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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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솔아 林率兒

1987년 대전 출생. 2013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등이 있음. sol.a.2772@gmail.com

 

 

 

바캉스

 

 

내가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나는 똑똑히 보고 있다 눈동자가 눈빛을 놓아주었으면 해서

 

여름 내내 나는 물속에서 지냈다 물에게 말을 했고 목소리는 공기방울이 되었다 더 가면 안 된다는 목소리와 관두자는 목소리가 똑같이 동그랗고 똑같이 투명했다

 

물은 차차 깊어졌다 목소리는 점점 위로 올라갔다 정적으로 태어나버린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음속이 침묵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 까닭을 상상하면서 별 하나가 성단에서 벗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추처럼 나는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온 힘을 다해 가만히 가만히 있었다 남은 목소리가 몸을 빠져나가버릴 때까지 그래서 목소리가 멀리 가버릴 때까지

 

하얀 모래 위에 누군가 잠들어 있었다 동그란 물방울들이 온몸에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물방울에게 체온을 나눠 주는 사람을 바라보다가 나는 천천히 다가갔다 하얀 타월로 그 사람을 덮어주었다

 

아무도 하지 않은 말을 나는 똑똑히 듣고 있다 동그랗고 검은 눈동자가 내 눈동자를 바라볼 때까지 눈동자가 눈꺼풀을 깨울 때까지

 

 

 

끝없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내 방을

둘러본다

 

남의 조금이 내 컵 바닥에

남의 조금이 내 베개 아래에

남의 조금이 내 방바닥에

 

바닥을 보여줄 필요가 있어요? 바닥을 보아야만 끝을 볼 수 있나요? 끝을 보기 위해 바닥을 보아야만 하나요?

 

진짜인 척 행세하는 사람을 보면

콧방귀가 나오고 그것으로써 나는 진짜인 척 행세할 수 있어요.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방바닥을 닦지도 않고 사용한 컵을 치우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오늘도 잘 끝냈다고 말한다

 

내 티셔츠가 책 아래에

내 양말이 머리맡에

내 가방이 엎어진 컵을 또 치고 컵은 조금 옆으로 굴러가고

 

바닥이 움직이는 것 같지 않나요? 바닥이 끝을 끝으로 밀어내지 않나요? 끝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끝을 붙잡고 끝없이 갈 수 있겠지요?

 

내가 왈칵 쏟아진다 잠을 자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라 일어날 때처럼

 

나의 조금이나마 컵 바닥에

나의 조금이나마 베개 아래에

나의 조금이나마 이 방에 남아 있는 줄 알았다