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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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성 李起聖

1966년 서울 출생. 1998년 『문학과사회』로 등단. 시집 『불쑥 내민 손』 『타일의 모든 것』이 있음. leekisung85@hanmail.net

 

 

 

 

 

당신은 실업자가 되었다. 꿈이 사라지니, 평화롭구나. 당신의 심장을 쿵쿵 두드리던—이런 지루한 비유도 이젠 필요 없겠지만—커다란 손이 사라졌구나. 유리창 안에서 손을 흔드는 얼굴들이 보인다. 실업자가 된 첫날엔 무엇을 하고 싶은가? 두꺼운 커튼을 달고 잠을 자겠지. 당신을 위한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이 없으니. 이젠 당신을 위해 영화를 찍는 거야. 그것은 어떤 계절의 노동과 같을까. 팔과 다리가 없는 포르노의 스타일로 당신의 거룩한 무죄를 축복하면서. 무한히 떨리는 눈꺼풀을 덮고 이제 꿈의 밖으로 걸어 나가는 거야. 누군가 먼지투성이 푸른 관뚜껑을 열고 얼어붙은 당신을 꺼낼 때까지

 

 

 

화분

 

 

계단에 어울린다 그것은 나란히 놓여 있고

1층과 옥상 사이에도 있다 그것은 공평한 그늘처럼

이층 여자가 담배를 피우다 힐끗 문을 닫아버린다

어젯밤 집어 던진 소주병과 자장면 그릇과 퍼런 멍자국

그 옆에 붉은 고무화분엔 채소와 맨드라미와…… 감자를 심을 수는 없겠지 그것은 마구 뻗어가거든 수직으로 뻗어갈 수는 없는 거지만

아침이면 사람들은 저마다 화분을 이고 지고 나간다 저녁엔 무거워진 화분을 질질 끌고 언덕을 올라온다

구불구불 골목에 빈 화분이 입을 벌리고 있다 콘크리트 담장 옆 노파들이 쭈그리고 앉아서 풋고추와 고구마줄기를 다듬는다 화분에는 노란 과꽃을 심고 나팔꽃을 기르고……

어떤 화분에는 꼬부라진 늙은 웃음이 매달려 있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려다 만다

옥상의 작은 창에 턱을 괴고 너는 화분의 너머를 바라본다 강이 흘러간다고 중얼거리며

본 적은 없으나 어딘가에서 그 강은 흐르고 있을 것이다

화분에는 검은 가지와 꽃과 가지와 꽃의 사이가 있구나

어느 날에 너와 나는 손을 잡고 걸어갈까 비탈진 골목을 지나 만수약국을 지나 또또분식과 정류장의 낡은 구둣방을 지나 더 멀리,

너의 장례식장엔 화분을 가지고 갈 것이다

검정 구두 옆에 흰 화분을 놓을 것이다 나프탈렌 냄새가 밴 검은 양복을 꺼내 입고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딸꾹질을 참으면서 국밥을 먹을 것이다

화분이 사라지는 건 시간문제다

담장 아래 숨어 침을 뱉고 담배를 피우는 아이들 새끼 밴 얼룩고양이가 부러진 발톱을 맹렬하게 핥는다

갈라진 시멘트 사이로 이층 여자의 비명이 폭우처럼 쏟아지고

이윽고 깨진 화분처럼 고요해진다

어느 황홀한 계절에

우리는 화분 속에 들어가서 누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