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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조용미 曺容美
1962년 경북 고령 출생. 1990년 『한길문학』으로 등단. 시집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일만 마리 물고기가 山을 날아오르다』 『삼베옷을 입은 자화상』 『나의 별서에 핀 앵두나무는』 『기억의 행성』이 있음. treepoem@hanmail.net
무한의 테라스
나를 감싸고 있는 이 흰 것은 독화살 같기도 하다 나는 독화살을 맞고도 빼내지 않고 가만히 있는 사람처럼 이 희뿌연 것의 성분과 냄새를 궁금해한다 이 구역을 벗어나기만 하면 눈앞의 어둠도 밝아질 것인가
광선이 몸을 통과하는 것처럼 안개는 나를 점령하고 있다 나는 안개가 공중에 나를 띄워놓도록 기꺼이 허락한다 까마득한 아래 있다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 이곳을 무한의 테라스라 이름 붙인 이는 누구인가 희뿌연 기운이 모이는 곳에 환이 생겨나고 흩어지는 곳에 환이 사라진다고
나는 저 너머의 태허(太虛)를 보려 한 적 있었던가 습기가 많고 손에 잡히지 않는 이 흰 것은 자꾸 흩어지고 모이는 것이기에, 텅 빈 크나큰 고요 태허는 나의 기운이기도 하기에 발걸음은 자꾸 저 움직이는 차가운 것 속으로 홀린 듯 빨려들어가고 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이 축축한 공기 속에서 나는 오로지 나의 슬픔에만 몰두하기로 했다 그러자 천천히 고요가 찾아들었다 어른거리는 이 아픈 것을 우리는 그저 안개라 부르기로 하였으니, 희뿌옇게 모이고 흩어지는 이것에 질서와 형상을 부여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무한의 테라스에서 나는 무한을 보지 못하고 내 앞의 어둠만 본다 안개에 함부로 마음을 기댄 탓이다 무한은 어느 쪽으로 향하는 것일까 비와 바람이 멈추고 희뿌연 것들이 사라지면 공중정원의 무한도 함께 함께 사라지는 것을
평행
상한 냄새가 훅 끼쳤다
이 세계의 허물어진 빈 틈으로
목련 상한 잎들이 빨려들어간다
나무 위에서 서서히 곪아가는
길고 흰 손목들
기다림 때문에 이를 꽉 무는 습관이 생겨났다
썩어가는 목련이 대신 견뎌주는
생의 기나긴 순간들
꽃들이 피어나는 어둠과 바람 속에서
우리는 물고기처럼 헤엄쳐 다닌다
울지 않았던 울음이, 사라지지 못하고
몸의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조금씩
끓어오르고 있다
물의 입구에서 우리는 눈을 떴다
하얀 치어들이 창밖을 헤엄쳐 지나간다
아름다움이 확장될수록 슬픔이 깊어진다
낯선 도시의 국도변, 운전석에 끼어
한방울씩 떨어지는 피를
묵묵히 바라보며
멈추어 있는 밤의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