함석헌 선생이 집회에서 하신 말씀에 의거하면, 거무신의 ‘거무’는 검다는 뜻이 아니고 ‘곰’을 의미한다. 거무신은 ‘곰신〔熊神〕’, 즉 신성한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천안 사람들은 이 거무신의 외경스러운 기를 받으며 컸던 것이다. 우리 때만 해도 거무신에는 호랑이가 살았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인데 우리 동네 대흥동 석호네 집에 엄청 잘생긴 거대한 셰퍼드개가 있었는데 새벽에 거무신 호랑이가 내려와서 물고 사라졌다고 했다. 그 ‘쌔빠또’는 끝까지 저항하면서 용감히 싸웠는데 마당에 피가 낭자했다. 나는 그 낭자한 핏자국을 해 뜬 후에 일어나 보았다. 그 싸움 장면은 실제로 여러 사람들이 보았다고 했다.
진고개를 넘어 북쪽으로 올라가면 목천향교가 나오는데 개울 옆으로 송덕비 류의 고비(古碑)들이 주욱 늘어서 있고 주변의 소소(蕭蕭)한 광경은 매우 고색창연한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목천은 지금은 천안에 귀속되어 있지만, 옛날에는 천안 못지않은 넓은 면적의 별도의 고도(古都)였다. 북으로 성거산이 있고, 남으로 세성산이 있다. 1894년 10월 21일의 세성산전투는 동학혁명의 진로에 암운을 던진 아쉬운 전투였다. 만약 목천에 집결한 동학농민군 3천여명이 일본군·관군을 패퇴시켰더라면 우금치전투의 양상도 달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경사(京師)로 직향한다는 농민혁명군의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튼 내가 보고 느끼며 자란 산하가 모두 피맺힌 조선의 운명, 아니 세계사의 찬란한 여명을 가져온 동학과 관련이 있는데도 나는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컸다. 천안이라는 고을은 본시 천안군과 목천현, 직산현, 이 세 고을이 순치(脣齒)의 관계를 이루면서 상호 발전, 변천하여오다가 1914년 일본의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개편된 행정구역상 천안군으로 합군(合郡)된 것이다. 이 지역은 옛부터 조선대륙의 중요한 센터로서 신라·백제·고구려가 항상 각축을 벌이는 곳이었고, 조선시대에도 교통량이 가장 많은 곳에 속했다. 천안은 이별의 눈물이 뿌려지는 곳이기도 했지만 또 동시에 만남의 환희로 흥타령이 울려 퍼지는 곳이기도 했다.
나는 본시 머리가 영민치 못하기도 했지만, 학벌이니 문벌이니 족벌이니 지벌이니 동창이니 하여 패거리를 운운하는 인간세의 행태가 혐오스러워 일체 그러한 인간관계를 멀리하고 살아왔다. 그래서 단지 고향이라는 이유로 천안에 갈 일은 없었다. 그런데 천안의 경우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너무도 처절하게 나의 어릴 적 낭만이 파괴되어버렸다. 가슴이 아파 한발자국도 고토를 밟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동학을 계기로 하여 고향을 다시 인식하게 되는 인연은 기묘하다면 참으로 기묘하다 할 것이다.
수운의 문제의식과 출판 사명: 수직적 종교사유와 수직적 권력구조의 상응성
동학은 경주에서 태어나기는 했지만 그 동학을 창도한 사람들의 열망의 원천이 충족되는 계기, 간망의 이상이 실현되는 계기는 나의 고향 천안 및 목천·병천 지역 사람들이 제공했다. 1883년 계미년 천안·목천 지역에서의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龍潭諭詞)』의 집중적 발간이라는 이 사건을 계기로 동학은 비로소 오늘 우리가 말하는 동학이 될 수 있었고, 무극대도(無極大道,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가 사용한 동학의 본래 명칭)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동학은 하나의 종교로서 시작된 운동은 아니다. 그것은 종교임을 거부하는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개혁운동이다. 수운은 ‘다시개벽’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 ‘개벽(開闢)’이라는 단어야말로 서양의 ‘종교’(religion)를 대신할 수 있는 우리식 표현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양의 종교는 대체로 ‘초월적 절대자의 존재성’을 전제하고 그 존재에게 나의 운명을 맡기는 절대적 복속을 ‘신앙’(belief)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동학은 ‘무위이화(無爲而化)’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하느님 자체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조작적인 개입〔爲〕이 없이 스스로 그러한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은 세계생성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격적인 존재(Being)인 동시에 철저히 비인격적인 생성(Becoming)이다.
수운의 사상은 매우 심오하다. 논리로 다 분해하기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말하는 진리에 동참했기 때문에 동학은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수운은 동학에 대한 발상을 서학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수운에게 다가온 것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는 테제였다. 보국안민이란 외부로부터 우리 민족에 부과되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위협으로부터 어떻게 이 민족을 보전할까 하는 아슬아슬한 테제였다. 수운은 이 위협을 극복하는 길은 물리적인 대응이 아니라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는 힘을 생성하고 있는 그 핵심적 구조의 허점을 파악하고 그 죄악을 개벽함으로써 우리 문명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정신혁명인 동시에, 우주적인 과업이었다. 보국의 ‘보’는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구극적으로 ‘우리 민중의 의식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서양문명의 초월이었고, 기독교, 서학, 모든 절대적 존재를 전제로 하는 황제적 종교체제의 초극이었다. 수운은 모든 불연(不然, 비상식)은 기연(其然, 상식)으로 회귀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의 사상은 난해했고, 주변 사람들에게나 후대인들에게 제대로 이해되질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조선의 원래적 도덕풍토에서 나온 것임에도 불구하고 영남의 유생들은 그를 ‘서학쟁이’로 휘몰았다. 수운은 마치 무함마드가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거점을 옮기는 성천(聖遷, 헤지라Hegira)을 단행하듯이, 낯선 전라도 남원 땅으로 삶의 거점을 옮긴다. 수운은 그곳에서 홀로 고독을 씹으며 방대한 저작을 할 수 있었다. 수운의 저술이 다 남원 체류기간 동안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교훈가」 「도수사」 「권학가」 「동학론」 「수덕문」 「몽중노소문답가」 등 매우 핵심적인 저작이 남원에서 이루어졌다. 이 행위의 의미를 우리는 명료히 이해해야 한다.
수운은 자신의 대각과 설법의 내용이 주변 사람들에게 일시에 정확하게 전달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기 사상이 조선왕조체제의 근원적 부정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왕조에 수용될 수 없다는 것도 확실히 깨달았다. 따라서 자신의 육신은, 모든 의로운 순절자들이 그러하듯이 죽임을 당함으로써 그 온전한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고 믿게 된다. 대신 그의 사상은 그의 저작을 통하여 한 글자의 왜곡도 없이 후세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불태운다. 그래서 수운은 파접(罷接, 접주接主제도를 취소함)을 통하여 후계자 체제를 한 사람으로 일원화시키고 그에게 자기 원고를 넘기면서, 한 글자도 변형이 없는 상재(上梓)를 부탁한다.
수운에게 있어서 ‘도통의 전수’라는 것은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추상적이고도 상징적인 의발의 전수가 아니고, 매우 구체적인 물리적 사명이다: “내 원고를 한 글자 오석(誤釋)이나 변형이 없이, 있는 그대로 인쇄하여 세상에 유통시켜라.” 이 사명을 받은 자가 경주 동촌 황오리(皇吾里)에서 태어난 해월(海月) 최경상(崔慶翔, 1827~98. 육군법원에서 교수형을 당해 72세의 나이로 사망함. 최시형時亨은 1875년부터 쓴 이름)이다.
4복음서나 바울의 서한이 없이는 오늘날의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었다. 성경이 없이 종교가 존속할 수 없는 것이다. 무함마드의 계시도 『꾸란』으로 남았기 때문에 이슬람이 존재할 수 있었다. 동학도 『용담유사』나 『동경대전』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력이 지금 여기서 굽이치고 있는 것이다.
동학은 인류종교사에서 케리그마가 없는 유일한 종교
그런데 동학 경전은 타 종교 경전과 견주어 말할 수 없는 유니크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케리그마’(Kerygma)의 필터를 거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케리그마’란 20세기 초 기독교 성서신학에서 생겨난 말이긴 하지만, 그것은 모든 종교 영역에 적용될 수 있는 유용한 개념이다. 케리그마는 문자 그대로는 ‘선포’(proclamation)라는 뜻인데, 초기 신봉자들(초대 교회)이 자기들의 교주에 대해 갈망하는 이미지를 선포하기 위하여 경전의 언어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예수의 경우, 그 케리그마는 ‘그리스도’ 즉 구세주(메시아),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포이다. 이 케리그마의 필터를 거치면 인간 예수,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는 사라지고, 케리그마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미지, 즉 초대 교회의 갈망만 남는다. 다시 말해서 2천년 동안의 기독교의 역사는 역사적 예수를 말한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형성된 그리스도를 선포한 것이다. 사실 오늘날의 기독교라는 것은 이렇게 케리그마화된 예수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운은 기독교(천주교·서학)와의 대결에서 모든 신비나 이적이나 예언, 사람을 홀리게 만드는 ‘조화(造化, ‘신비’를 의미함)’를 거부하고 ‘성(誠)·경(敬)·신(信)’이라는 상식적 일상도덕의 가르침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르침에 역행하는 신비주의자들의 ‘홀림’의 위태로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이들이 초기 교단을 형성하게 되면 그의 가르침은 그들의 케리그마에 의하여 왜곡되고 타락되고 신비화되리라는 것을 정확히 예견했다(「흥비가」). 모든 대각의 종교운동은 초기 집단을 노리는 사기꾼들에 의하여 왜곡되는 것이다.
또한 수운은 ‘지식의 허구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로서 지식이 출중한 인물은 사도 바울과 같이 오히려 케리그마를 조직적으로 형성하여 동학의 진로를 바꿀 우려가 있었다. 그가 한문으로만 저술을 하지 않고 동시에 한글 가사를 지었다는 것도 민중에게 직접 개벽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는 사명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산이 단 한건의 한글 서한이나 시조 한수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 그의 형 약전이 서민을 위한 생활백과인 『자산어보』를 집필하면서도 물고기의 한글 이름 한 글자도 써넣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의식구조가 어디까지나 망해가는 조선왕조의 복구(목민牧民)에 머물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운의 문제의식과는 소양지판이었다.
해월은 지식인이 아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좀 어폐가 있다. 해월은 진리의 화신일 뿐, 세속적 학식으로 다져진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한문으로 글을 지을 능력이 부족한 수준의 학식이었다 해도, 그의 관찰력과 통찰력, 이해력은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개념적 사유를 하지 않으나 일상적 언어의 구사는 학식을 소유한 자들이 미칠 수 없는 고경(高境)을 달렸다. 그는 무엇보다도 ‘순박(純樸)’한 인간이었고, 결단(Entscheidung)의 지사였고, 의리의 사나이였고, 고매한 인격자였다.
수운은 자기 말을 고지식하게, 왜곡없이 결행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았고, 해월은 ‘큰선생님’(大先生主, 동학은 교주니 구세주니 하는 말을 쓰지 않는다. 이는 수운 본인이 호칭을 규정해준 것으로, ‘선생님’ 이상의 호칭은 동학 내에서 허락되지 않았다. 수운이 죽고 난 후, 해월이 ‘선생님’으로 불리자 수운은 ‘큰선생님’으로 자연스럽게 호칭된 것이다. 대신사大神師니 신사니 성사聖師니 하는 말들은 모두 천도교 종교교단 성립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다. 교도가 아닌 일반인들이 사용할 필요가 없는 명칭이다)의 말씀을 어김없이 실천하는 데 이 지상에서 찾을 수 있는 더없는 인물이었다.
수운과 해월의 만남은 무극대도의 필연이었고, 조선민족의 행운이었고, 전인류의 서광이었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진 언약은, 순결한 동학의 언어와 정신을 어떠한 케리그마의 왜곡도 침투할 수 없도록 그 원모습을 후세에 전하는 사업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수운은 죽으면서도 해월에게 ‘고비원주(高飛遠走)’를 명했다. 그의 저작원고를 등보따리에 지고 빨리 멀리멀리 도망가라는 훈시였다. 추상적인 메시지가 아니었다. 해월은 수운의 수형(受刑)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월은 수운의 수고(手稿)를 출판 그날까지 온전히 보존했다
동학혁명을 연구하는 학인들이 ‘남접’이니 ‘북접’이니 하는 개념들을 함부로 남발하여 마치 동학조직이 남·북접으로 이원화되어 있었던 것같이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당시 언론이나 소수 기술자(記述者)들이 방편적으로 쓴 국부적 언사를 확대해석하는 데서 생겨난 오류이다. 동학혁명 당시도 모든 지휘권이나 결정권은 해월 최시형 한 사람에게 있었다. 전봉준 장군이 붙잡혀서 취조를 받을 때의 기록을 한번 살펴보자!
問(일본 영사): 동학도 중 접주의 직위를 부여할 수 있는 자가 누구이냐?
供(전봉준): 동학의 모든 접주직함은 오로지 최법헌(崔法軒) 한 사람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問: 그대가 동학접주가 된 것도 해월 최시형이 임명한 것이냐?
供: 그렇다.
問: 묻건대 동학접주라고 하는 것은 모두 최법헌 한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냐?
供: 그렇다.
問: 호남, 호서를 막론하고 모두가 최법헌의 임명을 받는다는 것이냐?
供: 그렇다.
이것은 1895년 3월 7일의 문초기록이다. 이때 해월은 도바리 중이었고 아직 잡히질 않은 시기였다. 하여튼 이때만 해도 전봉준의 입에서 동학의 전국 조직을 관장하는 것은 해월 한 사람이며, 자기는 해월에게서 접주 임명을 받은 전라도 지역의 국부적 접주 한 사람일 뿐이라고 명료한 언설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연구자들은 이러한 명료한 언설을 깊게 이해하여야 한다. 동학을 함부로 분열시키고, 흠집 내는 짓을 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최법헌’이라는 명칭이다. ‘법헌’은 동학조직의 최고지도자라는 뜻이겠지만, 내가 표영삼 선생으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그것은 아주 소박한 해월의 별명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해월은 항상 수운 선생님의 수고를 등짐에 지고 다녔기에 별칭이 ‘최보따리’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큰선생님의 원고라는 것을 몰랐어도, 항상 해월이 보따리를 소중하게 간직하였고 잘 때도 끼고 잤기 때문에,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애칭으로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 강원도 산골지역 사투리에서는 ‘보따리’를 ‘버퍼리’라고 했는데, 그래서 자연스럽게 ‘최버퍼리’가 되었고, ‘최버퍼리’라는 명칭이 한자의 용법과 오버랩되면서 ‘최법헌’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표영삼 선생이 전하는, 초기 동학교인들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확실한 민간전승이다. 해월에게는 수운 선생님 원고와 그것의 간행이 중요한 과제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연을 간직한 이름인 것이다. 그 보따리는 1880년(포덕 21년) 인제 갑둔리에서 개간(開刊)할 때까지(5월 11일), 옹고로시 보존되었다.
해월은 햇수로 36년 동안 계속해서 산간마을을 전전하며 도바리를 쳤지만 단 한번도 체포된 적이 없다. 조선왕조 조정이 세번이나 집중적인 체포령을 내렸어도 그를 검거하지 못했다. 그가 최후로 체포된 것도 도주의 시운이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스스로 체포된 것이다(1898년 4월 5일). 대부분의 수배자들이 체포되는 과정은 내부의 밀고자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변에는 단 한명의 배신자도 없었다. 그만큼 그는 민중의 신실한 친구였고 민중의 보호를 받는 위대한 리더였다. 해월은 조직을 운영하는 귀재였지만 그것은 모두 내면의 도덕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따라서 보따리가 위험에 처한 적은 없었다(최초 간행까지는 17년이 걸림). 그러나 만약 분실의 위험이 있었다 해도 해월이 그 원고를 보존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분량이 아니었기 때문에 부본(副本)을 만들어 여러군데 나누어 보관하는 것도 그리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수고를 상실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문제였다.
『동경대전』이 원고대로 보존되어 오늘 우리에게 원본 그대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동학을 위대하게 만드는 종국적인 사실이며 세계종교사에 유례가 없다. 그런데 ‘구송설(口誦說)’ 운운하는 것은 20세기 천도교단의 몰지각한 지성의 신비주의에서 유래된 낭설이며, 동학 역사의 제반 사실은 구송설, 즉 암송설을 수용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역사적 예수는 없다, 그러나 역사적 수운은 있다
1880년 경진판(인제 갑둔리판)의 간행 대사건을 당시에 기록한 매우 오리지날한 역사문헌이 남아 있다. 『도원기서(道源記書)』라는 문헌은 『대선생주문집(大先生主文集)』(수운의 출생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과 그 이후 해월 중심의 교단의 역사를 실제 체험에 즉하여 기술한 원사료인데, 후반부는 동학의 도차주(道次主) 강시원(姜時元, 영덕 출신의 대지식인. 해월의 단짝친구와도 같은 성실한 사람이자 해월 보필의 일등공신. 1894년 청주전투에서 피체, 12월 청주병영에서 처형됨)이 1879년 11월 10일부터 집필하여 12월 말경에 탈고하였다. 다음해 경진판 간행사건은 나중에 첨가하였다. 그러니까 참으로 오리지날한 당대의 문헌이다.
이 『도원기서』의 기록에 해월이 수운의 원고를 분실하여 특별한 계시를 받아 다시 지어내었다는 이른바 ‘구송설’은 일말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비교적 초기 문헌으로서 권위있는 근거자료인 『해월선생문집』(늦어도 1906년 이전에는 성립), 『본교역사(本敎歷史)』(추암秋菴 오상준吳尙俊 집필. 1910년 8월~14년 11월), 『천도교회사초고(天道敎會史草稿)』(1920년,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에서 교리강의안으로 작성) 등에 그러한 이야기는 냄새도 비추지 않는다. 하다못해 1920년에 최유현이 쓴 『시천교역사(侍天敎歷史)』에도 일말의 언급이 없다.
만약 인제에서 『동경대전』 초판본을 간행할 때, 수운 큰선생님의 초고가 유실되었거나 여하한 이유로든지 존재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그 사연을 기록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간행할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그리고 하늘에 고유식을 올리는 당당한 치성제도 지냈을 리 만무하다. 아마도 해월이 큰선생님의 수고를 분실하였다고 한다면, 그리고 영원히 찾을 수 없는 회록지재(回祿之災)를 당하였다고 한다면 선생님 뵐 면목 없다고 자살이라도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교단의 와해를 의미한다. 이 사안이 그만큼 중대하다는 것을 오늘의 사가나 학자, 연구자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수운이 상재를 맡긴 것은 왜곡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단순한 전달이라면 필사의 방식도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수운이 판각인쇄를 부탁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공적인 정본(正本)을 남기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인쇄라는 것은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예수의 복음서는 물론 예수 본인이 집필한 것이 아니다. 제자가 집필한 것도 아니다. 제자들은 저술능력이 없는 사람들뿐이었다. 그것은 초대 교회의 지식인들이 예수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기존의 말씀자료들을 모아 구성한 드라마양식이다. 즉 로기온(말씀자료)과 내러티브(정황설명)가 결합한 매우 특수한 문학양식이다. 문학이라는 것은 오늘의 연속방송극처럼 기본이 픽션이다. 예수라는 드라마는 예수라는 사실(역사적 실존)과 일치될 필요가 없다. 케리그마의 상(像)을 확대시키는 것이 본연의 사명이다.
그러나 수운은 바로 이런 드라마를 원치 않았다. 자신의 삶의 열정과 진실과 지혜, 그리고 조선민족의 앞날에 대한 우환을 자신의 살아 있는 모습에 담겨 있는 그대로 전달하려 했다. 수운은 해월에게 그 인쇄업무를 종단조직 형성보다 더 우선적 과제로 주었다. 그러나 해월은 그 과제를 안고 도바리행각을 벌이면서도 위대한 포접제도의 전국 조직을 구축했다. 그의 조직의 힘이 책 1종을 간행할 정도로 안전하게 구축된 시점이 바로 1880년경이었다. 20년 가까운 세월을 통해 경전 간행의 힘을 축적해왔던 것이다.
구송설이라는 망언의 정체: 이제 그 망언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도대체 이 ‘구송설’이라는 것은 어디서 생겨난 망언인가? 1920년에 교단의 공식적 역사로서 씌어진 『천도교회사』에까지도 언급된 바 없는 이 망언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 망언의 출처는 내가 조사해본 바로는 『천도교서(千道敎書)』라는 문헌이 유일하다. 『천도교서』는 1921년 4월 5일에 발행된 것인데 ‘박인호 저(朴寅浩著)’라고 표지에 박혀 있다. 춘암(春菴) 박인호(1855~1940)는 예산 사람으로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1861~1922, 청주 사람)를 뒤이어 천도교의 제4대 교주가 된 사람인데 그는 3·1독립만세운동 직후 내외의 압력으로 교단이 극히 불안정할 때 이 교리서를 집필한 것처럼 부각된다. 기존의 교리서와 다른 점은 손병희시대의 역사를 소상하게 다루었다는 것이다. 춘암은 1882년 동학에 입도했는데, 기실 손병희도 같은 시기에 그의 조카 송암(松菴) 손천민(孫天民)의 손에 이끌려 들어왔다. 그러니까 춘암과 의암은 동기생이다. 그런데 춘암은 의암보다 나이가 6살이나 위다. 그런데도 춘암은 의암을 깍듯이 선생으로 모셨다. 춘암은 동학혁명 당시 덕산 대접주 자격으로 충청도 홍성, 예산, 신례원 지역에서 동학군을 이끌고 맹렬히 싸웠다. 춘암은 우직한 사람이고 최린(崔麟)과 같은 인간과는 달리 투철한 항일정신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춘암은 손병희시대의 천도교 내부사정에 밝았다.
그러나 상세히 본말을 상고해보면 『천도교서』는 박인호가 집필한 문헌이 아니다. 박인호 이름으로 나오기 이전에 이미 1920년 초에 소집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의 임시교리강습회에서 프린트본으로 배포된 것이다. 그리고 이 『천도교서』의 저자는 알 수가 없다. 『천도교서』의 내용은 오류가 많고 또 판본이 여러개가 있다. 매우 불확실한 문헌이다. 단지 춘암은 해월 선생을 ‘신적인 존재’로 부각시키는 데 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춘암이 『천도교서』를 자기 이름으로 펴낼 때 의암은 3·1독립만세운동의 수뇌로서 옥고를 치르고 병상에 누워 있었고 교단은 분열되는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춘암은 이러한 분열을 막기 위해 ‘수운-해월-의암’을 모두 신격화하려 했던 것이다.
『천도교서』 제2편 제11장의 기술은 이러하다.
포덕 21년(1880) 경진 5월에, 신사(神師), 경문 간행소를 인제군 갑둔리 김현수가(金顯洙家)에 설(設)하시다. 대구참변(大邱慘變) 후로, 대신사(大神師)의 소저(所著) 간책이 화신중(火燼中)에 소진(燒盡)되고 일(一)도 가고(可考)할 바 무(無)하더니, 시시(是時)에 신사, 친히 수집하실새 본래 문식(文識)이 무(無)함으로 기술치 못하시고 천사(天師)께 고하사, 강화(降話)의 교(敎)로써 경문(經文)을 구송(口誦)하야, 인(人)으로 하야금 서(書)케 하야 창간하시다.
참으로 황당한 논리가 아닐 수 없다. 만약 ‘대구참변’이 기대치 못했던 특정한 사건이었다면 모르겠으나, 이 ‘대구참변’은 수운이 1864년 3월 10일 대구 남문 밖 관덕당 장대(將臺)에서 참수된 그 사건을 명료하게 지칭하고 있다. 이 사건은 전해 12월 10일 용담에서 수운이 체포된 이래 4개월의 시간을 경과하며 그 추이가 예정되었던 사태였고, 이 시기에 용담에 화재가 나서 수운 선생이 직접 지으신 간책이 모두 불에 탔다는 이야기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박인호는 1882년에 이르러 입도한 사람이고, 또 이 문서의 저자 또한 수운 선생과 해월의 정신적 내면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수운의 ‘소저’는 한문 용법이나 그 내용이 특이하고 수운 자신의 독특한 구문론, 의미론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문자를 모르는 자가 ‘하늘에 계신 스승님의 강화(降話)의 가르침’으로 구송할 수 있는 그런 성격의 문헌이 아니다. 더구나 문자에 어두운 해월이 그 뜻을 모르는 채 구송하는 것을 옆에 있는 타인이 받아 적어 문서로 만들어 그것으로 창간하였다는 것은 도무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있을 수 있는 사태가 아니다. 『천도교서』의 이러한 언급은 그 전체가 불성실하고, 사실의 근거가 없으며, 어불성설,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다음 12장에는 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제군들이여! 요즈음 오도(吾道)에 들어오는 자는 많으나, 도(道)를 아는 자는 적음을 한(恨)하노라. 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이요, 자기를 알지 아니하고 먼저 타인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어찌 민망치 아니하뇨……
내가 독공(篤工)할 때에 큰비 속에 있어도 내 옷이 젖질 아니하였으며, 능히 90리 밖에 있는 사람이 보였으며, 또 사기(邪氣)를 멈추게 할 수 있었으며,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이 모든 것을 돈연(頓然)히 끊었노라. 원래 이따위 것들은 소사(小事)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결코 대도(大道)의 정리(正理)가 아니라. 고로 큰선생님께서 조화를 거부하신 것도 이에 원인(原因)한 바니라. 도는 고원난행(高遠難行)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용행사(日用行事)가 다 도 아님이 없나니, 천지신명이 다 물(物)로 더불어 추이(推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성이면 감천이니, 제군은 인(人)이 부지(不知)함을 환(患)치 말고, 오직 사(事)에 처하는 도에 통(通)하지 못함을 환하라!
천사강화(天師降話)를 논한 글, 바로 옆에는 또 기적이나 조화나 비술을 금하는 상식적 언어가 적혀 있다. 구송설이 얼마나 엉터리없이 지어낸 말인지, 그 자가당착의 논리에 의하여서도 입증되는 것이다. 동학은 상식인데, 그 상식을 전하는 경전이 비상식적인 신비로운 강화에 의한 것이라니 도대체 말이 되는가?
이슬람 『꾸란』 성립을 모방한 신비주의와 의도적 왜곡
당시 우리나라에도 이슬람종교가 소개되어 히람동굴 같은 얘기가 퍽 많이 유포되었는데, 이 강화구송 이야기는 무함마드의 체험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이슬람도 무함마드가 글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들려오는 천사 가브리엘의 말을 완전히 자기 의식을 상실한 상태에서 타자로서 이야기하는 신비스러운 언어를 주변 글 잘 아는 제자들이 집필한 것을 집대성한 것이 『꾸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꾸란』의 경우는 610년(무함마드 40세)부터 632년까지 자그마치 23년에 걸친 계시의 기록이다. 계시라도 23년 동안의 꾸준한 계시라는 것은 계시라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것은 차라리 무함마드의 삶의 기록이다. 그리고 탁월한 상인이며 전략가였던 무함마드가 글을 몰랐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하여튼 무함마드에게 내려진 알라의 계시도 상식으로 환원이 가능하다. 『동경대전』은 알라의 계시가 아니다. 수운의 삶의 대각의 언어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월이 원고 그대로 우리에게 전했다. 이것이 최종적 사실일 뿐이다.
이 강화구송설이 『천도교서』의 허언에 머물렀다면, 그냥 초기 교단의 귀여운 제스처로 넘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재탕 삼탕해서 화려한 이야기를 지어낸 장본인이 바로 야뢰(夜雷) 이돈화(李敦化, 1884~1950. 함경남도 고원군에서 태어나 19세 때 동학에 입도. 『개벽』 주간, 최린이 주도한 천도교 신파의 이론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 조선청년을 전선으로 내보내는 연설을 적극적으로 함. 내선일체의 정신을 고취, 열렬한 친일행각이 줄을 이음)였다. 춘암 명의의 『천도교서』는 본 사람이 적으나 야뢰의 『천도교창건사(天道敎創建史)』(1933)는 베스트셀러 중의 하나였다. 그 영향은 압도적이었다. 야뢰의 글은 『천도교서』보다 12년 늦게 나온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서』를 그대로 베꼈고 문장은 더 졸하다. 그 많은 동학의 역사에 관한 문헌이 엄존하고 있는데 왜 하필 『천도교서』를 베꼈을까? 무함마드식의 구송설이 더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자아내고 신앙심을 돈독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을 보라!
경진 4월 5일에 대신사의 향례(享禮)를 마치시고, 5월에 신사, 경전 간행소를 인제군 갑둔리 김현수가(金顯洙家)에 설(說)하시다. 원래 대구참변(大邱慘變) 후에 대신사의 소저간책이 화신(火燼) 중에 다 소실되고 일문일자(一文一字)도 가고(可考)할 바 없더니, 이때에 신사 친히 수집(修輯)하실새, 본래 문식(文識)이 없음으로 글로 기술치 못하시고, 경전을 친히 암송한 후에 사람으로 하여금 대서(代書)케 하야 개간한 지 일개월에 흘공(訖工)하니 이것이 곧 『동경대전』이었으며,
그 이듬해(1881) 포덕 22년 신사(辛巳) 6월에 신사, 다시 개간소를 단양군 남면 천동 여규덕가(呂圭德家)에 개설하시고, 조선문 가사 8편을 구송하야 간행케 하시니 이것이 곧 『용담유사』이었다.(『천도교창건사』 제2편 30면)
야뢰 이돈화는 아예 이듬해 여규덕가에서 발간된 『용담유사』까지도 ‘구송’으로 해버렸다. 과연 야뢰라는 사람이 수운과 해월의 삶의 고뇌를, 그 긴장과 헌신과 끊임없이 닥치는 위기상황의 흑암(黑暗)을 눈곱만큼이라도 이해했는지 참으로 한심하다 할 것이다. 표영삼 선생은 말씀하신다.
수운과 해월의 비전과 인간적 약속을 춘암-야뢰의 격(格)에서 논한다는 것 자체가 참 부끄러운 일입니다. 구송설 하나만 해도, 내가 왜 이렇게 애타게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외치는지를 주변의 학자라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요. 구송설은 동학의 원래적 가치를 근원적으로 파멸시키는 낭설입니다. 『동경대전』이 해월의 암송이라면 동학은 해월 것이 되고 수운은 사라져버려요. 동학사에 끼어들 수 없는 파국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학자라는 사람들이 구송과 문헌보존의 절충안을 운운하며 학식을 과시하고 논문을 쓰고 있어요.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동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하찮은 듯이 보이는 문제가 동학의 가치를 근원적으로 무화(無化)시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수운은 이미 죽기 전에 케리그마의 폭력을 예언하고 대비한 것이다. 신약성서 속에 예수는 없다. 예수에 관한 말잔치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동경대전』 속에는 수운이 있다. 잔치는 없고 역사적 그 인간〔其人〕의 피눈물만 있는 것이다. 세계종교사의 가장 유니크한 특성이다. 그 특성을 우리 천안·목천 사람들이 발현시킨 것이다. 동학을 사랑하는 우리 천안·목천 사람들은 일제강점기 천도교 지성들의 굴절과 굴욕과 굴요(屈撓)로부터 근원적으로 벗어나야 한다.
여기 언급된 단양군 남면 천동의 여규덕은 근세 정도를 지킨 존경스러운 정치인 몽양(夢陽)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의 작은할아버지임을 밝힌다. 그리고 계미 3월에 해월을 찾아간 사람 명단 중에 있는 여규신(呂圭信)은 몽양의 친조부이며 여규덕의 형님이다. 몽양도 결국 동학의 기(氣) 속에서 자라난 인물이다.
『동경대전』은 모두 목판본이 아닌 목활자본이다
자아! 이제 목천판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여러분들은 이제 경전 간행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깨달았을 것이다. 『동경대전』 판본에 관한 문제는 이미 나의 저술, 『동경대전 1·2』와 『용담유사』, 총 3권의 책 속에 상술되어 있다. 현재 『동경대전』 간본의 주요 판본들이 다 노출되어 있고, 그 복사본 5종이 모두 나의 책 『동경대전 1』 후미에 수록되어 있다.
1. 인제경진초판본(麟蹄庚辰初版本, 1880년 6월)
2. 목천계미중춘판(木川癸未仲春版, 1883년 2월)
3. 경주계미중하판(慶州癸未仲夏版, 1883년 5월)
4. 인제무자계춘판(麟蹄戊子季春版, 1888년 3월)
5. 신묘중춘중간판(辛卯仲春重刊版, 1891년 2월)
연구자들에게는 더없이 행복한 라이브러리라고 생각된다. 원본이 다 공개되었으니 왈가왈부할 건덕지가 없다. 원사료를 공개하지 않는 상태에서 임의의 주석을 달거나 비교논문을 쓰는 것은 양심있는 학인이 할 짓이 아니다. 이제 동학 경전의 경우는 누구나 다 귀한 원전을 갖게 되었으니, 판본에 관한 것은 암중모색을 할 나위가 없다.
나의 연구과정에서 드러난 최초의, 그리고 막중한 오류 발견의 사건은 간행된 『동경대전』의 모든 판본이 ‘목판본’이 아니라 ‘목활자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며, 여태까지 전제해왔던 많은 상념(常念)이나 논리적 전제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서지학 전문가들의 눈에는 인쇄과정을 캐 들어가지 않아도, 인쇄된 책만 가지고도 그것이 목판본인지 목활자본인지를 쉽고 정확하게 식별할 수 있다. 이것은 ‘주장’의 테마가 아니라 ‘과학적 사실’(scientific fact)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다.
목판본은 우선 ‘목판’을 만들어야 하고 또 ‘목각’을 해야 하는데, 이것은 시간과 공이 엄청 들어가는 작업이다. 해인사 경판(특별한 산공재散孔材의 산벚나무를 사용함) 한장을 만드는 데 최소한 3년의 세월이 걸린다고 하는데, 과연 관헌의 눈을 피해 도주 중에 있는 사람들이 할 짓인가? 그러고 나서 다시 도장을 파듯이 한 글자 한 글자 목판 위에 좌우가 뒤집어진 글씨를 새겨넣어야 하는데, 과연 일반 동학도들 중에서 몇명이나 그러한 특별기술을 소유하고 있을까? 최초의 간행 소식을 전하는 『도원기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5월 9일(1880) 각판소(刻板所)를 설치하였고, 5월 11일에 개간(開刊)하기 시작하여, 6월 14일에 이르러 인출(印出)하기를 마치었다. 15일에 별도로 제사〔여기 ‘제사’는 수운 선생님께 드리는 제사—인용자〕를 지내었다.
자아! 한번 생각해보라! 이 대공사가 1880년 5월 11일에 시작하여 6월 14일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6월 15일에는 수운 선생님께 역사적 대업을 완수했다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경대전』 최초의 판각이라는 대사업이 불과 한달 사나흘밖에는 안 걸렸다는 것이다. 해월 선생 일생을 기록한 유일한 문헌인 『해월선생문집』(1898년부터 1906년 사이에 성립한 매우 초기의 진실한 문헌)에, 이 사실에 관하여 “간출대전백여권(刊出大全百餘卷, 『동경대전』 100여권을 간출해내었다)”이라는 기록을 남겨놓고 있다. 그러니까 최초의 간출 인쇄부수는 100부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00부는 매우 합리적인 숫자이다. 그러나 100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을 만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물리적으로 몇년이고 걸려야 하는 사업이 단 한달 만에 이루어졌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것은 일종의 ‘벼락치기 인쇄’인데, 이 사업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목활자본’ 인쇄방식밖에는 없다.
목활자본은 목판이 필요 없고, 문선과 식자, 조판작업으로 끝나며 소수 분량을 찍고 나면 금방 해판(解版)해버려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 공정의 수고를 줄이고, 비밀리에 진행하며,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은 목활자본의 방법밖에는 없다. 그리고 금속활자는 관에 독점되어 있지만 목활자는 민간에서 자유롭게 활용되었고, 19세기 후반에는 목활자업자들이 족보 인쇄 등으로 성업을 누리고 있어서 컨택만 되면 금방 와서 모든 채비를 차려주었다. 인제판, 목천판…… 이후의 모든 『동경대전』 인쇄는 목활자본이다. 이 사실을 아무도 주목하지 못했다. 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박철민 박사(서지학 전공), 그리고 국립중앙도서관의 관계자들의 도움을 얻어 움직일 수 없는 이 사실을 밝혀냈다.
“성주현 박사! 쌩구라친 것 아냐? 인제군 학술세미나 자료를 보니까 뭐 목판 보관 서고까지 있었다고 써놓고 있는데 그게 다 거짓말이 되잖아! 목판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구! 당신두 신나게 거짓말을 떠들었던데 어떻게 하지?”
“고치면 되죠. 잘못된 것인데 고쳐야죠. 그게 뭐 어려운 일인가요. 간판부터 싹 갈아야 돼요.”
동학·천도교사의 권위있는 연구자인 성박사의 답변은 명쾌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잘못된 것은 고치기를 두려워해서는 아니 된다)”라는 『논어』의 말씀처럼 그 해결책은 명료한 것이다. 그러나 학인이라 자칭하는 자들은 지금도 ‘탄개(憚改)’하고 있다. 한심하다! 물론 목천판도 다 목활자본이다.
목천판 출판 대사업에 대한 진술과 기록들
목천판 인쇄대업(내가 ‘판각’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인쇄’라는 말을 쓰는 것은 목활자본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894년 갑오년 10월 27일, 세성산전투에서 붙잡힌 동학혁명군 리더 중의 한 사람인 김화성(金化成)의 진술이다(『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실린, 관군 장위영壯衛營 부영관副領官 이두황李斗璜의 문초기록). 김화성은 말한다:
저는 계미년(1883) 초에 보은에서 최시형에게 동학의 도를 전수받아 목천(木川) 복구정(伏龜亭, 지명)에 사는 대접주 김용희(金鏞熙)·김성지(金成之)〔여기서 ‘대접주’라는 말은 김용희에게만 걸린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인용자〕와 한마음으로 결의를 맺고, 스스로 ‘삼로(三老)’라 칭하였습니다. 그리고 동과 서에 각기 포(包)를 설하여 동학의 도를 널리 펼 것을 도모하였습니다. 먼저 대접주 김용희와 더불어 포에 있는 돈 6천냥을 거두어 모은 후에 『동경대전(東經大傳)』〔온전 전全 자가 아니다—인용자〕 100권을 개간하였습니다. 그중 30권은 최시형에게 보내주었고, 나머지 70권은 저와 용희가 반씩 나누어 배포하였습니다.
이 심문기록에 의하면 목천 지역에서 열렬하게 동학운동을 하던 ‘삼로’가 있었는데, 이들은 보은에 있던 최시형으로부터 직접 도를 전수받아 포접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삼로는 해월과 연락망을 구축하고 있었고, 또 그 정성과 신념이 확실했고, 또 자금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삼로는 김용희 김성지 김화성이다. 이중 김용희가 리더였고 자금동원력이 있었다. 해월은 인제에서 『동경대전』 간출작업을 하기는 했어도, 그것이 최초의 작업이었고, 또 과연 『동경대전』의 내용을 어떠한 형식 속에서 구성할지에 관하여 확고한 틀이 짜이질 않은 상태에서 이룩한 작업이었기 때문에 미흡한 점이 많았다.
인제초판본은 동학 경전이라기보다는 수운 선생 개인문집의 개념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그래서 재간행사업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 목천이라는 새로운 거점에 눈을 뜨게 된다. 목천 사람들은 의리가 있었고 또 재력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변통(變通)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작업을 위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접근성도 좋은데다가 엄폐도 쉬웠고, 또 사방으로 도망갈 수 있는 지형적 이점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목천현은 재력가가 많았다. 당대 목천현은 지금 독립기념관이 자리 잡고 있는 그 작은 동네가 아니라, 병천·수신·성남·동면·북면·목천 동부 6개 면을 포섭하는 큰 단위였다. 『순무선봉진등록』의 기록 중에 가장 리얼한 부분은 돈 6천냥을 모아 단시간 내에 100부를 개간하였고, 그중 30권은 최시형에게 갔고, 나머지 70권은 김화성과 김용희가 나누어 배포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미 살펴본 대로 인제에서 간행한 부수가 100부였다면, 목천판도 역시 그 범위였을 것이다. 당시 종이를 많이 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여튼 이 삼로 쪽의 기록을 염두에 두고 다시 여타 쪽의 기록을 살펴보자!
초기 문헌 중 『해월선생문집』에는 목천판 기사가 없다. 그리고 추암 오상준이 집필한 『본교역사』(1910~14)에도 목천판 이야기가 없다. 그런데 1920년에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에서 집필한 『천도교회사초고』에 목천판 이야기가 실려 있다. 최초의 언급인 것 같다. 그러니까 목천판 『동경대전』은 37년이 지난 1920년에나 최초로 공식적으로 언급된 것이다. 그런데 이 교단의 언급은 김화성의 진술과 출입이 있다. 『천도교회사초고』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포덕 24년(1883) 2월에 신사, 동경대전 간행소를 충청도 목천군 구내리(區內里) 김은경가(金殷卿家)에 개설하시고, 『동경대전』 천여부를 발간(發刊)하시다.
이것이 목천판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그런데 이 기록은 간행의 주체를 삼로로 밝히지 않는다. 그 대신 김은경이라는 인물이 주체로서 특기된다. 『순무선봉진등록』에 “목천복구정 대접주 김용희(木川伏龜亭大接主金鏞熙)”라는 표현이 있지만 ‘복구정’이 『동경대전』 간행소일 필요는 없다. 그리고 김용희는 보통 ‘접주’라 할 수 있는 인물이며 목천군 내에서 재력이 꽤 있었던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지방사학자들의 연구에 의거). 이것은 삼로 중의 한 사람인 김화성의 진술이기 때문에 삼로의 역할을 좀 과장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튼 삼로의 거사와 김은경의 간행사건은 별도의 두개의 사건일 수는 없다.
그리고 교단 측의 발행부수 1천부와 삼로의 진술 100부 중에서 무게는 당연히 100부에 실린다. 당시 천부를 인출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속하는 일이었다. 현재의 출판사 사정으로도 책 천부 인쇄는 쉬운 일이 아니다. 교단의 기록은 아무래도 교단의 사업을 융성한 것으로 과장하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천부는 낭설이다! 그런데 『본교역사』와 『천도교회사초고』에 모두 김은경에 관한 중요한 기사가 실려 있다. 『본교역사』는 말한다.
포덕 22년 신사(辛巳) 8월에 유경순(柳敬順), 윤상오(尹相五), 김영식(金榮植), 김은경(金殷卿), 김성지(金成之), 내알신사(來謁神師)하야 문도수절차(問道修節次)하다.
『천도교회사초고』는 말한다.
포덕 22년(신사) 8월에 유경순, 김은경, 윤상오, 김영식, 김성지 등이 신사(神師)에 내알(來謁)하야 수도(修道)하는 절차(節次)를 문(問)하다.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 실려 있다. 『천도교회사초고』는 『본교역사』를 참고한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1880년 6월에 인제 갑둔리에서 역사적인 간행을 한 후, 교세는 점점 확장일로에 있었다. 해월은 다음해(1881) 6월, 장소를 단양의 여규덕 집으로 바꾸어 『용담유사』를 발간하였다. 당시 상황으로 볼 때 이것 역시 목활자본이었을 것이다(애석하게 이 판본은 전하지 않는다). 『용담유사』의 발간은 동학이 직접 민중과 소통하게 되는 위대한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민중은 뜻을 몰라도 『용담유사』를 읽고 암송하고 또 전사할 수 있었다. 『용담유사』는 순식간에 전파되어나갔다. 나도 이 시기에 씌어진 『용담유사』 수사본 하나를 소장하고 있다.
김은경과 해월의 교감: 해월은 목천에 왔다
해월은 교세의 확장에 따라 새롭게 경전을 발간할 계기를 모색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 매우 믿음직한 목천 사람이 찾아온 것이다. 김은경은 실제로 병천 사람으로 상당한 재력가였으며 학식과 인품이 출중한 인물이었다. 『본교역사』와 『천도교회사초고』에 따르면 ‘수도 절차에 관하여 문의하였다’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해월과 김은경 사이에서 『동경대전』의 중간(重刊) 논의가 오갔던 것이다. 그리고 해월은 어느 시기 목천을 방문하여 그 구체적 정황을 점검하고 사람들을 만났을 것이다. 목천판은 체재(體裁)의 변화가 있기 때문에 지도부의 직접지도가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업이었다. 목천판 『동경대전』 간행에 관한 가장 포괄적인 논의는 『천도교회사초고』와 같은 1920년에 씌어진 『시천교역사』에 잘 표현되어 있다.
『동경대전』을 중간(重刊)하여 각 포에 배포하다.
인간소(印刊所)를 목천군 구내리 김은경가에 다시 설치하고, 『동경대전』 천여부를 다시 간행하여 각 포에 반급하였다. 해월 선생님께서 권말에 발문을 쓰시어 그 의의를 밝히시었다. 이때에 우리 도를 흠모하여 입교하는 자들이 각 처에서 몰려들었다. 충추, 청풍, 괴산, 연풍, 목천, 진천, 청주, 공주, 연기 등 군에서 교세가 불어났다. 그때 초창기의 사람들을 대강 거명하면 다음과 같다. 손성렬, 안교선, 김영식, 김상호, 김은경, 안명익, 윤상오, 이일원, 여규덕, 여규신, 유경순, 이성모 등은 입교자들의 효시가 되는 인물들이다.
후대에 성립한 『천도교창건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때의 분위기를 총정리하고 있다.
포덕 24년 계미 2월에 신사, 다시 간행소를 충청도 목천군 내리〔“木川郡內里”라고 쓰여 있는데 ‘목천 군내리’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내리區內里’에서 ‘구區’ 자를 빼먹은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야뢰의 기술은 부정확한 곳이 많다—인용자〕 김은경가에 설(設)하시고 『동경대전』 천여부를 간행하사 각 포에 반급(頒給)하니, 이때에 도운(道運)이 충청 경기에 파급하야 포덕이 날로 융성하였었다.
해월의 설법을 통해서만 듣던 수운의 외침을, 지식인은 한문으로, 대중은 한글로 직접 접하는 감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그 열망을 불러일으킨 진원이 바로 번화한 천안삼거리를 살짝 비껴난 아우내에 있었던 것이다. 해월은 『동경대전』 초각 이듬해, 단양 천동에 있는 여규덕가에서 다시 『용담유사』를 간행하고 바로 두달 후에 병천 사람 김은경을 만났던 것이다. 김은경의 아버지는 무과에 등과하였고 해남현감을 역임했다. 김은경은 무반집안의 재력가였고 매우 성실한 인물이었다. 해월은 그의 인품과 역량을 믿고 재차 간행의 대업을 부탁한다. 김은경은 해월 알현 후 목천으로 돌아와서 김용희를 만나고 삼로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한다. 하여튼 목천 간행소는 구내리 김은경가에 설치된 것이 분명하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20세기 조선문학의 태두 중의 한 사람인 이기영(李箕永, 1895~1984. 민촌民村 이기영은 천안 아산 사람으로, 카프KAPF의 주역)의 둘째 고모가 김은경의 집안으로 시집을 갔다 하니 김은경가와 이기영가는 사돈지간이다. 이런 분위기만 보아도 김은경 집안의 성세를 헤아릴 수 있다.
동학은 출판을 통하여 근세 최대의 전투를 감행하였다
여기 ‘구내리區內里’라는 것은 순 이두(吏讀)식의 표기이다. 구내리의 ‘구’는 ‘아홉’이다. ‘내’는 ‘냇갈’을 의미한다. 원래 ‘병천’이 여러 냇갈이 만나 어우러지는 곳이라 하여 토속우리말로는 ‘아우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니까 구내리는 실상 병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지역에는 ‘구계(九溪)’라는 이름도 있고, ‘죽계(竹溪)’라는 이름도 있다. 모두 우리말을 한자화하는 데서 생겨나는 이름들이다.
우리의 최종적 결론은 이러하다. 이 전체 사업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사람은 ‘아우내의 김은경’이다. 김은경은 이러한 대업을 이룩하고서도 천수를 다하고 갔다. 강릉 김씨 족보에 의하면 김은경은 77세까지 살았다(1855년에 태어나 1931년에 돌아감). 그러니까 김은경은 목천의 대공사를 마치고 세성산전투에는 참여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가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그를 탓할 수 없다. 오히려 그는 보호되어야만 할 인물이었다. 그러나 세성산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죽음을 직면한 삼로의 한 사람 김화성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생사를 같이한 사람들의 시각으로 사태를 바라보기 마련이다. 그래서 김용희가 전적으로 이 간경(刊經)사업을 주도한 것으로 인식하고 진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 삼로의 헌신을 가능케 한 총체적 바탕을 마련한 것은 김은경이었고 김은경의 배후에는 해월이 있었다. 목천 간경사업은 해월이 직접 김은경을 통해 주도한 것이다. 목천 간행의 부수는 100부래야 맞다. 김화성의 진술(진술 후에 곧 총살됨)은 진실된 것이다. 김화성의 진술 속에는 원래 간행소의 위치에 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삼로만의 사업으로 진술한 것도 김은경을 보호하기 위한 것임에 분명하다. 김은경은 당시 40세였고 굳건한 동학의 포스트였다. 그러니까 목천 간경사업은 김은경과 삼로가 합심해서 이룩한 쾌거였다. 그뿐만 아니라 천안·목천 지역의 수많은 동지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았다는 것이다. 배신자가 전무했다.
자아! 간경소는 과연 어디에 있었을까? ‘구내리’라는 것은 아우내(병천)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그 말로써는 구체적인 장소를 파악할 수 없다. 『동학 2』(표영삼 지음, 통나무 2005) 111면을 보면 표선생이 김은경이라는 인물의 아이덴티티를 추적하는 과정이 실려 있다. 표선생은 호적과 족보 등의 자료를 통해 동면 죽계리에서 김은경을 찾아내고, 또 평기리 면실마을에서 김은경을 찾아낸다. 그리고 이 양자를 별도의 인물로 간주하고 동학접주는 면실마을에만 있었다고 추정한다.
그러나 그후 지방사 연구가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면실마을의 김은경과 죽계리의 김은경은 동일인물이며, 동학에 헌신한 재력가임이 밝혀졌다. 면실마을이 본가고, 죽계리에도 땅이 있었다. 김은경은 산소가 죽계리에 인접한 덕성리(德星里, 지역 사람들은 덕성리를 바타니라고 부름)에 현존하고 있으며, 그 증손자가 아직도 생존하고 있어 많은 자료를 일러주었다. 면실마을은 바로 유관순 열사가 거사를 한 아우내장터에서 멀지 않은 곳이며 간행소로서는 부적합하다. 많은 고증과 비정을 거쳐 간행소는 현재 주소로 말하자면 천안시 동남구 동면 죽계리 450번지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 주제를 탐색하며 연구를 진행한 지방사학자들과 모든 정보를 취합하여 나에게 전해준 시민운동가 이용길(李鏞吉, 동학농민혁명기념도서관건립 추진위원장) 선생의 노고에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죽계리 450번지’는 우리 민족 인내천 민주사상의 한 기념비적 성소로서 추앙되어야 할 것이다. 이곳에서 간행한 서적은 목천판 『동경대전』에 국한되지 않는다. 1883년 한해에 이루어진 대업은 나의 『용담유사』(통나무 2022) 42면 전후에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세 사건이 연속으로 목천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은 목천·병천 사람들의 집요한 협조와 불굴의 의리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들은 출판사업을 통하여 혁명을 이루었고 위대한 전투를 치렀던 것이다. 거무신의 호랑이는 거저 으르렁거린 것이 아니다. 위대한 천안(목천·병천)이여!
동학실천시민행동의 이요상 대표가 위의 표를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고 했다. 목천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의 간난의 역정이 이 서물 속에 다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저항의 역사와 인류사 개벽의 에포크
동학을 둘러싼 많은 문제들이 학식이나 정보의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 ‘인간 수준’의 문제이다. 수준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이, 수운과 해월의 소박한 진실을 몸으로 느껴볼 수 없는 자들이, 학설이라는 것을 만들어 우겨대는 조잡하고 초라한 현실로부터 우리는 하루속히 탈피하여 동학의 본래정신을 웅혼하게 재건해야 한다. 그 본거지로서 나의 고향 천안이 새롭게 인식되는 이 여정은 역사의 필연이라고 생각한다. 왕건이 고려를 세웠을 때도 이 지역 사람들은 끝까지 저항하였다. 왕건은 목주 5성의 치열한 저항을 평정하고, 우(牛)·마(馬)·돈(豚)·장(獐)·상(象)이라는 비열한 동물 성씨를 내렸다고 한다(후에 牛는 于로, 象은 尙으로, 豚은 頓으로, 獐은 張으로 고쳐졌다). 목주의 이러한 저항정신, 반골기질은 17세의 소녀 유관순의 항거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학이 험난한 민족사의 두세기를 거치면서도 그 온전한 모습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고, 또 세계가 주목하는 K-문화의 원천임을 과시하고 있는 그 비결을 우리는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回馬入鄕亦然天
熊神山方伏龜安
並川竹溪傳肉聲
木州同胞寬順丹
말머리를 돌려 고향에 돌아와보니
하늘은 역시 그 하늘이노라
거무신(黑城山)과 산방천이
엎드린 거북이와 더불어(복구정을 암시) 평안하고
아우내의 죽계리는 수운의 육성을 전한다
목주의 굽힐 줄 모르는 동포들은 마음이 넓고 순하지만
유관순 열사처럼 그 절개가 단심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