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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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아 柳賢兒

시집 『아무나 회사원, 그밖에 여러분』 『주눅이 사라지는 방법』 등이 있음.

decs45@hanmail.net

 

 

 

숨소리를 따라가던

질문들

 

 

안양천을 걸었고 보름달이 떴고 나는 좀 슬펐다

우리의 노동은 소중하지 않았다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투명한 햇빛에 반사되어 타들어갔던

검은 슬픔들이 어디에선가 우르르 모여들었다

이 모든 게 결국은 햇빛 때문이라고

모두가 동의했다

 

우리의 범죄는 완벽해야 해 그러려면 뛰어야 해 그러면 소리가 들려

 

살아 있는 몸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떠나는 감각이 청각이라던데

 

듣는 사람이 사라진 사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의 분노는 정당하다고 소리쳤지만 듣지는 못했다

 

아주 긴 밤이었다

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의 말을 뿌리쳤다

도망가는 숨소리를 따라가던 마지막 뒷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끝난 것이 아니라 암전이었다

 

 

 

식상

 

 

출근하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출근하고 있다

 

오래전 이곳엔 숨어 있을 곳이 많았다

다락이 있었다

창고가 있었다

지하가 있었다

골목이 있었다

단골이 있었다

슬픔이 있었다

거룩이 있었다

네가 있었다

 

나의 친구들은

절망하기보다 불타오르기를 선언한다

싸움을 준비하면서도 경쟁적으로 노래한다

귀찮은 존재들이 서로 좋아지기 시작한다

망각이 끝나면 자각이 시작된다는 걸 믿는다

폐허 속에 사는 거나 다름없지만

가본 적 없는 곳을 그리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출근하면서 시를 쓰는 일은

저항을 담보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읊조린다

길었던 여름의 비는 낱말을 뿌리고 거짓말을 몰고 간다

떨어져 있던 ‘숭앙’이라는 단어를 찾고 손뼉을 치며 웃는다

투쟁할 수 없으면 타협하면 된다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나의 출근은 지나치게 긍정적인 우울로 멈칫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