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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신철규 愼哲圭
1980년 경남 거창 출생.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등이 있음. 12340158@hanmail.net
세화
우리는 끝을 보기 위해 여기에 왔다
흐린 수평선에 걸린 구름이 아랫입술을 깨물고
서서 죽은 물
하얗게 누운 비석
외계에서 온 사람들
우리는 서로에게 비밀이 되어
서로 먼저 등을 돌리라고 재촉한다
뒷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뒷모습을 들키기 싫어서
도대체 어디까지 가야 우리는 난민이 될 수 있을까
마음속에 일어난 난을 피해 우리는 어디로 망명해야 할까
어디까지 망가질지 몰라 두려운 사람들이 선을 긋는다
감은 눈 속에서 다시 한번 눈을 감고
눈 속의 눈을 감고
입 속에 갇힌 수백마리 나비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죽이려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어김없이 폭도가 된다
서로의 얼굴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누워 있는 해골을 보았다
얼굴에서 살이 없어지면
모두 저렇게 표정이 사라질까
텅 빈 웃음만 남기고
서로의 고통스런 표정을 참아낼 만큼 그들은 사랑했던 걸까
한없이 해변을 걷다보면 결국 또 여기로 돌아오겠지
여긴 벗어날 수 없는 한덩어리의 땅이니까
아이들은 모래사장에 나무 막대기로 그림을 그린다
두고 온 집과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윤곽만 남은 얼굴들을
성급하게 식은 용암은 구멍이 많은 돌이 되고
몸보다 앞서간 말들은 툭툭 끊긴다
부러진 늑골 같은 구름들
동굴의 입구에서부터 기어온 매캐하고 검은 연기를 피해 도망쳐 나온 사람들은 해변으로 끌려왔다
그들의 눈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육지일까 바다일까
우리가 볼 수 없는 모든 빛*
우리만 볼 수 있는 어떤 빛
해변과 수평선 사이에 당신을 오래 세워두고 싶다
무지갯빛 슬리퍼 한짝이 파도의 끄트머리에 걸려 밀려왔다 밀려간다
--
* 앤서니 도어의 소설 제목.
귀신놀이
이불을 뒤집어쓰면 나는 귀신이 된다
손을 앞으로 내밀고 더듬거리며 이리저리 헤맨다
이불 너머에서 어른거리는 그림자들
나의 숨소리만 내 귀에 울린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와 웃음소리
너희는 손뼉을 치다가 어느새 숨을 멈춘다
기둥 뒤에 숨거나
문지방에 걸터앉거나
책상 아래에 몸을 말고 입으로 손을 가린다
나의 등 뒤에 붙어 침묵의 손을 흔든다
얼음 속에 갇힌 종
물 위에 뜬 흔들리는 불꽃
침목처럼 단단한 침묵
검은 천을 뒤집어씌운 어항에서도
물고기들은 단 한번의 접촉사고도 일으키지 않는다
꿈속에서 비를 본 적 있니?
꿈속에서 눈을 맞은 적 있어?
이불의 무게에 고개가 아래로 숙여진다
잿빛이 된 입술
머릿속부터 흘러나온 땀에 눈앞이 흐려지고
내 발끝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붉어진 얼굴로
귀신이 될 다음 친구를 지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