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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하종오 河鍾五
1954년 경북 의성 출생. 1975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 시집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남북주민보고서』 『세계의 시간』 『신강화학파』 『초저녁』 등이 있음. hajongoh@hanmail.net
도라지꽃
여기에서 밭에 활짝 핀 도라지꽃을 보면
저기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나는 상상하게 된다
여자가 고운 얼굴로 소리치고 있을 것이다
그 소리가 보랏빛으로 보이기 시작할 땐
여자가 누군가를 간절히 부르고 있으려니 싶어
대답해야 할 기분이 들고
그 소리가 흰빛으로 보이기 시작할 땐
여자가 누군가를 막무가내 쫓아내고 있으려니 싶어
말려야 할 기분이 든다
저기에서 밭에 활짝 핀 도라지꽃을 보면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태를
여자가 상상하게 되리라
나는 어리벙벙한 얼굴로 가만있을 것이다
보랏빛으로 전해지는 깊은 침묵을 본 여자가
나의 속내를 궁금해할 때
나는 입을 다물고 있을 테고
흰빛으로 펼쳐지는 가없는 고요를 본 여자가
나의 본색을 확인하고 싶어할 때
나는 사지를 움직이지 않고 있을 테다
상상하지 않고 누구든 밭고랑을 걸으면
꽃들이 파르르 시들고 말 것으로 보이는 도라지밭
밥을 하는 저녁
먹기 위해 밥을 하는 저녁과
먹이기 위해 밥을 하는 저녁이
사뭇 다르다
어스름이 몰려오는 방향도
지하수가 펌프로 올라오는 속도도
쌀이 솥에서 붇는 부피도
내가 먹기 위해 밥을 할 땐
날마다 제각각이고
아내를 먹이기 위해 밥을 할 땐
날마다 같다
밥을 해서 내가 먹는 저녁과
밥을 해서 아내를 먹이는 저녁을
어스름과 지하수와 쌀이 구분할 줄 알까
아내가 넘어져 왼손을 깁스한 요 며칠,
저녁식사를 끝낸 뒤에도
나는 분노와 불만과 과식을 참지 못하는데
아내는 평온과 만족과 허기를 헤아린다
무수한 밥을 아내한테 얻어먹은 내가
직접 밥을 하는 오늘 저녁엔
어스름이 방향도 없이 가라앉고
지하수가 펌프로 느린 속도로 올라오고
쌀은 솥에서 좀체 부피를 불리지 못하는 것 같다
금욕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다저녁때,
달가닥, 아내가 성한 오른손으로
수저를 식탁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