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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민하 李旻河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이 있음. poemian25@hanmail.net
유리 만담
큰소리 내면서 깨지는 건 싫습니다
그러나 큰소리 낼 이유가 없다면 깨질 이유도 없다는 이웃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이웃은 오래 살았으니까
이웃에 귀 기울이면 깨질 일이 없고
그들 중 하나와 웨딩홀에 입장한다면
우리의 삶이란 고양이 발뒤꿈치를 닮아갈까요
그러나 한방을 쓴다면 이웃의 기억은 사라지고
한 몸이 되어 떠다니는 삶이란
제가 찜했다니까요
거리를 돌며 빈 상자 같은 집을 얻고
식탁 유리와 책상 유리를 겹쳐 실었습니다
같은 마음으로 트럭에 누워 뚫린 하늘을 보았습니다
조심히 다루세요
그러나 유리 사이엔 빠진 것이 있고
덜컹덜컹 흔들리는 우리 사이엔 무얼 끼워야 하는 걸까요
가령 뽁뽁이 같은 아기 엉덩이랄지 한장의 추억을 향해
뒤로 걷다가 다시는 넘지 못할 금이 생기고
그렇게 금이 가는 것이고
깨졌다고 빛을 잃는 건 아닐 텐데
그러나 홀로 우아하게 바닥에서 뒹구는 고독을 빛나는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광이 나는 삶이란 도자기처럼 모셔두고서
옆집 남자가 반짝반짝 구두를 닦을 때 옆집 여자는 돌아서서 그릇을 닦습니다
여자는 이불도 햇빛에 널어야 하고 퇴근 후엔 시장도 가야 합니다
구석구석 청소를 하다가 깨진 도자기를 뒤집어쓰고서
병원에 누워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런 고독이란
피가 난다면 사람들은 달려옵니다
모아둔 경험과 아껴둔 연민과 샘솟는 핏방울을 보태줍니다
피에 피를 부어서 막힌 이웃을 뚫고
그러나 고독은 피를 흘리지 않고
옆집이 빈 후에 불이 난 것처럼 모두 흩어졌습니다
건물주가 리모델링을 선언하더니 두달 만에 동굴처럼 텅 비어서
나는 혼자 곰처럼 백일을 버텼습니다
자세를 허물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입술에서 피가 나는데
지하에서 내장처럼 이삿짐이 빠져나와도 아무도 모릅니다
건물이 쏟아질 때 튀어나온 나는 파편과 같고
깨져도 찌르는 건 싫습니다
낯선 골목에 숨어들어도 불안은 발자국처럼 미행을 하는데
그러나 찌를 이유가 없다면 찔릴 이유도 없다는 이웃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이웃은 힘이 세니까
이웃을 따라다니면 얻어맞을 일이 없고
밤마다 혼자 어슬렁거리는 걸 보았어요
그런 말이 는다면 집을 다시 옮겨야 하고
우리의 삶이란 고양이 꼬리를 닮아갈까요
고양이 눈빛이 하나둘 가로등처럼 꺼지는 그런 어둠이란
그런 어둠의 관 속에 다리를 뻗는 잠이란
이웃과 이웃 사이에 깨질 듯 끼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문의 개수는 이웃의 개수보다 많고
옷을 벗어야 하는데
누군가 돌을 던질까봐 창문을 닫을 수 없습니다
어제 깨진 사람들이 공중에 박혔는데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연인들은 끝이 없을 듯 노래 부르고
그러나 깨지고 나면 별 볼 일 없다는 이웃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종말이 오기 전에
이웃은 사과나무를 옮겨 심으니까
이웃에 매달리면 굶주릴 일은 없을 텐데
공사장에는 층층이 별 볼 일 없는 고독이 아찔하게 쌓여갑니다
어둠의 끝까지 쌓이면 우리는 밤하늘이 됩니까
가정 방문
그녀는 갑자기 구석에서 상자를 벌리더니 손을 넣었다. 주렁주렁 감자알들이 손끝에 달려 나왔다. 주방에서 열기가 퍼지자 세 사람이 더 모였다. 모락모락 찐 감자가 나오는 동안 둥글둥글 살이 찐 얼굴들이 둘러앉았다. 뺨이 살짝 달아올랐다. 낡고 흔한 종지가 하나씩 주어졌다. 종지에 담긴 건 살살 녹았지만 달지 않았다. 설탕 없어요? 우리 집에선 설탕이 법이다. 만병통치약으로도 쓰인다. 첫째 고양이 이름도 설탕우주다. 이거 한번 찍어봐요. 맛이 훨씬 좋아요.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을 수 있다니! 굳은살이 되는 나이에 맛보는 첫 경험이라니! 따지고 보면 낯선 집을 방문한 것도 처음이었다. 문만 열어도 첫 경험이야 날마다 설탕 알갱이만큼 넘칠 텐데. 감자 껍질을 벗기는데 뽀얀 속살이 벗겨졌다. 둘째 고양이 이름은 소금밀루라는 것이 문득 떠올랐다. 나는 밀루라고만 불렀다. 버릇처럼 까먹는 일이야 집마다 소금 알갱이만큼 넘칠 텐데.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는데 혀끝이 짠했다. 여자1은 가방만 뒤지다가 휴대폰을 찾으러 다시 갔고 여자2는 가스불을 안 끈 것 같다며 뛰어나갔다. 택배 오는 걸 깜박했다는 여자3은 시스루 속옷을 샀다면서 쇼호스트처럼 정신을 빼놓더니 사라졌다. 내일이면 흘리고 간 부끄러움이 생각날까. 아니면 자랑하지 못한 속옷 몇벌이 더 생각날까. 어쩌면 집도 까먹고 세상 끝까지 가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들 이름을 금세 잊었고 우리는 종이를 펼친 목적을 잊고 가가호호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