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창작과비평

정기구독 회원 전용 콘텐츠

『창작과비평』을 정기구독하시면 모든 글의 전문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구독 중이신 회원은 로그인 후 이용 가능합니다.

 

 

남길순 南吉順

전남 순천 출생. 2012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 『분홍의 시작』 등이 있음.

40nari@gmail.com

 

 

 

보아뱀과 오후

 

 

보아뱀이 바나나나무를 감고 올라간다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으며

 

엄마와 나는 발가벗고 기다랗게 누워 있다

 

발을 맞대고 한몸이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그렇게 누워

 

내가 한뼘 길어지면

 

엄마는 한뼘 줄어들고 있다

 

새들이 목청껏 지저귀는데

 

바나나나무 아래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차례를 기다리는 보아뱀이 졸고 있다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보아뱀이 거품 속으로 사라지면

 

올려다보던 또 한마리가

 

바나나나무를 타고 올라간다

 

보아뱀은 자꾸 생겨나고 폭포는 계속 떨어지고

 

엄마는 자꾸 줄어들고 있다

 

나는 이제 더이상 자라지 않는다

 

나란히 누워

 

보아뱀과 오후와 티브이만으로

 

아름다운 무지개를 만들 수 있는 세계를 궁리한다

 

 

 

살아남은 여자

 

 

노인의 말 속에 좁은 길이 보인다

 

어둠을 걷고 있는데

가느다란 빛이

보인다

 

백일을 굶었다는데도

흰 쌀이 보인다

 

뚜벅뚜벅 걸어 나간

가족사진 속

이만하면 됐다, 말하는

저 노인이 앉아 있다

 

소금쟁이 같은 손바닥에 꾹 눌러 쥔 것이 있다

 

이 마을 마지막 남은 노구(老嫗)가 자꾸 아름다워져서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다

 

저녁 무렵엔

목소리만 남게 된다

 

그러는 사이 별이 뜨고

하늘 구멍에서

연발 총소리가 반짝거린다

 

죽은 사람은 죽으면 그만이지만,

 

허물 벗은 매미 같은

노인이

조근조근

 

밤을 새워도 모자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