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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황유원 黃有源
1982년 울산 출생. 2013년 문학동네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 등이 있음. yuwon626@hanmail.net
소나무야 소나무야
청산도에는 할머니 소나무가 있다
할머니가 사라져 잠들지 못하는 아이에게 할머니가 저 소나무로 변한 거라 말해주자 오늘도 아이는 소나무 아래로 가 울음을 그치고 잠이 들었다
다 지어난 얘기다
옛날부터 바닷가에 살고 싶어했고 지금은 청산도로 와 살고 있는 여자가 지어낸 얘기를 듣고 아아, 하는 사람은
죄다 관광객들뿐이겠지만
그 얘기는 그걸 들은 한 사람을 정말로 놀라게 했고
진짜로 아이들이 소나무 아래로 가 잠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느날 나는
그 여자네 민박집에서 하루를 묵고 온 너에게서 이 이야길 전해듣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돌아와 전화로 이런저런 얘길 들려주던 네가 그날 왜 거기 혼자 갔었는지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찬바람이 밀려오는 창문, 그걸 꼭 닫아준 나는
마침내 아주 커다란 소나무 아래로 가 누울 수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은 아이들이 와 잠들어 있었지만
먼 밤바다가 재워주는 소나무의 잠은 튼튼했고
자다 깬 몇몇 아이들은 소나무 위로 올라가 먼바다를 내려다보며 아주 커다란 이야기를 아주
대담하게 지어내기도 했다 먼바다만큼이나 크고 아주 어두운 이야기를 밤새 지어내도 밤은 도무지
끝날 줄 몰랐고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듯
아이들은 그만 다시 소나무 아래로 내려가 하나둘 잠이 들었다
오지 않는 잠도 억지로 밀어 넣으면 뿌리를 내리는구나,
라고 말하지 말지며
오늘도 술 한잔 없이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
라고 말하지도 말지어다
다들 이 소나무 아래로 와서
소나무야 소나무야, 언제나 푸르구나
하는 힘찬 노래를 들을지어다
그렇게 노래하는 힘찬 잠에
오늘도 뿌리까지 뽑힌 채 쓰러져
곤히 잠들지어다
만져본 빛
서가에 꽂힌 법화경 1권을 꺼내본다
커다란 부피에 비해 너무 가벼워 좀
놀라고
책을 펼치자 보이는 페이지가 너무 하얘 또
놀란다
거기엔 글자가 하나도 없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우둘투둘한 점들만이 튀어나오거나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을 갖다 대고 무턱대고 첫장 첫줄부터
더듬어본다
아무리 더듬어도 알 수 없는 뜻
뜬눈으로 봐서 그렇다
뜬눈으로 봐서 새하얀 백지의 빛
눈을 감자
이번에는 방금 본 흰빛이
나의 내면에 이미 쏟아져 들어와 있는 것이 보였다
한 자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모든 걸 이해받은 느낌
이 빛은 푹신푹신하구나
잠시 물에 빠뜨렸다 건져 올려
흰 바람에 말린 책처럼
벌레 하나 기어가다 책이 덮여도
어디 하나 뭉개지지 않을 것 같아
그 책을 다시 서가에 꽂아둔다
내가 만졌을 뿐인데
나를 만져준 책이
다시 서가에 있다
종이로 되어 있어
만질 수 있는 빛이
3권까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