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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최문자 崔文子
1943년 서울 출생. 1982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나무고아원』 『그녀는 믿는 버릇이 있다』 『사과 사이사이 새』 『파의 목소리』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등이 있음.
choiikik@hanmail.net
거짓말을 지나며
이번 여름에도 거짓말이 슬쩍슬쩍 나를 지나갔습니다
동방은 어디인가?
추운 동방으로부터 왔다고 들었습니다
곧 허물어질 바람 위에 지어졌습니다
힘이 아니라
점이 아니라
선이 아니라
장미꽃 장면으로
펜스를 넘고
꽃잎을 접고
나에겐
거처가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에게서 동방의 가루약이 밝혀진대도
내 혀끝은 서쪽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주 잠깐 믿었습니다
거짓말은 오렌지색
나직한 뱃고동 소리로 구슬프게 부릅니다
흐린 연필 끝으로
꽃을 그리며
나에겐
망치가 없어요
톱날이 없어요
위험이 없어요라고 말합니다
한여름 밤
여름 마지막 부분에서
뭉게뭉게 지나가는 거짓말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잠에서 깨고
누군가는 서쪽으로 바람을 보냅니다
여름에는 거짓말이
동방으로 난 창문으로 마음 놓고 드나듭니다
‘나’라고 할 것인가?
아주 천천히 손을 씻는다
크고 따뜻했던 손이
때때로 검정색이야
피를 흘리고 가끔 붕대를 감고
봄밤 연인의 손을 잡다가 너무 많이 울어본 손이
여러개로 손을 쪼개고 어느 한 조각에 잠긴다
대낮에는 내 손이 아니다
나를 떠난다
나를 이긴다
풋과일처럼 새파랗고 단호하게 다른 손을 잡는다
눈을 감고 있으면 뻐근했다
하루가 꿈틀거렸다
뭔가를 할퀴고 만지다가 깊은 밤에야 돌아왔다
잔을 돌리며 우리는 아무도 그것을 묻지 않았다
한꺼번에 몇개의 손이 되려 하는 손에게
왜 피가 나느냐고 묻지 않았다
아아, 하얗게 자고 싶어
얼굴 같은 손이 나에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