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시
최금진 崔金眞
1970년 충북 제천 출생. 2001년 창비신인시인상으로 등단. 시집 『새들의 역사』 『황금을 찾아서』 『사랑도 없이 개미귀신』 등이 있음. simasian@daum.net
석류
고립을 피하자고 한 짓이 더 큰 고립을 만들어낸 다음에도
고작 내가 생각해낸 방안은 방범창을 단단히 잠그는 것
늙은 석류나무가 수류탄 같은 열매를 달고 있고
목을 맨 듯 잎들은 공중에서 말라가고
하다가 안되면 고립을 택하는 것밖에는 할 게 없는 사람들은
시뻘게진 얼굴로 분노의 수위를 간신히 조절하고 있다
고립은 저희들끼리 엉키고 풀고 하면서 다시 고립을 낳는다
손도 발도 없는 고립의 새끼가 단단한 씨앗으로 여물 때
고 작은 입으로 하품을 거품처럼 터뜨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지
203호 아가씨는 핏덩이를 떼내고 욕실 수챗구멍 속으로 흘러갔다
좀더 유쾌했더라면 좋았을까
좀더 똑똑했더라면, 좀더 돈이 많았더라면
좀더 사회성이 좋았더라면, 좀더, 좀더
냉동만두를 냄비에 넣고 끓였는데 얼음이 씹힌다
얼음도 면도칼을 숨기고 있다
추모비처럼 꽂혀 있는 밥숟가락
추모비처럼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송전탑
고개를 돌릴 때마다 자꾸 바퀴벌레가 보이는 증상을 뭐라더라
비문증? 붉은 통꽃이 통째로 공중에서 끝없이 내려온다
배수구에 잔뜩 달라붙은 머리카락들이 덜덜 떨면서 울고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걸 저 석류나무도 잘 알고 있는 듯
여름 장마에 무거운 가지 한쪽을 찢어버렸다
석류나무 아래엔 일회용 쓰레기처럼 고립이 넘친다
그걸 석류나무의 선택이라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립은 아무도 간절히 원한 것이 아니다
방구석에 누워 온몸에 꽃이 피고 열매가 달린다 한들
혹여 당신이 분노에 휩싸여 생활 속으로 다시 복귀한다고 한들
뭐가 다를 것인가
모두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지나다니는 원룸 복도에서
출구 없는 이 세계의 불 꺼진 통로에서
늙은 석류나무 한그루가 혈흔을 지우며 서 있는 이 고립무원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