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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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욱 申骸

1974년 강원 춘천 출생. 199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간결한 배치』 『생물성』 『syzygy』가 있음. williwilson@hanmail.net

 

 

 

유클리드의 방

 

 

평행하는 두개의 직선으로

방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했다, 유레카,

 

유레카,

 

쾌재를 부르고 싶은데

아직은 열고 닫을 문이 없구나, 이 방은

보통이 아니다,

사람이 살면 살기로 채워지고

사람이 죽으면 생기로 숨막히니

이목구비는 떼어서 주머니에 넣고

방독면으로는 데드마스크를 단단히 쓰고

심혈을 기울여

마지막 연구를 하자, 나는,

띠벽지를 방에 둘러 머릿속에 우글거리는 양들을 내몰고,

산소로 오염된 꿈은 요오드액으로 닦아내고,

심호흡을 하고,

메스꺼움을 누르고,

 

*

 

그러나 양의 대열은 엄숙하게 이어진다네,

 

띠벽지를 뜯어먹고 허기를 달래며

양은 양의 양을 낳아 무한 속으로 사라지는데도

한마리의 양만은

찾김을 당하지 않는다네,

 

하나의 제곱은 하나, 거듭거듭 제곱도 하나,

평행하는 두개의 직선에 갇혀

나는 어쩔 줄을 모르는구나,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속에는 창자가 구불거리는구나, 메스껍구나, 이런 미로에서는

어떻게 길을 잃어야 하는가,

 

*

 

자, 자, 집중하자,

 

다음번에는 기필코

 

양의 해에 양자리에서 태어난 양씨 여자가 되어

길을 잃지 않도록 하자,

 

맹장이 흔들리도록 뛰어

문을 찾자, 노크를 하자, 유레카,

유레카,

 

 

 

말단천사

 

 

밑으로 다리가 빠졌다.

 

밑이라.

 

그래. 밑이라. 밑은 내 영역이 아니지. 다리는 빠트리는 게 아니고. 흔들흔들. 흔들흔들. 양말이 벗겨진다. 발바닥이 간지럽다. 눈이라도 감을까.

 

—누구냐. 내려와라 내려와.

 

어쩌지. 애걸을 해야 하나. 고백을 해야 하나. 기도를 해야 하나. 안돼요. 매달리시면 안됩니다. 저는 선천성 고난돌기결핍증을 앓고 있습니다. 마찰력이 형편없는 저의 다리에는 어떤 위대한 신도 달라붙지 못하고 미끄러져 실족하고 맙니다.

 

저 아래

저 아래에 대자로 뻗어버릴

커다란 소문자의

머저리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

 

사실은 울고 싶은 심정이다. 내 다리 내놔. 내 다리 내놔.

 

숨은 짓을 한 게 아닌데도

모든 게 최소한 어렵구나.

머저리가 한둘이 아니로구나.

 

저 아래는

물이 흐르기 때문일까.

 

저 아래라면

나에게도 혈액형이 있었을까.

 

나의 피도 왕년에는 액체였을까.

 

 

--

*고난돌기: 김수영 「애정지둔」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