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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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李文宰

1959년 경기 김포 출생. 1982년 『시운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 『산책시편』 『제국호텔』 『지금 여기가 맨 앞』 등이 있음.

 

 

 

얼굴

아주 낯익은 낯선 이야기

 

 

내 얼굴은 나를 향하지 못한다

내 눈은 내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 손은 내 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얼굴은 남의 것이다

손은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기 위한 것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기 위한 것이다

 

입과 코가 그렇고

두 귀는 물론 두 발도 그러하다

안 못지않게 바깥이 중요하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이

가장 소중한 사람이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 앞에 있는

나 또한 가장 귀중한 사람이다

 

큰 스님이 한 소년에게 들려준

조금 낯설지만

알고 보면 아주 낯익은 이야기다

 

 

 

아버지

 

 

할아버지는 낙타를 타고 아버지는 자동차를 탔다

아들은 지금 비행기를 탄다 하지만 손자는 다시 낙타를 탈 것이다

석유가 많이 나는 먼 사막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다 만들어서 썼지만 아들인 나는 다 사다 쓴다

내 아들은 내가 번 돈으로 다 사서 쓰다 말고 다 갖다버린다

내 아들의 아들은 다시 다 만들어서 써야 할 것이다

지금 여기 우리 이야기다

 

모래언덕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

중동에서 석유를 파내는 것과 황해 바다를 메우는 것이 다르지 않다

덕분에 사막의 아들딸은 비행기를 타고 우리의 아들딸도 차를 몰지만

 

비행기를 타고 자동차를 모는 아들딸의 잘못이 아니다

전적으로 아버지의 잘못이다 아시아 아메리카 유럽 오스트레일리아

모든 아버지가 아들딸의 미래를 끊임없이 훔쳐온 것이다

청년의 미래를 보란 듯이 줄기차게 착복해온 것이다

 

젊은이의 미래가 그래서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청소년이 방 안에 틀어박히고 젊은이가 연애도 못한다

다름 아닌 아버지에게 미래를 빼앗긴 다 자란 아들딸들이

지구 표면 곳곳에서 망연자실해하고 있다

 

가족이 탄생하고 도시가 번창한 이래

아버지가 이런 방식으로 자기 자식을 착취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가 가진 것은 죄다 불법이다 죄다 장물이다

아버지가 가진 것이 많을수록 죄의 목록이 길어지고

아버지가 누리는 것이 많을수록 형량이 높아진다

 

미래를 미래에게 돌려줘야 한다

아버지가 미래를 돌려줘야 아들딸이 지금과 다른 미래를 꿈꾼다

지금과 다른 미래를 준비해야 아들딸과 아들딸의 아들딸이

다시 다 만들어 쓰고 다 키워 먹어야 하는 지금과 전혀 다른 세상에서

서로 떳떳하고 스스로 아름다울 것이다

그때쯤이면 그 누구도 함부로 미래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