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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고형렬 高炯烈
1954년 강원 속초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대청봉 수박밭』 『밤 미시령』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등이 있음. snowind123@daum.net
도망가는 말들에게 부탁
도망가는 말을 붙잡을 수 없다
돌아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약속을 파기하고 의리를 잃고도 살아왔다
모두 돌아간, 몇번째 늦가을일까
사용했던 모든 말을 자신에게 반납한다
계속 침묵한 채 꿀꺽꿀꺽 물을 삼킨다
나의 차례는 몇번째,
죽어서 지울 수 없는 기억은 간직하지 않는다
한번만 아프고 죽어 잠들어라
너희는 그렇게라도 이 시간을 넘어야 한다
주춤주춤, 책임자들은 떠나고 없다
칠흑의 물속에서 시간과 맞바꾼 눈과 날개들
찾아가지도 돌아오지도 못하는 길
못 다한 말들이 능히 삶조차 넘어서리라
멈춘 생조차 죽음을 바꾸지 못하는
이제야 말들이 나에게 오려 하지 않는다
너무 오래되고 음울한 것들은
말조차 말들의 말을 받아주지 않는다
도망간 말들을 뒤쫓아 나도 사라져간다
위조지폐
나에게 위조지폐가 있다
위조지폐가 위조지폐를 내려다보는 나를
쳐다본다 의심한다 불쾌하다
수많은 은행과 시장과 아침을 건너온
펼쳐보아도 펼쳐보아도 누가 만든 것인가
시간의 위증으로 간직한다
우울할 때, 지하도 계단에서 몰래 꺼내본다
아무도 모르게 태양에 비춰보는 얇은 종이유리판
저쪽이 보이다가 사라진다
위조지폐는 자신을 인식하지 않는다
어떤 희망적 예후이며 기이한 상징이며 의미라고
자신을 오해하지 않는다
위조지폐는 위조지폐 자체이기 때문이다
모든 평가와 가치가 무너진 뒤,
이 지폐의 메타포는 불처럼 사라질 것
내 안에 정체불명의 생물체가 움직인다
위조지폐 속에 위조지폐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