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리뷰
흑사병 의사의 새부리가면
류진 柳眞
시인. 2016년 『21세기문학』으로 등단. kaizelk@gmail.com
나쯔메 소오세끼의 소설이 우리 시대 정전이 된 지는 오래지만 그 사실이 그의 작품이 문학적으로 완전무결하다는 뜻은 아니다. 근래에 읽은 책에서 말하길 그의 작품에는 식민지적 무의식이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고 한다. 런던 유학 생활 동안 받은 영향 때문이란다. 18세기 독일의 작가 클라이스트는 괴테를 비롯한 당대 다른 작가들에게 무시당했다. 작품이 이해할 수 없고 병적이라는 이유였다. 그 때문에 그의 작품은 말 그대로 사장되었다가, 현대에 와서야 포스트모던의 선구로서 조명받아 활발히 연구되었다. 소오세끼의 소설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려는 올가미가 ‘당대’에 영향받은 의식에 대한 혐의 때문에 던져졌다면, 클라이스트의 작품을 수렁에서 건져낸 뜰채는 포스트모던이라는 ‘후대’의 명령을 받아 조립되었다.
문학성이라는 개념은 어느 순간 적당히, 잘, 발명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든다. 문학작품을 자를 재듯이 규격에 맞춰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작품의 가치가 상대성을 따라 자리한다고 말하기도 쉽지 않다. 상대주의 극단에서 서 있자면 늘 무기력함을 느낀다. 우리가 자리한 모든 좌표를 상대성으로 설명한다면 측정 불가한 당신과의 거리감 때문에 나는 제법 외로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학성이라는 절대 척도를 확보하지 못한다 말해야 한다. 독서가 우리 정신을 다른 곳으로 데려다준다 하더라도, 육체는 현재의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잡지 속의 다른 작품들 사이에서 빛나 보였던 소설이 막상 소설집으로 묶이자 시시해 보이거나, 반대로 지면에 발표됐을 땐 무미하게 지나쳤던 작품이 작품집 안에서 성좌의 머리별로서 빛날 때가 있다. 수업시간 졸면서 들은 그리스신화는 명절날 외삼촌네서 방문을 잠근 채 숨어서 탐독한 바로 그 책이었다. 작품의 가치는 시시각각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이를테면 애도의 현장에선 자기 역할을 다한 시를 보통의 지면에서 만나면 낯설게 느껴지기도 한다. 멀리 돌아왔지만 지난호 『창작과비평』(이하 창비)를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다.
내가 문학에 대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비관은 일단 내려두고 창비를 읽었다. 언제부턴가 다시 도드라진 산문성을 시편들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더 부언할 필요도 없이, 몇년 새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마음이, 가라앉았다. 수천수만의 사람이 광장에 몰린 광경은 아비와 규환이 아니었는데 그것을 담아내기엔 지옥이 너무 낡은 형식이기 때문이었다. 침몰 이후 많은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감당해야 했고 무너진 사람들이 무너지지 못한 채 버텨야 했다. 선언은 지연되고 비명은 발사되지 못하고 삼켜졌으니 그러한 머뭇거림이 시에서 산문성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생각일까?
소설들은 소재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면이 도드라져 보였다. ‘사드/샤데이’ 연작(백민석)은 기대대로 읽는 맛이 참 좋았지만 그에 비해 관성에 매여 내용이 전개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기쁨’(한은형)을 역설적으로 알아가는 과정을 따라 읽으며, 서술의 응축된 기운에 감싸여 내내 긴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자와 남자로서 이야기 내내 가라앉아 있다가 광필과 주영으로 떠오르게 하는 고리를 읽어내기가 조금 힘들었다. 좌변기 칸 안에서 안필성씨가 불쑥 나타나는 장면(최민우)이 특히 좋았다. 문제의 장면이 그간의 소설 전개를 뒤집어놓는데 대사 하나하나부터 되짚어 읽게 하는 매력을 느꼈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로운 얼굴을 만날 수 있었음을 빼놓아선 안 된다. 그러나 이를 “예년과 같이 창비를 풍성하게 해주었다” 같은 상투적인 말로 장식하고 싶지 않다. 당선작 모두 기쁘고 미쁘게 읽었지만 이 작품들을 굳이 창비에서 만나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남았다. 지난 십여년을 돌아보면 창비 신인이라는 인물상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고 느낀다. 이는 문학성에 대한 믿음이 무너진 개인적인 이유도 물론 없지 않지만, 비록 과격해 보일지라도 “이 사람의 작품이 창비가 내건 가치에 가장 알맞습니다”라고 소개하는 작품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평론에선 김수영의 시를 중심으로 시-정치 현실에 관한 페미니즘 논의가 이어지고(김영희), 백민석의 『공포의 세기』와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에서 기존의 묵시록적 서사와의 차이를 발견해 노동계급과 무산계급의 불일치함까지 담론을 끌어냈다(강경석). 모두 환영할 일이지만 투정을 부리자면 평론 중 한편쯤은 문턱을 낮추어 독자를 따뜻하게 맞이해주었으면 어떨까 한다. 새삼 이런 아쉬움이 든 건 창비 안과 밖 사이의 온도차를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까닭이다. 이 차이는 오랜 독자와 새로운 독자 간의 시차이기도 할 것이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 평론이 앞장서서 그들을 안내하면 좋겠다.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요즘” 문학을 보여주고, 창비를 소개해야 하나 생각을 하면 그만 아득해진다.
창비가 좀더 나를 좀먹는 이야기로 채워지면 좋겠다. 지난호에 실린 문학 꼭지를 읽으며 이거, 너무 깨끗한 게 아닌가 하고 걱정을 했다. “시대가 시대이니만큼”이라는 까닭만은 아니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그저, 좀더 내 피부와 밀접했으면 싶다. 문학이 현실을 즉자적으로 반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열과 패혈증으로 사람이 마구 죽어가던 시절, 흑사병 의사는 새부리가면 속에 말린 꽃, 허브, 향신료를 비롯해 장뇌, 식초, 쑥 따위를 쑤셔 넣었는데 그런 조치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손에 쥔 기다란 지팡이는 환자를 만지지 않고 진찰하기 위해서였다. 하물며 위생복으로 꽁꽁 싸맨 채 문학을 마주한다면야 그 어리석음을 더 말해 무엇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