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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성규 金聖珪
1977년 충북 옥천 출생. 200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너는 잘못 날아왔다』 『천국은 언제쯤 망가진 자들을 수거해가나』가 있음. lamp2630@hanmail.net
나를 찾지 말아다오
창밖 나뭇가지는 주정뱅이처럼 손을 떤다
술 때문에 언젠가 나는 죽으리라
눈을 뜨니 방바닥에 내가 누워 있다 물을 찾아도 없고
수도꼭지에 입을 대고 먹는다
줄줄 얼굴에 물을 흘리며 운다 벌거벗은 채로
물을 먹으며 싱크대에 넘어진 술병을 본다
며칠을 잤나 마셨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술을 사러 나가던 일
비틀거리며 벽을 짚는다 머리에 물을 뒤집어쓴다
흘러내린 물이 장판에 닿고
돈이 없어 동전까지 털어간 일, 운다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고시원으로 들어가던 날들
무엇을 위해, 운다, 폭설이 내린 날
월세를 떼먹고 도망치던 자취집, 애인과 뒹굴던 날
지하 전셋집으로 이사 오던 날, 술 취해
얻어맞던 날, 등단하던 날, 첫 시집 내고 파주에서
책을 받아오던 날 물을 줄줄 흘리듯 흘러
태어나고 자라고 생일날 자취방에서 어머니에게 전화하던 날
시 쓰겠다고 흘린 날짜들
돌아갈 집이 없다는 것은 행복한가
술에 빠져 탕진하던 세월 책 속엔
수많은 길이 있고 내가 걸어간 길은 늪지로 가는 길
집으로 가지 않기 위해 겉돌았던 수많은 골목
싱크대로 흘러내리는 물을 뒤집어쓰며 이제 너희는
나를 찾지 말아다오 어디로도 갈 수 없어
누워 아무도 나를 들여다볼 수 없는 유리창
유리창 밖에서 주정뱅이처럼 떠는 나무들,
흘린 날들을 주워담을 수 없는 것을 알고
누워, 나무들에 인사한다 최선을 다해
이 옷은 누구의 것이오
이 옷 좀 빨아주세요, 아무리 빨아도
냄새가 가시지 않습니다 꿈을 꾸며 중얼거리다 깨어난다
방바닥에 널린 술잔, 약봉지, 밥그릇, 머리카락
집으로 돌아와 또 술을 마시며 내가 밤새 써놓은 공책에는
가지지 못했으므로 그는 선하고
소수자이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외치는 자들……
술이 덜 깬 채로 라면을 사러 걸어간다
죽은 자가 눈을 뜨듯
구름의 찢어진 눈꺼풀 사이로 쏟아지는 빛
미천하게 살아, 기어다니므로
만질 수 없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내가 생각해도 기특한 생각을 하다니
취해서도 죽음과 생명을 분쇄하여 시를 쓰려는
나의 노력은 가상하다 불탄 산에서 바위가 검게 그을리고
초라한 자기 행색을 드러내듯
방바닥에 주저앉아 라면 국물을 마신다
거지가 되어 시 쓰는 자 그야말로 얼마나 용감하며 정직한 자인가
약자를 응원하며 자신을 의심하지 않으므로
남의 살을 뜯어먹으며 정신없이 허기를 채우면서도
저는 남의 살을 먹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하고 싶어
그동안 식구들의 눈총을 참으며 견뎌왔으나
나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숙취도 견디지 못하므로
정신과는 아무 상관없이 참을성이 없으므로
거지가 될 수 없다는 자명한 사실
술자리에서 만났던 선배는 지옥의 심판대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너는 더럽게 타협하고 항상 세상을 살아가지
술을 마시며 그가 이야기한 마이너에 대한 옹호는
중앙을 꿈꾸는 자들이 특히 자주 말하는 방식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으나
비겁하게도 애써 웃음을 지으려 노력하는 자
그게 도망치는 걸 좋아하는 나의 한계이지만
다만 그는 언제나 정의의 편이므로
자기 안에 생명을 가득 채우려 하므로
그는 죽음을 몰아내므로 자신을 완성할 수 없나니
나는 쭈그러져 집에서 술 마시며 화풀이 낙서나 하는 것이다
밤새 꾸었던 꿈에서 심판관이 물었던 것 같다
이렇게 더럽혀진 옷은 누구의 것이오
꿈결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던가
평생 망상만 거듭해온 인간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