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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김명기 金明氣
1969년 경북 울진 출생. 2005년 『시평』으로 등단. 시집 『북평 장날 만난 체 게바라』 『종점식당』 등이 있음. poet1969@daum.net
청량리
듬성듬성 심은 자작나무 그늘 아래
사내 몇이 잠을 청한다
덜 취한 몇은 남은 술병을 기울이고
아이들은 작은 돌을 던지며 비둘기를 쫓는다
익명의 절망들이 모여 이런 평온한 풍경이 되다니
인도에선 부랑아도 신비롭다던 말을
면전에서 비웃은 적이 있다
그렇게 부러우면 신비롭게 살든가
그땐 알지 못했다
혀끝에 담지 않고 뱉어낸 말에서
모든 비하가 기어 나온다는 것을
부랑아와 당신 그리고
먼 나라의 알 수 없는 신비까지 참 무참했겠다
아무렇게나 누워 잠을 청하는 사내들과
무심히 술병을 기울이는 그들과
비둘기를 향해 날아가는 작은 돌까지
그 부랑의 곁에서 당신도
누군가를 비하했던 순간을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오래 입은 속옷처럼
자취라는 말을 버릴 수 없어
몸이 기억하는 시간 속으로
쓰러지지 않으려 휘청거리며 견디는 생들이
안쓰럽다 못해 신비하다
그날 당신이 성내지 않던 이유를 비로소 알겠다
더는 멀리 갈 수도 없는
이승의 한 귀퉁이를 껴안은 채
간신히 늙어가는 사내가
받던 술잔을 떨어뜨리며 제 그림자 위로 포개진다
몸살 앓는 밤
어지럼과 뒤틀린 속을 달래느라 자다 깨다를 반복한다. 오래 앓던 윗니를 뺐다. 구색을 맞추려면 아랫니를 마저 빼야겠지. 어제는 누군가 왜 선생님의 시는 어둡고 우울하냐고 물었다. 그에게 말했다. 밝고 맑고 화사한 곳을 아세요? 마치 도를 아느냐고 묻는 길거리 사람들처럼 확신에 차서 물었다.
자다 깨서 발을 본다. 몸짓의 최초를 기억하는 원시의 구동축. 이제는 별로 쓸 일이 없다. 오래된 몸피를 껴입고 종일 어둠 속에서 신형 구동축을 돌리며 지낸다. 만지려다 멈췄다. 발이 기억하는 몸짓의 최초처럼 발은 아득한 곳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손이 닿을 수 없는 세상. 손은 어제나 오늘쯤에 머물러야 마땅하다.
사실나는그에게시집말고스포츠신문연예면을읽으세요라고말하고싶었다그게훨씬유용할지도모르겠다시의현혹은아득하고시집은정신건강에해롭다특히밤에읽는시집시는발과같은거라서너무아득하다그래서가끔여러분이거다거짓말인거아시죠라고말하고싶다.
묵주는 라틴어로 로사리오에서 유래한 말이다. 영어로는 로즈다. 성모와 장미와 묵주. 이 명사들은 왜 방을 떠나지 않는가. 나의 묵주는 서랍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 성모는 밀어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물론 스스로 걸어오시는 신통력은 없으시니 돌아오시는 건 늙은 엄마의 몫이다. 그래도 가끔 성모송을 암송한다. 비누로 만든 장미는 항상 제자리에 있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 떠나 있는 건 늘 나뿐이다.
내내 그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자꾸 걸린다. 밝고 맑고 화사한 곳을 아시면 제발 나를 데려다주세요. 스포츠신문 연예면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