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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곽효환 郭孝桓
1967년 전주 출생. 2002년 『시평』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인디오 여인』 『지도에 없는 집』 『슬픔의 뼈대』가 있음. kwakhwan@hanmail.net
꽃잎 속에 이우는 시절들
아직 새순 오르지 않은 나무를 보러 갔더니
잘 매만진 생태천에 봄꽃 가득하다
물길을 따라 난 꽃나무길
바람 일 때마다 꽃잎 분분하다
비스듬히 기운 봄볕
떨어지는 꽃잎 속에 이우는 시절들
하나
한 세계가 설핏 열렸다 닫힌다
천변 너머 옹기종기 빈루한 작은 마을
둑길에 잠시 세워둔 손수레, 털털대며 달리는 삼륜트럭
둘
한 계절이 차고 또 기운다
가지 많은 정자나무, 차례로 피었다 지는
개나리 진달래 산수유 벚나무 목련 그리고 살구꽃
셋
한 시절이 왔다 간다
나지막한 흙담집과 시멘트 벽돌로 지은 개량한옥 몇채
동구 슬라브 지붕 아래 나란한 싸전과 구멍가게와 대폿집
넷
화창했던 하루가 뉘엿뉘엿 저문다
단출한 자전거포, 조금 떨어진 오래된 예배당
아버지의 긴 그림자 어른어른 지난다
다섯
바람 분다 배꽃내음 아슴하다
과수원집 단발머리 계집아이 숙이 그리고
적송 울창한 천변(川邊)의 아이들
마당을 건너다
그 여름밤도 남자 어른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여인들이 지키는 남쪽 지방도시 변두리 개량한옥
어둠을 밀고 온 저녁바람이 선선히 들고 나면
외등 밝힌 널찍한 마당 한편에 모깃불을 피워놓고
저녁상을 물린 할머니를 따라
평상에 자리 잡은 누이와 나 그리고
막둥아! 하면 한사코 고개를 가로젓던 코흘리개 동생은
옥수수와 감자 혹은 수박을 베어 물고
입가에 흐르는 단물을 연신 팔뚝으로 훔쳐냈다
안개 같은 어둠이 짙어질수록 할머니는
그날도 마작판에 갔는지 작은댁에 갔는지 모를
조부를 기다리며 파란대문을 기웃거렸고
부엌과 평상을 오가는 어머니는 좀처럼 말이 없었다
어둠이 더 깊어지면 할머니는 두런두런
일 찾아 항구도시로 간 아버지 얘기를 했고
마당을 서성이던 어머니는 더 과묵해졌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달과 별과 호랑이, 고래와 바다를 두서없이 얘기하다
스러지듯 평상 위에 잠든 아이들을
할머니와 어머니는 하나씩 들쳐 업고
별빛 가득한 마당을 건너 그늘 깊은 방에 들었다
그런 밤이면 변소 옆 장독대 항아리 고인 물에
기다림에 지친 별똥별 하나 떨어져 웅숭깊게 자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