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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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언 宋昇彦

1986년 강원 원주 출생. 2011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철과 오크』가 있음. rowanberry.nil@gmail.com

 

 

 

유리세계

 

 

누군가 유리의 숲이라고 명명한 곳에는 무엇이 있지요? 유리가 있습니다. 숲은 없고 유리가 있습니다. 유리의 숲에 숲은 없고 유리가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진실 속에는 무엇이 있지요? 유리가 있습니다. 진실 속에도 유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누군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진실은 깨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유리의 숲이라고 명명한 곳에는 그것들이 있습니다. 있는 것들이 모여 없는 것들이 되는 사이를 잘 살펴주십시오. 누군가 검은 눈동자로 잘 살펴보면 그 존재의 간격이 바로 광선들의 통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깨진 유리를 유리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깨진 진실을 진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진실은 깨진 유리이고 광선은 깨진 유리를 관통합니다. 없는 것들의 존재 가능성이야말로 광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광선을 통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비전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 유리의 숲이라고 명명한 곳으로 삼릉경을 들고 걸어옵니다. 그 굴곡을 투과한 광선이 보여주는 풍경은 유리 도시입니다. 산산조각 난 도시를 비추는 빛보라의 냉정함을 진실의 폭로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들어주십시오. 광선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입니다. 광선은 우리의 어깨를 비추고, 치아를 드러내고, 병든 민낯을 밝힙니다. 우리는 매분 매초 빛의 각도가 달라지는 순간마다 새롭게 죽어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느낌이란 깨달음이며 깨달음이란 죽음에 한뼘쯤 더 가까워지는 일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삶의 진실일까요? 누군가 죽음을 경험한다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어진 것이라서 그것은 경험될 수 없고 불완전하게, 미지의 예감으로만 쏟아질 뿐입니다.

 

느낌 앞에서 우리는 좌절합니다. 동시에

느낌 앞에서 우리는 새로워집니다.

죽음이 우리를 외롭게 하고

죽음이 우리를 강하게 합니다.

깨어진 유리 조각들처럼 연대하십시오.

 

누군가 유리의 숲이라고 명명한 곳에는 고발의 흔적들로 눈부십니다. 눈을 뜰 수 없겠지만, 부디 눈을 떠주십시오. 눈멀 것 같겠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숲이 아닌 깨어진 유리 조각들뿐이겠지만. 부디 눈 떠주십시오. 깨어진 세상에 진실이 하나 있다면 깨어진 진실이라도 반드시 무언가를 비춘다는 것입니다. 생존하고 있는 우리 속에 광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전 속에서 당신이 본 것들을 믿지 마십시오. 숲의 여기저기에서 맥락 없이 출몰하는 개들이 바로 당신의 거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