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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기택 金基澤
1957년 경기 안양 출생. 198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태아의 잠』 『바늘구멍 속의 폭풍』 『사무원』 『소』 『껌』 『갈라진다 갈라진다』가 있음. samoowon@hanmail.net
은행들
발 디딜 틈이 없다
길바닥은 바글바글하고 발바닥은 물컹물컹하다
달리는 바퀴에 터지고 뭉개져 도로가 끈적끈적해지지만
지나가는 발에 밟혀 보도블록이 지저분해지지만
가지에만 매달려 있을 수 없어
다 익은 은행들은 막무가내로 떨어진다
행인들 눈치도 보지 않고 마구 구린내를 풍긴다
사내 하나가 똥 밟은 표정으로
풀밭에 구두 바닥을 맹렬하게 문대고 있다
비가 오고 은행과 낙엽이 썩어 문드러져도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은 도저히 비옥해지지 않는다
아무도 따지 않는데 줍지 않는데
무작정 다닥다닥 열리기만 해서 은행은 귀찮아진다
바람 불 때마다 떨어져서 낙엽은 귀찮아진다
시원한 파도 소리를 내며 출렁거리지만
아무도 쳐다보지 않아서 나무들은 쓸데없이 푸르다
양산을 쓰고 썬크림을 발라도
얼굴이 타서 피부가 거칠어져서 햇빛은 골칫거리가 된다
쓸어 한곳에 모아놓은 쓰레기를 흩트려버려서
잘 빗은 머리를 헝클어놔서 바람은 성가시기만 하다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아서
노숙자들은 지하철역에 무료급식소에 모이고
쓰레기는 어두운 곳 눈 잘 띄지 않는 곳마다 쌓이고
은행들은 자꾸 떨어지고 걸음은 귀찮아진다
늙은 나무
단단한 것들이 구불거린다
딱딱하게 굳어졌는데도 구불거린다
굳어진 후에도 흐르는 수액을 멈출 수 없어 구불거린다
딱딱하게 마른 수액이 뒤틀리고 휘어진다
울퉁불퉁한 껍질 안에서 얼음 터지는 소리 들린다
갑각을 팽창시키는 소리 들린다
어린잎이 뚫고 지나갔던 구멍이 근질거린다
파문을 일으키며 목피를 밀어내던 나이테가 출렁거린다
혹한과 땡볕이 번갈아 용접했던 관절 속에서 어린 관절이 꿈틀거린다
좀더 휘어지면 꺾일 것 같은데도 구불거린다
연한 것들이 삭아서 떨어지고 날리는데도 구불거린다
찢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끝내 찢어지면서도 구불거린다
구불거림이 멈추었는데도 구불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