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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이민하 李旻河
1967년 전북 전주 출생. 2000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환상수족』 『음악처럼 스캔들처럼』 『모조 숲』 『세상의 모든 비밀』 등이 있음. poemian25@hanmail.net
죄의 맛
오르톨랑은 아주 작은 새입니다. 아주 특별한 요리입니다. 이방의 요리사들은 입을 모읍니다. 프랑스의 영혼을 구현하는 맛이라나? 산 채로 새를 잡아 어둠 속에 가둡니다. 한달 가까이 포도나 무화과 같은 달콤한 과일만 먹입니다. 새는 밤낮을 모르고 먹기만 합니다. 오로지 그러라고 눈알을 뽑기도 하니까요. 배가 터져 죽기 전에 아르마냐크에 절여져 오븐에서 구워집니다.
오르톨랑은 금지된 조류입니다. 금지된 메뉴입니다. 이방의 미식가들은 입을 숨깁니다. 하얀 냅킨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먹습니다. 잔인한 요리를 신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요. 어쩌면 귀한 요리를 신에게 뺏길지도 모르니까요. 통째로 입에 넣어 뼈와 살을 천천히 씹는답니다. 브랜디의 달콤함이 내장에서 터져 나올 때 극에 달합니다. 나는 프랑스 사람이 아닙니다. 더 길게 더 천천히 설명할 수도 있어요. 프랑스 사람처럼.
앞집에 사는 새는 눈이 예쁩니다. 아무도 여자의 이름은 모릅니다. 밤낮을 모르고 창문 속에만 있습니다. 새벽마다 울지만 코 고는 소리에 묻힙니다. 아무도 여자의 목소리는 모릅니다. 햇볕이 좋아요. 나는 몰래 손짓을 하지만 여자는 날지를 못합니다. 예쁜 눈을 뜨지도 못합니다. 방이 꽉 끼도록 살이 쪘습니다. 몸의 둘레가 벽에 가까워집니다. 나는 평범한 이웃입니다. 앞집의 창문을 훔쳐봅니다. 금지된 영역입니다. 누군가 저녁이면 하얀 커튼을 내립니다.
겨울의 숲과 해변에서 버려진 눈알들을 주웠습니다. 밤낮으로 어둠에 불렸습니다. 뚱뚱해진 울음 덩어리들을 음악에 절여 구웠습니다. 오로지 그러려고 눈물을 뽑기도 했으니까요. 까맣게 구워서 동공을 갈아 끼웠습니다. 그 눈으로 낭독을 저질렀습니다. 눈만 뜨면 누군가의 죽은 눈이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시입니다. 금지된 언어입니까. 질문을 하는 손들이 하얀 종이를 뒤집어씁니다. 하얀 종이는 하얀 종이를 자꾸 뒤집어 씁니다.
늙은 사과밭
사과나무가 이렇게 많은데 아름다운 사과 한알 딸 수가 없구나
뜨거운 사과를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면서
허공은 왜 재갈처럼 물고만 있을까
기어 다니는 악몽이 갉아먹어서
벌레 먹은 인연은 옷깃만 스쳐도 깨져버리고
헛손질만 하다가 날이 저물겠지
걱정 말아요 나를 잠깐 내려주세요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난 구석구석 찾을 수 있어요
네가 바닥으로 내려온다면 흰 소는 금방 달아날 텐데
얇고 투명한 맨발은 흙의 장난에도 나뭇잎처럼 찢어질 텐데
아래 가지는 간밤에 멧돼지들이 꺾어버렸단다
파먹다 팽개친 사과들을 밟고 지나갔구나
그럼 나무를 타고 올라가 윗가지를 흔들어줄게요
하지만 나무줄기는 네 허리보다 가늘고
윗가지는 우아한 새들이 차지했는걸 흙 한방울 안 묻히고 평생을 보내겠지
새총은 어때요? 아빠가 물려준 엽총도 있어요 새들을 몰래 쫓을게요
너의 꽃잎 같은 손을 망치게 될 거야
더 많은 걸 다치게 될지도 몰라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얼른 자라서
나무보다 더 높이 자라서 꼭대기에 오를게요
나무가 점점 작아지겠구나 꼭대기에 오르고 나면
사과 따위는 잊어버릴걸 눈곱만큼 작아질 테니까
그럼 소년들을 모을게요 탑처럼 쌓으면 우린 못할 게 없어요
힘이 센 어른이라면 뒷골목에도 많단다 엽총을 휘두르다 숨어버렸지
빨개진 두 손을 술 항아리에 감추고
헛손질만 하다가 날이 저물겠지
걱정 말아요 내가 불러올게요
흰 소와 함께라면 어디든 갈 수 있어요
네가 내려오지 않아도 흰 소는 금방 달아날 텐데
너를 뒷골목에 흘리고 흰 손은 금방 축축한 어둠에 젖을 텐데
거미줄처럼 얽힌 나뭇가지들만 눈빛도 없이 돌아보겠지
언젠가 찢어진 눈보라를 타고 백발의 아이들만 돌아오겠지
몸이 뒤틀린 사과나무 유령들만 남아
핏방울을 쿵 쿵 떨어뜨릴 때마다
주인 없는 발자국들만 밤새 뒤척이는
여긴 누구의 꿈속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