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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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 24인 신작시선
  

고형렬 高炯烈

1954년 강원 속초 출생. 1979년 『현대문학』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대청봉 수박밭』 『밤 미시령』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등이 있음. snowind123@hanmail.net

 

 

 

서울 사는 K 시인에게

 

 

K형이라고 부르고 싶군요 이해해주십시오

오늘 아침도 잘 기침(起寢)하셨습니까

이 미래에도 그 정류장에 벌써 내리시고 있군요

그 거리 삭풍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지요

빌딩 옥상과 유리창이 뿌려대는 그 눈보라겠지요

나는 아니지만 당신은 그 나라의 시민입니다

젊었을 땐 사거리 지하에서

한권의 차가운 책을 들고 영혼을 흔들며 웃었죠

언젠간 서울바닥을 떠나리라

그러나 K형,

진눈깨비 없는 세상과 겨울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이 부정되는 것도 아닙니다

모든 희망이 또 희망이 아니었습니다

찢어진 형의 구두는 오늘도 거리를 관통하고 있겠죠

K형, 결국 우린 서로 행불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괘념치 맙시다 그냥 해본 말일 뿐입니다

모든 생이 동등해야 하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이 말이 좀 슬프긴 합니다

나는 K형이 매일 출근하던 그 도시의 수직과 불안이

싫었습니다 이 아픔은 치유되지 않을 겁니다

세월이 흐르고 보니 알겠습니다

새벽에 눈떠, 진눈 쳐대는 지방 산골 창 밑에서

질척이는 거리로 뛰쳐나온 K형을 생각하고 있지요

뼈처럼 떨고 있는 흰 나뭇가지들

정말 무서운 나라입니다 이길 수 없을 것 같아요

파도치는 한낮의 속초 방파제, 섬, 갈매기도 그렇고

모든 것이 낯설어,

그냥 한통 써보는 시답잖은 편지올시다

참 이상한 일이지 지금도 캄캄하고 추운 겨울이라니

신혼과 함께 이 미래로 떠나왔지만

우리는 대체 뭘 걱정하고 뭘 기다리고 있는 걸까요

형이 계신 도시도 어두워지고 있지요

제가 사는 이 작은 시골도 어두워지고 있습니다

K형, 아무쪼록 조심해서 귀가하시기 바랍니다

아 내 정신 좀 봐, 오늘을

대충 20161월말쯤이라 해둡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